17화. 유성길드의 초대장 (2)
연구소에서 나온 석민혁이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에 올라탔다.
인력거를 끄는 기사가 그를 향해 허리를 접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단주님.”
각성자인 자신이 스스로 걷는 편이 훨씬 빠르지만 석민혁은 인력거를 타는 것을 썩 즐겼다.
“감찰단 본부로.”
“예. 모시겠습니다, 단주님.”
인력거가 느릿느릿 출발했을 때 누더기를 입은 어린아이가 연구소 옆 꼬치구이 가게에서 뛰어나왔다. 뒤이어 가게 주인이 쇠꼬챙이를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이 새끼! 이 도둑놈의 새끼! 돈이 없으면 처먹지를 말아야지! 이게 어디서 도둑질을 해!”
“제발, 용서해주세요… 집에 동생이 굶어 죽어가고 있어요…….”
“뒈져! 뒈지라고! 돈이 없으면 뒈져야지!”
쯧.
석민혁이 거칠게 혀를 찼다.
더러운 프롤이다.
가진 능력이라고는 땅 파는 것뿐인 낙오자 놈들.
석민혁의 부모도 그러한 프롤이었다. 석민혁의 형도, 두 동생도 프롤이었다. 석민혁은 여덟 살부터 부모를 따라 농장에서 허리가 부러져라 일했다. 그리고 농장을 습격한 구울을 죽이고 각성한 열다섯 살 이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새 인력거는 멈춰 서 있었다. 기사의 시선은 질질 끌려가는 아이에게 못박혀 있었다.
“뭐 해? 출발하지 않고.”
“죄송, 죄송합니다, 단주님!”
기사가 허둥거리며 인력거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석민혁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버러지 같은 새끼. 저런 하등한 프롤을 지키는 게 각성자의 사명? 뭐? 길드는 성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는데 아직도 길드장이라는 인간이 그딴 소리를 하고 있으니 대전이 이 모양 아니냔 말이야.’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괴물과 맞서 싸우도록 선택받은 각성자와, 선택받지 못한 낙오자인 프롤.
평등하지 않은 인간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사상은 세상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늙은이의 머리에서나 나올 만한 생각이다.
‘내가 길드장이 되면 이 프롤들부터 거리에서 치워야지. 그래, 서울처럼. 얼마나 선도적이야.’
느릿느릿 뒤로 물러서는 거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석민혁은 곧 있을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방법을 고심했다.
검룡과 화공자의 비무.
석민혁은 검룡을 알고 있었다.
검룡이 아직 청응의 불도저라고 불리던 시절, 석민혁은 감찰단이 아니라 적사단의 단주였다.
청응파의 다급한 구원 요청을 받아 계룡에 출장을 나갔을 때 석민혁은 검룡이 싸우는 광경을 보았었다.
다른 이들은 검룡의 움직임에 담긴 의미를 읽지도 못한 듯했지만.
아주 짧은 빈틈을 파고들어가는 과감한 돌진.
자신의 눈으로도 모두 따라가기 어려운 현란한 검술.
도무지 종류를 파악할 수 없는 속성 공격.
심지어 그는 각성을 한 지 겨우 오 년이 지났다고 했다.
‘저놈은 호랑이 새끼야. 살아남는다면 크게 되겠어.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석민혁은 그가 오래 살아남으리라 여기지 않았다.
전투의 가장 선두에 서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제 몸을 스스로 들이미는 자가 오래 생존하리라 여기기는 어려웠다. 석민혁은 재능 있는 젊은 각성자들이 그렇게 스러지는 광경을 수 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호랑이 새끼는 살아남았고, 시시각각 용 새끼가 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을 제끼고 화공자를 밀어주는 길드장 때문에 안 그래도 골머리를 썩던 중이었는데, 고작 담장 하나 가로막힌 계룡성에 저런 인재가 나타나다니.
이대로라면 유성길드의 길드장이 되어 충청의 왕위에 오르는 일은 영원한 꿈으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이번 비무는 다시 만나기 힘든 기회였다. 어린 두 호랑이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화공자가 갑자기 사망하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의심의 화살이 돌아올 터. 아무리 철저하게 숨겨도 비밀이 드러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비무 도중이라면.
아무리 비무라고 해도, 격렬해지다 보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기기 마련. 길드에서도 일 년에 한두 명 건씩 비무 중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검룡은 전사고, 화공자는 술사지. 그 검룡이 맥없이 나가떨어질 리는 없으니 결국 근접전이 벌어질 테고, 서로 엉겨 붙은 둘에게 한꺼번에 면독수를 뿌리면…….’
검룡에게 덮어씌울 증거를 만들기는 쉬웠다.
얼마 전 힐링포션의 제조법을 계룡문으로 넘겼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연구원.
그의 유서에 몇 개의 문장을 더 써넣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시체는 말이 없다. 정황이 의심스러워도 길드장으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의심뿐일 터.
단 두 병이 전부라는 면독수를 한 병만 더 완성하면.
그걸로 길드장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다음 순서는 여준후.
‘감히 하등한 버러지 주제에 각성자용 독약을 만들어? 감히. 내 덕에 목숨 부지하고 사는 새끼가.’
***
“자네가 그 계룡검룡이구먼. 소문보다 더 훤칠하군.”
“네 뭐, 그런 말 많이 들었네요.”
“허. 소문대로 겸손이라는 걸 모르는군. 어디 그 실력도 소문대로일지 궁금하구먼.”
“얼굴보다는 실력 쪽이 훨씬 낫죠.”
긴 머리를 위로 올려 묶은 중년의 남자가 매서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유성길드 길드장 불패도(不敗刀) 지남천.
1차 블랙데이 직후 각성한 1세대 각성자이자 명실상부 충청의 최강자.
과연 느껴지는 기세가 남달랐다. 지금까지 마주친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압도적인 마력.
그러나…….
‘이놈이 그 유성길드의 길드장이라 이거지.’
유성길드의 짓거리는 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꼴같잖았다.
참았던 이유는 단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
유성길드가 마음만 먹으면 보육원이 아니라, 청응파를 뭉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다.
구원 요청에 응하지 않고, 괴물 사체를 구입하지 않고, 힐링포션과 마력증폭제를 판매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중소 문파가 휘청거릴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오크 백 마리? 와이번 백 마리?
이제 다 조밥이다.
은영단의 공개 훈련을 시작으로 자발적인 팀훈련이 유행처럼 번진 덕에 성벽 방어도 이제 손이 착착 맞았다.
계룡연구소에서는 자체적으로 힐링포션과 마력증폭제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계룡문이 유성길드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그동안 쌓인 게 많다.
빽을 믿고 시비를 터는 애새끼들은 그때그때 두들겨 줬으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그동안 힐포랑 증폭제 가격을 오지게 후려치고 있다는 걸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이 구파일방에 오대세가를 더한 새끼들…….
의 대가리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문주는 겸손을 배워야겠군.”
“문주 아니고 대표고요. 제 실력이 그렇게 궁금하시면 어디, 한 판 붙어 보실?”
최지수가 격렬하게 눈을 끔벅였다.
아마 그가 전음(傳音)을 보낼 수 있었다면 귀가 간지러웠을 테지만…….
내가 언제 최지수 말 들었냐고.
“자네에게 하늘 위 하늘을 가르쳐주기 위해 내 직접 검을 든다면 세간이 우리 유성길드를 비웃겠지.”
일곱 개의 하늘 중 하나라고 불리는 불패도 지남천이 뒤를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일형아.”
2미터 남짓의 키. 말쑥한 얼굴.
옆구리에 찬 검자루에 화려한 붉은 용이 새겨져 있었다.
유성길드 적사단의 부단주, 화공자(火公子) 정일형.
충청의 4세대 각성자 중 그 성취가 독보적이라고 했다.
일곱 살에 각성해서 열세 살에 혼자 오크를 잡았다든가, 열일곱에 삼십 여 마리 와이번 서식지를 소탕했다는 둥 소문이 자자했다.
희망보육원에 있을 때부터 그의 활약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었다.
보육원의 모든 원생들의 꿈은 각성해서 화공자처럼 되는 것이었으니까.
삼 년 전 대청호에 나타난 나가를 죽이고 나가에게 잡혀갔던 마을 사람들을 구한 일과 작년에 예산참변의 원인이었던 뱀파이어를 소멸시킨 일은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래 봐야 애송이지만.’
정일형은 한참 전부터 나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얼굴이다.
“길드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길드장님을 대신해 계룡검룡의 솜씨를 식견하고 싶습니다.”
“어떤가, 계룡검룡?”
나야 당신네들 낯짝이 구겨지게 만들 기회라면 얼마든지 콜이지. 근데 말이야…….
“맨입으로?”
해달라니까 또 순순히 해주고 싶지는 않거든.
“맨입이라니. 그러면 비무의 대가를 바란단 말인가.”
지남천의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내가 격이 안 맞는 애송이랑 붙어 주는 거니까 대가를 받기는 받아야 하는데.”
정일형의 마력이 순간 격렬하게 일렁였다.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라고, 이놈아.
“뭐, 대가는 됐고. 내기 어때요? 유성길드에 꿍쳐놓은 마핵이라도 좀 걸어 볼래요?”
숫제 레이저를 쏘아 보내는 최지수의 시선을 무시하며 내가 가볍게 대꾸했다.
“마핵이라니. 그건 이미 오래전에…….”
“피차 아는 사이에 구라는 됐고요. 이길 자신이 없나 봐요? 그럼, 저 검은 어때요? 장식용으로 두기는 아까운데.”
지남천의 등 뒤에 걸려 있는 장검.
거무튀튀한 검날의 예기가 예사롭지 않다.
“계룡검룡! 저 검은 우리 유성길드의 초대 길드장님께서……!”
“그만.”
흥분한 정일형을 지남천이 가로막았다.
“저것은 우리 길드의 상징과도 같은 검일세. 내가 저 검을 건다면, 검룡은 무엇을 걸 수 있나?”
***
비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깨끗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지수 형. 내가 만만해 보이나?”
“설마. 네가 사람을 얼마나 잘 패는데.”
“그거 말고. 첫인상 말야.”
최지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피부가 희고 얼굴 자체가 곱상하게 생겨 성격과 다르게 선한 인상을 주니까. 림이 네 신장도 일반인치고는 크지만 2미터가 넘는 각성자 평균에 비하면 작은 편이고.”
“그래서 그런가? 이제 일반인도 계룡검룡을 알 만큼 유명해졌다는데 아직도 나한테 비무를 신청하는 사람이 다 있네.”
“상대는 화공자다, 림아. 4세대 각성자라지만 3세대, 2세대 각성자보다 앞선다는 얘기도 있어.”
“그래서? 내가 질까봐 걱정 되냐?”
지남천은 유성길드의 상징이라는 검을 걸어 놓고 고작 오우거 심장 20개를 제시한 내 조건을 순순히 수락했다.
절대 지지 않으리라 여기든지, 혹은 무슨 꿍꿍이가 있든지.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설마. 제발 살살 해라. 화공자가 악인은 아니잖니.”
“알아. 안다고.”
최지수가 의심을 담뿍 담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림이 너. 유인 작전을 함께하자고는 언제 이야기할 거냐.”
“어디 말을 꺼낼 기회가 있어야지. 다짜고짜 비무를 하자는데 어떻게 해.”
“거절할 수도 있었잖으냐.”
“거어절? 유성길드 엉덩이를 걷어찰 이 좋은 기회를? 대체 왜?”
최지수가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할게. 한다고. 말은 해 보기로 했으니까. 내가 한입두말 하는 거 봤냐?”
“진심이겠지?”
“원래 그런 건 힘을 좀 보여주고 나서 해야 말이 잘 먹힌다고.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최지수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
계룡문의 비무대보다 훨씬 넓고 삐까번쩍한 비무대를 중심으로 구경꾼들이 우글거렸다.
유성길드의 모든 사람이 몰려온 듯 엄청난 인파였다.
비무대를 둘러싼 관객들이 주절거리는 목소리가 내 예민한 청각을 파고들었다.
-저게 그 유명한 청응의 불도저?
-떽. 이제 계룡검룡이지. 그 허심례의 목을 단칼에 날렸다던데.
-뭐가 대단해? 그 허심례가 저놈한테 당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데. 고작 저런 놈한테? 허여멀건 해가지고 툭 치면 쓰러지게 생겼는데.
아무도 정일형이 질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모양.
역시 우물 안 개구리들에게는 우물 바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비무대 아래에서 최지수가 입을 벙긋거렸다.
-죽.이.지.마.라.
이게 사람을 무슨 깡패로 아나.
비무대 위로 휘앵앵 바람이 불었다.
맞은편에 선 정일형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정말로 선공을 양보하시겠습니까.”
“그렇다니까.”
“아시다시피 술사와 전사의 비무는…….”
“누가 첫 공격을 성공하느냐로 결정되지.”
정일형이 살짝 이마를 구겼다.
최초 20미터의 간격이 사라지고, 근접전투로 돌입하면 어차피 술사의 필패.
그만큼, 둘 사이 간격이 존재하는 비무의 시작에는 술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술사 대 전사의 비무의 승패는 술사가 첫 공격으로 타격을 입히느냐, 혹은 전사가 그 공격을 회피하고 거리를 좁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선공을 양보했으니 자신을 얕본다고 느꼈겠지.
어쩌겠니. 네가 실제로 약한 것을.
“계룡검룡에게 단 하나 부족한 것이 겸손이라더니. 과연 세상 사람들 입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군요. 오늘 그 부족한 하나를 채우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짝다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귓구멍을 후볐다.
‘네 걱정이나 하시지, 애송아.’
비무대 주변에서 뾰족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나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내 눈앞의 녀석에게도…….
가진 자들끼리의 권력다툼.
많은 문파들이 그런 길을 걸었다.
힘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세력이 나뉜다. 나뉜 세력은 서로를 물어뜯고, 힘은 약화된다.
검황으로서 계속 살았더라면 월악문도 그랬을까.
나와 설표와 소화가 서로 갈라져서?
‘…아니. 그럴 리가.’
많은 문파들이 걸었던 길이라 해서 모든 문파가 걸어야만 하는 길은 아니다.
내… 아니 우리의 계룡문은…….
정일형이 체념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로 선공을 양보하시겠습니까.”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일형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를 향해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연, 충청 제일로 꼽히는 후기지수.’
이내 그의 두 손 위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화염구 두 개가 이글거리며 떠올랐다.
수박만한 것 하나. 주먹만한 것 하나.
주먹을 던져 회피를 유도하고.
그 지점으로 연이어 수박을 던질 셈이겠지만.
“갑니다.”
정일형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다음 순간, 화염구가 금빛의 직선을 그리며 화살처럼 쏘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