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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18화 (18/122)

18화. 유성길드의 초대장 (3)

순식간에 화염구가 가까워졌다.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며 나는 단번에 진기를 끌어올렸다. 내력을 잔뜩 주입한 검이 희게 빛났다.

-저거 봐라. 꼼짝도 못하네.

-화공자, 잘한다!

-용용아! 피해!

피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공기를 불태우며 날아든 화염구가 코앞에 다다른 순간.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금빛 화염구의 중앙에 하얀 선이 생겼다.

다시 수평으로.

우상단.

좌상단.

우하향.

좌하향.

파바바바밧.

순식간에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간 불씨가 공기를 태우다가 제풀에 소멸했다.

-헐… 피하는 게 아니라…

-검으로, 잘랐어? 금구를?

정일형 역시 웅성거림을 들었을 터.

차분하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두 번째 화염구를 쏘아냈다.

날아오는 속도가 배는 빠르다.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시야를 모두 잠식했을 때.

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응축하지 않은 검기가 흘러나왔다.

검기를 남기며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검을 휘두르면.

남겨진 검기가 검막(劍幕)이 된다.

화르르르륵!

날아온 화염구가 검막에 가로막혔다. 나는 한층 진기를 끌어올리며 휘두르는 속도를 더했다. 희게 빛나는 얇은 장막 너머로 황금빛 불길이 너울거렸다.

타닥. 타닥.

불티가 튀었다.

수박만하던 화염구가 주먹만큼 작아지고.

다시 메추리알만큼 작아졌다가.

사라졌다.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고요해져 있었다.

정적을 뚫고,

화염탄 두 개가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잔뜩 굳은 얼굴-.

단전을 매섭게 휘돌던 기운이,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올라 왼손에 맺혔다.

오른손에 든 검끝에 맺혔다.

권강(拳剛)과 검강(劍剛).

적(積)으로 유형화된 기의 덩어리가 새하얀 빛을 발하며 총알처럼 쏘아지고.

콰콰콰콰콰!!!!

귀를 터뜨릴 듯한 폭음과 함께 두 개의 화염탄과 두 개의 강기가 한가운데에서 맞부딪쳤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금도 가지 않는 비무대의 바닥이 산산조각나 사방으로 비산했다.

시멘트 조각과 흙먼지가 주변을 뿌옇게 뒤덮었다.

그 순간,

스파앗.

비무대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쏘아졌다.

바늘처럼 가느다란 철침(鐵鍼) 수십 개.

단순한 암기로 정일형이나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이걸 던진 녀석들도 알고 있을 터.

철침의 뾰족한 끄트머리에 아마 각성자용 독액을 발랐겠지만, 어차피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앞에 선 멍청한 놈은 사정이 다르겠지.

‘이 기회에 유성길드에 신세를 지워 볼까.’

바닥을 걷어차자 단번에 거리가 좁혀졌다.

호신강기에 부딪힌 철침이 쏘아진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망연자실하던 정일형이 뒤늦게 두 손을 들어올렸으나.

‘늦다고. 멍청한 놈아.’

철침은 이미 정일형의 지척이었다.

나는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낙락화우(落落花雨)의 초식을 펼쳤다.

꽃잎처럼 가느다란 검기가 놈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물처럼 둘러쳤다.

검기의 그물에 가로막힌 철침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미처 막지 못한 두 개의 철침이 정일형의 손등에 꽂혔다.

정일형의 눈이 감기고, 그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비무대 아래의 누군가가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암습이다! 계룡검룡이 화공자를 암습했다!”

비무대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단이 병장기를 꺼내 들고 우르르 비무대로 뛰어올랐다.

“비겁한 놈! 비무 중에 암습을 가하다니!”

“야… 여기 너네 집이잖아. 내가 무슨 수로 뒤치기를 해?”

“당장 검을 버려라. 버리지 않으면…!”

“버리지 않으면? 어쩔 건데? 응?”

길드 돌아가는 꼴이 웃기지도 않다.

이런 새끼들하고 같이 뭐를 해? 저들끼리 아귀다툼 하느라 여념이 없는 새끼들이랑?

“림아, 참아라! 참기로 했잖으냐!”

“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경비단 세 놈이 최지수를 에워쌌다.

“얌전히 따라와라. 저항하면 제압하겠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대표님 말씀대로, 이곳은 유성길드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무슨 수로 압습을 가하겠습니까…!”

“그건 지금부터 조사해보면 알겠지.”

검을 움켜쥔 경비팀장이 말했다.

“협조하겠습니다. 협조하겠으니….”

최지수가 나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눈을 끔벅였다.

참으라고?

지금 정일형 저놈을 도와주고도 누명을 쓰게 생겼는데?

비무대 위에 올라온 놈들은 다섯. 최지수를 에워싼 놈들이 셋.

그중 가장 강한 놈은 경비팀장.

느껴지는 마력이 만만치 않다. 아마 2세대 각성자, 적어도 3세대 각성자일 터.

여기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합동작전이고 뭐고. 유성길드와의 관계는 완전히 어그러지겠지.

솜씨를 보여주려고는 했지만, 적으로 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검을 쥔 채 내가 망설이는 사이 최지수의 빠른 목소리가 쏟아졌다.

“림아. 길드에서 조사를 한다잖냐. 저렇게 강력한 약물이 흔한 것도 아니고, 금방 출처를 밝힐 수 있을 거다. 지금 계룡에 급한 일도 없으니 쉰다고 생각하고…”

돌연, 최지수가 말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리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나는 검을 들고, 휘둘렀다.

수평으로 휘두른 검이 세 놈의 가슴팍을 동시에 스쳤다.

손목을 뒤틀어 상단과 중단과 하단을 연속으로 찌르고,

무릎을 걷어차며 다시 상단을 찔렸다.

한 놈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최지수를 향해 짓쳐 들어가는 내 앞을 일련의 덩치가 가로막았다.

“검룡! 저항하지 말…!”

수직으로 휘두른 검에 한 놈의 어깨가 날아갔다.

“순순히 조사를 받…!”

역수로 바꿔 쥔 검끝이 한 놈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희게 빛나는 검기가 공중을 휘저을 때마다 핏방울이 튀고, 잘려나간 팔다리가 곤두박질쳤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검기가 최지수를 제압한 세 놈을 향해 동시에 뻗어 나갔다.

팟. 팟. 파앗.

놈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내 팔이 최지수를 당겨 안았다.

‘호흡은?’

가슴팍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콧구멍으로 숨이 들락날락거렸다.

나는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지수 형. 야, 씨발 최지수.”

돌아오는 대꾸가 없다.

수면제? 마력억제제?

최지수의 목에 주사기를 꽂은 새끼는 철침을 날린 놈들과 한패는 아니었다.

철침을 날린 세 놈은 단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최지수를 제압한 씹새끼는 경비단원이었고.

그 주사기에 들어 있던 약물은 아마 정일형을 해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그것은 아닐 터.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한다.

‘혹시라도 최지수가 잘못되면… 아니.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건너편 모퉁이에 드디어 연구소 건물이 보였다.

화생방 방독면을 쓰고 온몸에 방호갑을 두른 덩치들이 연구소의 현관을 통과해 안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한 나를 따라잡았을 리는 없으니.

정일형을 해한 약물의 출처를 찾는 모양이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속도를 줄여 연구소 뒤편으로 돌아 들었다.

두 놈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정말로 여 소장이 감찰단주와 결탁하고 벌인 일일까요?”

“이제부터 조사해보면 알겠지.”

“저는 못 믿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화공자를? 역시 계룡검룡 짓이 아닐까요?”

“네가 마음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대주님이 명하시는 대로…”

지껄이던 놈이 눈을 홉뜨며 말을 멈췄다.

나는 혈도를 잡혀 누운 두 덩치를 뛰어넘어 바닥을 걷어찼다.

3층의 유리창 안쪽에 인기척이 있다.

연구소 안 인간이라면 분명 연구원일 터.

와장창 소리를 내며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커다란 가방에 무엇인가를 마구잡이로 쓸어 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얘 깨워. 당장.”

잠시 굳어 있던 놈이 유리병 하나를 내던졌다. 가볍게 잡아채 책상 위에 내려놓자 이번에는 스프레이를 꺼내 쥐었다.

나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겠지만, 최지수는 다르다.

단번에 놈의 손목을 쥐고 뒤틀었다. 몇 군데 혈도를 짚자 놈이 째지게 비명을 질렀다.

“좋은 말로 할 때 듣자. 내가 지금 기분이 매우 나쁘거든.”

.

.

.

“언제 깨어나는데.”

“십 분이면 됩니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십 분, 아니 오 분이면 일어나실 겁니다.”

“뭐를 맞은 거냐.”

“가벼운 진정제더군요. 난동을 부리는 각성자를 제압하는 용도로 경비대에서 많이 사용하지요. 후유증도 전혀 없으실 겁니다.”

놈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럼 조치가 다 끝났으니 저는 이제 가 봐도 될까요? 제가 좀 바빠서…”

“닥치고 있어.”

다행히도 최지수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가슴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선생님. 제가 사정이…”

“여준후 소장. 죽여 버리기 전에 아가리 닥쳐.”

연구소 3층의 커다란 실험실에 있던, 머리가 벗겨진 놈은 내가 만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처음에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골똘히 생각하니 기억이 떠올랐다.

몇 달 전에 균열의 정보를 찾던 중 방문했던 연구원 중 하나였다. 유성연구소 여준후 팀장.

딱 하루 미행으로도 어떤 인간인지 훤히 보였다.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 발바닥을 핥는, 시체 뜯어먹는 구울 같은 새끼.

이런 놈이 소장으로까지 승진하다니 유성길드도 썩을 만큼 썩은 모양이다.

‘협력? 합동 작전? 구울이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아래층에서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 앞에 기척이 느껴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나고 방독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여 소장. 순순히 조사에 응해라.”

선두에 선 방독면이 말했다. 뒤이어 방독면 속에서 당황한 목소리들이 튀어 올랐다.

“팀장님! 저 사람 계룡검룡 아닙니까?”

“검룡이 어째서 여 소장과 함께?”

“역시 한패였구나!”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찬찬히 설명할 기분이 아니거든.

여준후의 혈도를 짚어 딱딱하게 굳은 놈을 구석에 내던졌다.

놈이 어떤 놈이든 중요하지 않다. 최지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놈은 이곳에 있어야 한다.

나는 최지수가 누워 있는 침대 앞에 버티고 선 채 검을 뽑아 휘둘렀다.

스파앗.

흰 검기가 허공을 격하고,

검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 시멘트 바닥에 한 줄의 실선이 생겨났다.

“그 선을 넘어오면 베겠다.”

선두의 방호복이 손짓을 했다.

뒤에 선 방호복들이 다가섰다.

발 하나가 선을 넘었다.

“아악!”

신발의 끄트머리와 함께 잘려나간 발가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매끄러운 단면에서 흘러내린 피가 회색 시멘트를 붉게 물들였다.

다시, 팔 하나가 선을 넘었다.

“윽…!”

오크 가죽으로 만든 장갑과 함께 잘려나간 손목이 공중을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목을 붙들고 놈이 주저앉았다.

“…회복술사는 어디에 있나.”

“1층에 있습니다, 팀장님.”

“데려와.”

지시를 받은 놈이 빠르게 뒤돌아 사라졌다.

팀장이 방호복 속의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계룡검룡. 화공자가 자네와의 비무에서 암습을 당해 부상을 입었다. 현장에 남은 증거물에 극독이 발라져 있었지. 우리로서는 일단 자네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극독이라.

두 개의 철침에 적중당했는데 즉시 의식을 잃었을 정도이니, 놈을 향해 날아오던 철침이 모두 놈의 몸에 박혔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저 쓸모없는 눈깔로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겠지만.

“머리도 비었는데 눈도 멀었네.”

“뭐라고?”

“암습을 당한 건 오히려 이쪽이야. 계룡문의 부대표가 니들 때문에 의식을 잃었다고.”

이 씨발 새끼야.

“진정제 투약은 체포에 저항하는 각성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그건 니들 규칙이고. 어디서 사람을 초대해놓고 사고가 터졌는데 사과가 아니라 체포를 해? 니들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길드에 방문한 다른 조직의 대표를 겁박하는 것이 대 유성길드의 방식이냐?”

“말했다시피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일단 자네를 조사하고 이후 자네와 무관한 일이라면…”

“씨발아.”

“뭐라고?”

“씨발이라고. 이 씨발 새끼야. 그러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제발 같이 가달라고 빌어야지. 냅다 검부터 뽑는 것도 니들 대 유성길드 규칙이냐?”

방호복의 틈새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화공자를 보호한 장면은 경황이 없었으니 못 보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서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던 독 묻은 철침을 저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게 암습이라면, 화공자만이 아니라 나 역시 암습의 피해자.

조사가 아니라 보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렇게 뻣뻣하게 나온다 이거지.

“좋다, 계룡검룡. 자네를 체포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자는 체포하겠다.”

“저 새끼? 여 소장?”

“그렇다. 여 소장이 그 극독을 개발했다는 정황이…”

“안 돼.”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 역시 자네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리 부대표가 니들 때문에 뻗었잖아. 우리 부대표 일어나기 전까지는 안 돼.”

“그건 말했다시피 간단한 진정제다. 딱히 해약하지 않아도 두 시간이면…”

이 새끼가 듣자듣자 하니까 정도를 모르네.

콰직!

기운을 실은 탄지공이 놈의 다리 사이 시멘트 바닥을 두부처럼 으깼다.

움푹 파인 바닥을 잠시 내려다보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계룡문 부대표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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