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달 그림자 (1)
“형. 마력 확인해봐.”
최지수가 손을 들어 벽을 무너뜨렸다.
“아주 멀쩡하다. 말한 대로 그냥 진정제였나 보구나.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림아.”
짝짝짝.
경호대 2팀 팀장 백희찬이 박수를 쳤다.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그러면 이제 여 소장을 데려가도 되나?”
“그러든지.”
“그런데 검룡. 여 소장 상태가 왜 이런가?”
여준후는 막 도망치려고 엉덩이를 뒤로 뺀, 똥 싸다 만 자세로 굳어 있었다.
등줄기를 훑어 마혈과 아혈을 풀자마자 여준후가 다급하게 입을 벙긋거렸다.
“이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극독이라니요. 저는 결단코 길드장님께서 지시하신 외의 연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정말입니다.”
“그거야 앞으로 조사해 보면 알겠지요.”
팀원들이 다가와 여준후에게 수갑을 채웠다.
백희찬이 꾸뻑 고개를 숙였다.
“협조 고맙네.”
“그래. 만나서 불쾌했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최지수의 동공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림아.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나는 최지수의 말을 씹고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최지수가 금세 내 뒤에 따라붙었다.
“설마 이대로 돌아가려고?”
“설마는 무슨. 형은 이 꼴을 당하고도 얘네랑 같이 작전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사고에 가까운 일로 유성길드에서도 오해할만한 여지가….”
콰아아아아!!!!
거대한 폭음이 귀를 강타했다.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폭음이 일어난 곳을 향했다.
유성길드의 본부 건물이 노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
‘죽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하더니!’
사내가 핏줄 돋은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철제 책상의 상판이 종이처럼 우그러졌다.
유성길드 감찰단 단주 석민혁.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검룡이 먼저 맞았단 말이지.’
피어 오른 흙먼지에도 불구하고, 석민혁은 면독수를 듬뿍 바른 수십 개의 암기가 검룡의 몸뚱아리에 명중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검룡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화공자에게 쏘아진 암기 대부분을 막아내기까지 했다.
그 후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흉보뿐.
사실 비무의 시작부터, 석민혁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다.
접근전은 벌어지지도 않았다. 검룡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기괴한 수법으로 화공자의 공격을 연달아 파훼했다.
이대로라면 이 기회가 그대로 날아간다. 두 어린 호랑이를 한 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거센 폭발이 비무대를 박살내고 흙먼지가 그 위를 뒤덮었을 때, 석민혁은 자신이 선택의 순간에 놓여 있음을 깨달았다.
이대로 유성길드의 2인자로 살다가 차츰 뒤로 밀려나느냐.
혹은.
도박을 하느냐.
화공자는 넋을 잃었고, 검룡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제 비무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압도적인 계룡검룡의 승리.
‘이곳에서 없애야 한다. 저, 검룡이야말로.’
석민혁은 오른손을 들어올려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어, 손목을 틀었다.
그 순간.
면독수를 듬뿍 묻힌 암기가 두 목표물을 향해 총알처럼 쏘아졌다. 바늘로 강철도 뚫는 실력자들을 고르고 골라 수천 번 반복한 훈련, 그대로였다.
‘확실히 맞았는데. 어째서 멀쩡한 것이지?’
검룡이 비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기 직전, 석민혁도 그 자리를 떠났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선택의 여지는 사라졌다.
계획과 달리 살아남은 검룡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것이고, 길드장은 계룡문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유성길드의 연구소부터 확인할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경비대가 발 빠르게 연구소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석민혁 역시 쓸 수 있는 패가 많았다.
석민혁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뉴대전당의 당원들에게 다급히 연락을 넣어 작전 ‘개천’을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우유부단하고 시대착오적인 늙은이를 밀어내고 대전에 새 하늘을 열기 위해서 자신의 아래에 모여든 이들이 이내 길드 본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민혁은 건물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골목을 내달았다.
‘길드장은 내가 그 괴물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
사내의 신형이 화염에 휩싸인 길드 본부를 지나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형. 이거 쿠데타지?”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유성길드의 판세가 혼란스럽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구나.”
최지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전투가 벌어지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길드 본부 앞 광장.
이곳저곳에서 몰려든 이들이 이곳저곳에서 몰려나온 이들과 어지럽게 맞붙고 있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화염구가 무엇인가를 태우고 석벽이 불길을 막아내고 얼음창이 석벽을 꿰뚫었다.
“개판이구나. 계룡문이 최악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최지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어디다가 지금 우리 계룡문을 갖다 대? 내가 뭐랬냐고. 이런 새끼들하고 하압동? 혀업력? 지나가던 고블린이 아이구야, 하고 웃겠다.”
나는 최지수를 타박하며 상황을 관망했다.
유성길드에 아주 큰 신세를 지울 절호의 기회다.
자고로 도움의 손길은 극적인 순간에 뻗을수록 효과적인 법.
뒤치기한 놈을 도울 수는 없으니 상황을 보다가 길드장 쪽이 밀리면 거들어줄 생각이었는데...
“…쟤네 대응이 겁나 빠르네?”
“경호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구나. 쿠데타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의 전투 끝에 승기를 잡은 쪽은 경호대를 중심으로 한 길드장 쪽 세력이었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반군의 무리를 착실하게 제압했다.
기세를 올리던 반군 세력은 예상과 다른 침착한 대응에 허둥거리다가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박살나면서 차근차근 제압당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불패도 지남천.
그가 합류하면서부터 전투는 완전히 기울었다.
김강산의 대도보다 더 큰, 3미터 남짓의 대도가 휩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피가 흩뿌렸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다더니 다 그저 소문이었던 모양이다. 과연 불패도라는 명성대로구나. 석민혁이 온다 해도 상대하기는 어렵겠다. 그런데 그 석민혁은 어디에 있는지, 설마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내뺀 건 아니… 림아? 림아?”
멀리에서,
최지수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주 멀리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내 시야에는 오직, 지남천밖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저 보법(步法).
아주 거칠고 어설프지만, 내가 알고 있는 보법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분명 닮았어.’
가슴이 크게 뛰었다.
기대와 의심과 불안,
혹은 그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 무엇.
손바닥이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닦아내자 입고 있던 회색 바지에 손바닥 모양의 흔적이 남았다.
“…림아. 괜찮으냐?”
나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마른 손으로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거세게 바닥을 걷어차자,
최지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단번에 멀어졌다.
허공에 하이얀 빛무리가 그려졌다.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검기가 지나는 길마다 반군의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나는 피의 길을 따라 곧 지남천의 지척에 도달했다.
“검룡, 여기 있었군. 마음은 고맙네만 자네가 돕지 않아도 괜찮네.”
지남천은 갑작스러운 쿠데타에 대응하는 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드장님. 이 모두를 예상하고 있으셨습니까?”
나를 뒤따라온 최지수가 불쑥 물었다.
상대방의 말을 끊는 것은 최지수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지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최지수가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계룡문 대표님을 미끼로, 유성길드 내부의 반대파를 일소하려 계획하셨습니까?”
돌아가는 정황이 모두 그렇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이 검으로 지남천을 겨누어도 그로서는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확인해야 한다. 정말로 그 보법이 맞는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지남천은…….
나는 가볍게 검을 흔들어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을 베어냈다.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자고, 형. 이 사태부터 끝내는 게 먼저니까.”
최지수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정식으로 사죄하지.”
“사죄는 됐고, 보상으로 받을게요.”
검지와 엄지로 만든 동그라미를 가볍게 흔들자 지남천이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뭐. 정산은 천천히 하고. 일단 마무리부터 해 볼까요.”
“…죽이지는 말게.”
“노력하죠.”
고개를 돌린 그가 다시 도를 들어올렸다. 도가 지나간 길을 따라 내가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수직으로 벤 검날이 어깨를 자르고,
수평으로 벤 검날이 무릎을 자르고,
찔러들어간 검끝이 허벅지를 관통하고,
왼손의 나한권(羅漢拳)이 복부에 직격했다.
순식간에 반군 넷이 전투불능이 되어 나자빠졌다.
“허, 참… 다시 봐도 대단하군.”
지남천이 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고는 다시 도를 휘둘렀다.
여유만만하던 그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것은, 경호대원 하나가 달려와 그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인 직후였다.
그 순간.
귀를 파고드는 비명과 함께, 본부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석민혁, 이놈이…!”
지남천의 악문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도를 움켜쥔 채 총알처럼 달려나가는 그를 뒤따라 바닥을 걷어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 섰다.
환도를 옆구리에 찬 석민혁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석민혁의 등 뒤에서 연신 비명 소리가 튀어 올랐다.
괴물의 기운. 그것도 보통 괴물이 아니다. 응축된 마기(魔氣)의 정도로는 거의 두억시니에 필적할 정도-.
“림아. 이게 대체…?”
다급하게 내 뒤를 쫓아온 최지수가 신음을 흘렸다.
그의 탐색 능력으로 마기를 알아챈 모양.
“어떻게 성 내에 이런 괴물이…!”
나는 잘게 고개를 흔들었다.
최지수가 모르는 정보. 나 역시 알 리 없다.
하지만 유성길드의 이 둘은,
‘괴물의 출현에 놀라지 않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를 밟고 선 석민혁이 환도를 두어 번 흔들었다.
“길드장님께서 이리 황급하신 모습은 참 오래간만입니다?”
길드 본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반군을 베어낼 때와 달리 지남천의 안색은 핏기 없이 파리했다. 악문 잇새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라.”
“저 괴물은 직접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길드장이 제 집 지하에 괴물을 키우는 게 당신이 그리 지껄여대는 성민을 지키는 짓인가 보지?”
석민혁이 빙글빙글 웃으며 주절거렸다.
집 지하에 괴물을 키워? …애완괴물?
“당장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지남천의 말을 끊어내듯,
화르륵.
석민혁의 환도가 백색의 화염에 휩싸였다.
동시에,
건물의 잔해 뒤에서 쏟아져 나오던 살기가 일순간 짙어졌다.
진기가 들어찬 검을 휘두르며, 내가 외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가 맡을 테니, 가!”
콰아아아아!!!
쏘아져 나간 강기의 구슬이 석민혁에게 직격했다. 폭발을 뚫고 지남천의 신형이 바람처럼 석민혁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 새끼가, 어딜…!”
최지수가 세운 석벽이 석민혁의 화염구에 단번에 박살났다.
산산조각난 돌조각이 다시 잔해가 되어 잔해 위로 내려앉았다.
환도를 휘둘러 강기를 막아낸 석민혁이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계룡검룡. 비무대의 일은 내가 미안했네. 정중하게 사과하지. 지난 일은 잊고 나와 손을 잡자구. 내가 길드장이 되면 검룡께 부길드장의 자리를 약속하겠네. 계룡 따위 좁은 성에서…”
혓바닥이 길다. 전형적인 악인의 패턴이다.
“지수 형. 저 새끼 악인이지?”
“그렇다. 첫 번째 살인은 열다섯 살. 각성 직후 제 가족을 죽였지. 유성길드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사냥꾼 노릇을 병행하며 청부살인을…”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최지수의 설명이 멈췄다.
“됐고. 거악이야?”
“그래. 거악이다.”
최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거악 때려잡기는 오랜만이네.”
“조심해라, 림아. 저자가 그래도…”
다시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최지수의 염려가 멎었다.
“됐고. 형 마력은?”
“넘쳐난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는?”
“선빵필승이지.”
최지수의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그 순간,
놈이 백색의 불꽃이 타오르는 환도를 치켜올렸다.
매복하고 있던 졸개들이 사방에서 뛰쳐나와,
카앙! 캉! 카아앙!
최지수가 세운 강철의 감옥에 가로막혔다.
놈과 나, 최지수만이 4미터 너비의 강철의 감옥 안쪽에 존재했다.
병장기가 강철벽을 두들기는 소리를 뚫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놈이 달려들었다.
단번에 거리가 사라지고,
바싹 다가든 놈이 환도를 휘둘렀다.
도날보다 먼저, 너울거리는 백색의 불꽃이 내 몸을 휘감으려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