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달 그림자 (2)
열기가 매서웠다.
바싹 끌어올린 호신강기도 오래 버티기 힘들 정도의 열기.
나는 쇄도하던 기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스파앗.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흰 불길을 두 조각으로 갈랐다.
“어디서 잔재주를…!”
카앙!
환도와 검이 부딪히며 불씨가 튀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놈이 연격을 퍼부었다.
허리와 목, 어깨와 무릎, 다시 목과 어깨.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깨질 강맹한 공격.
캉! 카앙! 캉!
나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허리를 베어드는 환도를 방어하고,
목을 노리는 환도를 쳐내고,
왼쪽으로 발을 내딛으며 어깨를 내리치는 환도를 회피하고,
그대로 검을 수직으로 그어 무릎을 베어드는 환도를 막아냈다.
‘완력 하나는 끝내주네.’
검을 쥔 손이 얼얼했다. 속도 역시 부족하지 않다. 과연 유성길드의 이인자라 불릴 만한 솜씨.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연이은 공방의 결과, 환도를 휘감았던 불꽃은 거의 사그라들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놈이 다시 한 번 마력을 끌어올리려 했으나.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상단을 찌른 검끝을 놈이 어깨를 뒤틀어 회피했다.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놈의 열린 오른쪽 가슴을 찌르자, 넓적한 도날이 검끝을 가로막았다.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검을 둥글게 휘두르자, 놈이 펄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줄 수는 없지!’
리치로 보나 무기의 길이로 보나 거리가 생길수록 놈에게 유리한 전투.
오른발을 깊숙이 디디며 놈에게 바싹 따라붙으며 아랫배를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화르륵!
등줄기에 불길이 쏟아졌다. 김강산의 황염보다 더욱 강맹한, 백염(白炎).
호신강기로 화염을 버티며 놈의 양 무릎을 연이어 베어 들어갔다.
카강! 캉!
이번에도 놈의 환도가 공격을 가로막았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놈의 오크 가죽 갑옷 이곳저곳이 찢겨나가고 작은 상처들로부터 피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모두 치명타는 아니다. 좀처럼 빈틈이 생기지 않았다.
강철 감옥 바깥에서 벽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전투의 여파로 강철 벽이 녹고 검기에 잘려나갈 때마다 최지수가 재빠르게 복구했으나.
그로서도 이제 거의 한계일 터.
‘승부를 걸어야겠어.’
기맥을 타고 올라온 진기가 검날을 하얗게 빛냈다.
타앗.
바닥을 걷어차며 힘껏 어깨를 젖혔다.
활시위처럼 팽팽해진 몸을 거세게 접으며 놈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있는 힘껏 휘두른 검이 놈이 치켜올린 환도에 가로막혔다.
공중에 떠올랐던 몸이 일순간 균형을 잃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놈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환도를 휘둘렀다. 하얗게 불타는 환도가 내 허리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그 순간.
허리를 뒤틀며 도날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손바닥이 느릿느릿 원을 그렸다. 뒤이어 무형의 기운이 환도를 에워쌌다.
태극권(太極拳).
부드러움 속의 강맹함.
강물처럼 줄기줄기 이어지는 기운에 첩첩이 에워싸인 환도가, 내 허리의 한 치 앞에서 정지했다.
“이게, 왜…!”
놈이 눈을 홉뜨며 마력을 끌어올리는 찰나.
단번에 기운을 거뒀다.
붙잡고 있던 기운이 단숨에 사라지자 놈의 몸이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주 찰나의 빈틈.
하지만, 내 손가락이 놈의 몸에 닿기에는 충분한-.
은영단을 훈련시키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무림인의 내력이 대부분이 고여 있는 곳은 하단전.
그동안 각성자에게는 단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는 줄 알았으나.
수십 번 맞붙다보니, 애들이 마력을 끌어올릴 때마다 유독 마력이 강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하단전과 중단전의 사이. 내가 마단전(魔丹田)이라 이름 붙인,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막기 위해서는….
기운을 실은 검지와 중지가 놈의 상완혈과 하완혈을 연달아 짚었다.
그 사이 균형을 잡은 놈이 거세게 환도를 휘둘렀다.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는 수작이겠지만.
공기를 가르며 등줄기로 떨어지는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히려 놈 가까이 파고들었다.
왼손의 중지로 건리혈을 짚고, 동시에 검지로 중정혈을 짚었다.
그 순간 내 등줄기에 닿은 환도의 날이,
카앙!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방금 전보다 확연히 느리고, 약해진 공격.
“지금 무슨 짓거리를…!”
놈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왜? 마력이 말을 안 듣냐?”
힘없이 휘둘러진 도날을 용조수로 잡아채며 놈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검끝이 각성자의 단단한 피부를 단번에 꿰뚫었다.
검을 쥔 손바닥으로 내 검끝이 놈의 뼈마디를 박살내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더한층 기운을 끌어올리자,
검끝을 타고 솟은 날카로운 검기가 놈의 등 뒤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놈의 몸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나는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몸통에 뚫린 구멍으로부터 붉은 피가 폭포처럼 솟구쳤다.
놈이 울컥, 피를 토했다. 무엇인가를 지껄이려는 것 같았다.
악인의 변명. 귀에 담을 필요 없는.
흰 검기가 놈의 목을 지나가고, 잘려나간 대가리가 땅을 굴렀다.
허리를 굽혀 그 대가리를 집어든 순간 강철 감옥이 사라졌다.
병장기를 치켜든 졸개들의 얼어붙은 얼굴을 향해 내가 놈의 대가리를 들어올렸다.
“이렇게 되고 싶으면 덤벼.”
도끼를 내려놓은 한 녀석을 시작으로, 졸개들이 슬금슬금 길을 텄다. 그 사이로, 최지수와 내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
“검룡. 내 검룡의 도움을 잊지 않겠네.”
지남천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네모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게.”
석민혁의 대가리를 왼손에 쥐고 괴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을 때, 상황은 이미 정리된 후였다.
유성길드의 길드원들이 괴물의 주위를 포위한 가운데, 지남천이 축 늘어진 괴물을 쇠사슬로 칭칭 감고 있었다.
2미터도 되지 않는 인간형 괴물.
형태에 가장 가까운 괴물은 리치지만 독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좀비도 한 마리 없으니 리치는 아닐 테고.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원하는 바, 많죠. 그건 천천히 얘기하고요. 아까 그 괴물은 뭡니까?”
지남천의 얼굴에서 단번에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자네도 봤군.”
“제가 눈이 좀 좋거든요. 귀도 좋고요.”
삼 년 전에 나온 그 괴물이라고 경호대원들이 수근거렸었다. 연구소에서 봤던 팀장 백희찬이 서둘러 입단속을 했지만...
그게 더 수상하다고.
지남천은 선뜻 이야기하지 못하고 입술을 벙긋거렸다. 눈썹 사이 골이 깊었다.
“그래, 들었겠지. 석민혁의 말도…….”
나는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내, 딸이라네.”
지남천의 눈빛이 어둑해졌다.
지남천은 하나뿐인 딸이 어렸을 적부터 검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가 하급 괴물을 잡기에 충분하다 판단된 열다섯 살에 직접 딸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고블린과 구울, 세이렌을 모두 잡았으나.
“각성을 못했다?”
“…그래.”
지남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경험한 일이었다. 그 막막함과 좌절 모두.
지남천은 길드에도 몇 개 남지 않은 마핵까지 딸에게 먹이고 다시 괴물 사냥을 시켰으나 그의 딸, 지현아는 끝내 각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성촉진제를 맞췄어요?”
“내 딸이네. 자식에게 그런 부모가 어디 있나.”
“그럼 왜 저 꼴이 됐죠?”
“…스스로 구해서 맞았더군. 그만큼 각성을 하고 싶었던 게지.”
각성제의 개발은 모든 이들의 숙원이었다.
비록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중 일부 각성촉진제는 일반인에게 마력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대신 이성을 앗아갔다.
이성이 없는, 마력을 가진 존재.
즉, 괴물이었다.
1차 블랙데이 이후 불티나게 팔렸던 SP바이오의 각성촉진제 ‘나각성’이 성벽 안에서 갑작스럽게 괴물이 출현해 생긴 수많은 참변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걸 어디에서 구했는지… 삼 년 전에 그 일이 일어났지. 그 후로는 줄곧 마력억제제와 수면제를 쏟아 부어 재워놓았어. 내 딸을, 내 하나뿐인 딸을, 강철벽을 몇 겹이나 두른 지하실에 가둬 놓고….”
그가 느릿느릿 눈을 껌벅였다.
딸은 하나뿐인 가족인 지남천을 알아보기는커녕 조금만 기운이 돌아와도 그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지남천은 몇 번이고 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길드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네. 그러니 길드에 일반인을 혐오하는 세력이 있는 줄도 몰랐지. 내가 알아챘을 때는 이미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파악하기가 어렵더군.”
“그래서 나를 미끼로 썼다?”
지남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미끼라니. 그저 그들에게 판을 깔아 준 게지.”
“그들이 이번에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내가 당신을 암습했다며 드러눕기라도 했을 겁니까?”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지 않은가.”
“내가 놈들의 암습에 죽든지 말든지 상관도 없었겠죠.”
“…나도 그런 독약을 개발했을지는 생각도 못 했어. 그 점은 미안하네.”
늙은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천 년 묵은 구렁이다.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진심이네. 그저…”
“그저, 뭐요?”
“계룡검룡에 대한 세간의 평이 사실이라면, 검룡은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네.”
“세간의 평? 속성능력도 제대로 못 쓰는 반쪽자리 각성자? 얼굴만 반반한 놈? 아니면, 수틀리면 검부터 뽑아 드는 미친개?”
모두 실제로 들었던 말들이다.
내 귀가 너무 예민해서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를 모두 잡아채는 터라 못 들을래야 못 들을 수가 없다.
물론 저런 소리를 하는 놈들은 모두 대가리를 후려 패서 이제 계룡은 청정구역이 되었지만.
“계룡문의 문훈이 ‘계룡을 지키는 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인들을 성 안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세간의 평은 때로 박하지만, 사실을 놓치지는 않는 법이지.”
“그래서, 세간의 평을 믿고 유성길드의 상징이라는 검을 내줘도 괜찮다 생각했어요?”
“자네가 말했다시피 장식용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검이지.”
지남천이 나를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유성길드는 고인 물이야. 고여서 썩어버렸어. 썩은 물을 뺏으니 언젠가는 다시 맑은 물이 차오르지 않겠나.”
“썩은 물을 빼고, 길드장님은 어쩔 생각이었습니까. 깊은 산에 들어가 마당 있는 집에서 딸을 돌보며 살려고요?”
“그러면 안 되나? 내 딸은 오늘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햇빛을 보았어. 나를 해치려는 석민혁의 계략 덕분에… 그것만은 죽은 그놈에게 고마워. 고맙고말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는 어느새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주름진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제가 따님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
지금까지는 내 혼자만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단전과 중단전 사이, 상완혈과 중완혈의 중앙. 각성자의 그곳에...
일종의 단전,
마단전(魔丹田)이 존재한다는 가설.
모든 괴물에게는 마핵이 있다.
모든 괴물은 마핵을 파괴하면 죽는다.
대부분의 괴물은 죽는 순간 마핵이 소실된다.
극히 일부, 대형 괴물은 죽은 뒤에 마핵이 남기도 한다.
만약 각성자의 마핵이나 다름없는, 마단전을 파괴한다면?
굳이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열세 번째 시도에서, 나는 마단전만을 파괴하는 데에 성공했다.
지남천이 데려온 거악 여덟 명은 마단전을 파괴하는 순간 사망했다.
그 뒤 네 명의 거악은 백치가 되었고.
그리고 열세 번째 거악.
그는 마단전이 파괴되었음에도 죽지도 않았고, 백치가 되지도 않았다.
그저 저들이 그리 혐오하던, 마력을 갖지 못한 완전한 일반인이 되었을 뿐.
“저자에게서 이제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래.”
여기까지는 성공인데.
지남천의 딸은 각성자가 아니다.
인간이지만, 괴물이 된 자.
그 경우도 동일할지는 모르는 일.
“형. 그 연구소장. 걔도 거악이지?”
최지수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습한 철침에 묻힌 면독수의 효능을 확인하기 위해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만 해도 여덟 명이 넘는 각성자에게 그 약을 투약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 그전에도 비슷한 경우들이…”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최지수가 말을 멈추었다.
“걔. 길드 감옥에 갇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