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달 그림자 (3)
“정말로 합니다?”
“그래. 부탁하네.”
지남천이 굳은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의 끝이 가늘게 떨렸다.
최지수 역시 긴장된 표정이었다.
잘 되면 유성길드 길드장의 딸을 구해준, 세상에 다시없는 은인.
일이 꼬이면 천하의 원수.
지남천은 절대로 원망하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고 약조했으나 길드장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은 같지 않을 터.
하지만…….
‘할 수 있어.’
몇 시간 전,
불량 각성촉진제를 주사해 여준후를 괴물화시킨 뒤, 놈의 마단전을 깨뜨려 일반인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했다.
놈이 그리도 즐겼다는 실험.
드디어 스스로 실험체가 되는 경험을 하다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단전의 존재와 위치를 확인하고, 일반인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도 확인한 이상 일은 복잡하지 않다. 단전을 파괴하는 일은 단지 내력이 상당히 소모될 뿐 과정 자체는 간단하니까.
검황일 적 내가 단전을 깨뜨려 평범한 일반인으로 되돌려 놓은 소악인이 세 자리 숫자는 넘을 터.
“다들 나가 있으시죠.”
내 축객령에 최지수가 염려의 시선을 보내고는 방을 나섰다. 뒤이어 지남천이 입술을 뻐금거리다가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걸어나갔다.
고요한 방 안.
지현아는 쇠사슬로 꽁꽁 묶인 채 침대 위에 누워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시커멓게 독이 오른 피부는 인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리치의 가죽과 가까워 보였다. 딱딱하고 갈라진 가죽의 이곳저곳에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딸이라…….’
반복되는 생에서도 자식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자식으로 살아보기만 했을 뿐.
검황의 부모는 아주 어릴 적에 죽었다. 김은명의 부모도, 박승주의 부모도 어린 나와 함께 세상을 떴다. 이번 생에도 나는 어릴 적 부모를 잃었다.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부모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잘 타이르고 교육하겠습니다.
-쯧, 쯧! 애새끼가 벌써 도둑질이나 해대고. 앞날이 훤하다, 훤해! 뻔하지, 도둑질하는 애새끼가 크면 도둑놈이 되겠지!
-아닙니다. 우리 지혁이, 그런 애 아닙니다.
-이 아줌마가!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려?
한지혁의 엄마가 허리를 깊숙이 접었다. 앞으로 모아 쥔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한지혁은, 나는, 얼어붙은 채 그 옆에 서 있었다.
-지혁아. 왜 그랬어.
-잘못했어요, 엄마. 정말 잘못했어요. 정말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잘못…….
엄마가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들어올린 엄마의 팔이 한지혁의 등에 닿았다.
엄마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맞닿은 가슴이 가늘게 떨렸다.
-그래. 지혁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
-그런데 엄마가 더 잘못했네. 지혁이가 젤리 먹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지혁이가 저걸 먹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모르고 있었네. 그렇지? 엄마가 더 잘못했어. 잘못했어…….
그는 어린 나를 끌어안고 끝내 길거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그가 왜 우는지 몰랐다. 모른 채 같이 울었다.
‘하지만 한지혁의 엄마는 결국…….’
나는 고개를 휘저어 떠오르는 생각의 꼬리를 끊어냈다.
숨을 깊숙이 들이쉬며, 엉킨 쇠사슬 사이 지현아의 명치에 손바닥을 붙였다.
맞붙은 손바닥을 통해 한 줄기 진기가 그의 몸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엉망이군.’
축축하고 미끄덩한 마기. 탐욕스러운 마기가 진기에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기운을 한층 끌어올리자 맑은 기운이 조금씩 마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혈도를 꽉 막은 마기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엉킨 기운을 풀어내는 과정의 반복.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턱을 타고 손등 위로 떨어졌다.
등줄기가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지남천 이 새끼… 대체 애한테 마핵을 얼마나 처먹인 거냐.’
여준후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밀도 높은 마기.
가는 곳마다 마기가 엉겨 붙었다. 가진 내력을 모두 쏟아붓는다면 밀어낼 수 있겠지만.
‘그러다가는 애가 죽는다고.’
들러붙은 마기가 엉키고 설켜 진기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실로 진퇴양난의 상황.
조금만 더 나아가면 마단전이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다시 한 줄기의 진기를 더 불어넣자 삼재혼원공의 기운이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기의 저항도 그만큼 거세졌다.
‘그렇다면…….’
진기(眞氣)와 마찬가지로 마기(魔氣) 역시 기운의 일종.
막으려 애를 쓰면 혈이 터지고, 억지로 열어젖히면 맥이 찢어지는 법.
임맥을 따라 흘러들어간 기운이 마단전의 앞에 멈춰선 사이 새로이 불어넣은 기운이 독맥을 따라 천천히 흘러 명문에 닿았다.
명문혈(命門穴).
각성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하단전의 두 개의 입구 중 하나.
내 진기가 명문을 꽉 막은 마기를 풀어내고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내공을 쌓지 못한다. 자연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다. 무공이 실전된 세계.
하지만…….
‘역시 있군.’
사람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천진기(先天眞氣).
선천진기를 모두 소모하면 죽는다.
무인이든, 무인이 아니든.
그러므로…….
‘아주 조금, 아주 조금만…….’
삼재혼원공의 기운에 자극받은 지현아의 선천진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실낱처럼 가늘고 여린 기운.
하지만 그만큼 맑고 깨끗한 기운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독맥을 한 바퀴 돌고 임맥을 타고 내려갔다.
삼재혼원공의 기운이 그의 선천진기를 호위하듯 에워쌌다.
엉켜 붙던 마기가 조각조각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삼재혼원공이 약해진 마기를 흩어 소멸시켰다.
그리고 두 줄기 기운이 마단전에 닿았다.
“…으윽…….”
지현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괴물의 괴성이 아니라, 인간의 신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내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투둑, 투둑, 그의 입술에 떨어졌다.
“으윽! 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단전이 파괴되는 고통. 그녀의 선천진기는 스스로 그 고통을 견디며 마단전의 마기를 흩어내고 있었다.
비 오듯 땀이 흘렀다.
쇠사슬에 묶인 그의 몸이 격통을 견디지 못하고 발작하듯 진동했다.
덜컹거리는 소리. 비명 소리. 덜컹거리는 소리. 비명 소리.
일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아침 햇볕을 받아 물러나는 새벽의 어둠처럼, 피부를 덮은 검은 빛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리고 곧,
완전히 소멸되었다.
***
“고맙네. 너무 고마워.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로 내 남은 평생 이 은혜를 갚으며 살겠네. 고마워. 고마우이…….”
지남천은 덩치 큰 아이처럼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던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건 뭐. 이해한다.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지.
근데…….
나는 최지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쟤는 왜 저래?”
“화공자가 지남천의 딸의 연인이라더라. 사생아가 아니라 예비 사위였어. 나도 방금 본인에게 듣고 알았다.”
아… 연인.
그래. 세상이 이래도 연애는 해야지.
유성길드의 1인자와 3인자, 아니, 2인자였던 석민혁이 내 검에 모가지를 잘렸으니 이제 1인자와 2인자가 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울고 울먹이고 울고 울먹이는 일을 반복했다.
내가 지남천과 단둘이 마주앉은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후였다.
눈이 퉁퉁 부은 지남천이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지남천이 길드장으로 있는 한, 유성길드는 계룡문의 영원한 형제네. 계룡문의 적은 곧 유성길드의 적이 될 것이야.”
당장이라도 도를 뽑아 손목을 그어 피를 담은 컵을 나눠 마시자며 내밀 기세다.
“당연히 계룡문이 형이겠죠?”
“어험… 그건… 좀…….”
“하하. 농담입니다. 제가 그래도 동방예의지국 출신인데.”
“그래. 고맙네, 검룡.”
“남천이 형이라고 부르면 되겠지?”
지남천의 낯색이 살짝 굳었다가 이내 되돌아왔다.
“그럼… 그럼. 편하게 부르게.”
“하하. 농담입니다, 길드장님.”
“허. 사람 참 짓궂기는.”
얻은 게 많은 방문이었다.
지남천이 먼저 꺼내 놓은 여러 제안들은 계룡성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최지수의 반응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허리에 찬 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사용하던 싸구려 강철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함과 날카로움을 겸비했다. 검자루 역시 내가 오래 사용한 것처럼 손에 꼭 맞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길드장님.”
“그래, 우리 검룡. 또 뭐가 필요하나. 말만 하게나.”
“길드장님께 비무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시멘트 바닥 위로 휘앵앵 바람이 불었다.
강기와 화염탄의 폭발로 박살나버린 유성길드의 비무대 대신, 우리는 근처의 작은 훈련장으로 향했다.
“검룡.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하게. 혹 이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지남천이 진중한 목소리로 권유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내내 반복된, 열세 번째 듣는 권유다.
그 도가 뽑히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한 번 뽑힌 도가 피를 묻히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더욱 드물다.
…라는 불패도의 신화에 대해서는 나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최지수는.
“림이 너 설마… 불패도도 이길 것 같냐? 그 불패도를? 1세대 각성자를? 정말? 진짜?”
“이 형이 미쳤나. 내가 불패도를 어떻게 이겨.”
불패도는 찐이다.
정일형 같은 애송이나, 석민혁 같은 양아치와는 다른, 진짜 각성자.
1차 블랙데이 이후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그가 죽인 괴물의 시체가 계룡산의 봉우리 하나만큼은 쌓일 터.
“그럼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얻을 것도 없는데? 굳이? 네가?”
“그…….”
“그냥이라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이번에 찾은 대환단을 전부 소화시키면 구대문파의 장문인을 아이 다루듯이 했던 검황 시절에 어느 정도 도달할 수 있을 터.
그때는 지남천 정도야 한 손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만…….
영단은 마핵과 다르다.
마핵은 흡수하는 즉시 각성자의 마력이 되어 마단전에 쌓인다. 이후 그 마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신체를 강화하거나 속성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다. 이 과정에도 시간은 필요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김강산과 최지수가 마핵 4알의 마력을 모두 발현하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영단은 꿀꺽 삼킨다고 즉시 내 공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태청단과 자소단을 모두 흡수하는 데 꼬박 6년이 걸렸다.
20알의 대환단을 모두 내 공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와 비슷한 시간이 필요할 터.
그러니까 지금은 못 이긴다고. 대체 왜 기대하는데.
나는 소곤거리는 최지수를 내버려둔 채 눈앞의 지남천을 응시했다.
그 보법.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지남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뿐하고 가벼운 보법은 호수의 수면에 비추인 달빛의 반짝임을 닮아 있었다.
월악의 호수, 우리가 월영호라 부른 그 호수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소화 네 검에는 이 보법이 더 잘 어울릴 거다. 앞으로는 취원보 대신 이 보법을 익혀 봐라.
-아름다운 보법이네요. 그런데… 저는 처음 보는 보법인데요.
-그렇겠지. 방금 대충 만든 거니까.
-사형도 참. 왜 말씀을 꼭 그리 밉게 하셔요.
-왜. 또. 뭐.
-…고맙다고요, 사형.
소화는 그 보법에 월영보(月影步)라는 이름을 붙였다.
‘분명 닮았어.’
지남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검룡. 마지막으로 묻겠네. 정말로 나와의 비무를 원하는가?”
“아, 그렇다니까요. 이 양반, 진짜 끈질기네. 화공자 그놈도 진짜 끈질기던데. 정말 아들 아닙니까?”
스르릉.
지남천이 대도를 뽑아 들었다.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 있다. 어째 방금 전까지 말리던 사람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지. 자네를 보니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 팔 하나쯤은… 괜찮겠지?”
…이게 미쳤나.
저기요. 나 각성자 아니라고요. 내 팔은 자르면 다시 안 난다고오!
“크하하! 걱정 말게, 검룡! 길드에 최고의 회복술사들을 대기시켜 놓았으니까!”
“저기, 잠깐 다시 생각…….”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의 시멘트 바닥이 솟아올라 그물처럼 나를 덮쳤다.
콰앙!
호신강기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잔해 위로,
건물의 벽이 통째로 날아왔다.
‘이게 뭔……!’
검을 휘둘러 벽을 베어내고 바닥을 걷어차려는 순간,
발밑의 땅이 쑥 꺼졌다.
구덩이의 벽에 검을 꽂아 넣고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좋구나!”
‘좋기는 개뿔……!’
펄쩍 뛰어오르는 내 어깨를 향해, 지남천의 도날이 떨어져 내렸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다급하게 어깨를 뒤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도가 내 등을 스쳤다.
이 인간, 진심이다. 진심으로 팔 하나는 박살내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