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22화 (22/122)

22화. 달 그림자 (4)

긴장을 놓지 않고 기운을 한껏 끌어올렸다.

지남천의 발등을 향해 검을 내리꽂자, 그의 발이 땅을 스치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반 보 왼쪽으로.

‘다음 순서는, 왼발을 축으로 회전.’

그의 몸이 왼발을 축으로 회전했다.

카앙!

검과 대도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그다음은, 오른발이 뒤로 빠졌다가, 다시 전진.’

그의 오른발이 살짝 뒤로 빠졌다가 단번에 앞으로 다가왔다.

비스듬히 세운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대도가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꿔 허리를 겨냥했다.

나란히 섰던 양발이 좌우로 벌려졌다가 땅을 스치며 모아들었다.

모두, 내가 아는 움직임 그대로.

부드럽게 이어져야 하는 동작을 넘쳐나는 힘으로 메꾸고 있기는 하지만…….

상체를 숙여 도를 회피하고 동시에 그의 무릎을 찔러 들어갔다.

뒤이어 도착한 그의 무릎이 검끝을 스쳤다.

좌로 이동한 지남천이 수직으로 도를 휘둘렀다.

그의 말대로, 내 어깨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일격.

카앙!

내려베는 대도와 올려치는 검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한 번, 두 번, 세 번…….

카카카카카카캉!

순식간에 수십 번 올려치는 거센 검격에 대도가 그 기세를 잃었다.

오른발로 바닥을 디디며 검을 올려치는 순간.

카앙!

검날에 부딪힌 도날이 드디어 완전히 힘을 잃고 젖혀졌다.

나와 지남천이 동시에 물러섰다.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잔뜩 흥이 돋은 듯 중얼거린 지남천이 다시 도를 들어올렸다.

이대로 비무를 계속하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팔뚝 하나는 잘려야 끝날 터.

‘당신하고 달리 내 팔뚝은 안 자란다고.’

나는 얼른 검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잘 배웠습니다.”

잠시 서운한 기색을 띄웠던 지남천이 이내 웃음을 띠며 도의 손잡이를 놓았다.

“나도 좋은 경험을 했네. 대단해, 각성한지 고작 오 년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군.”

감탄을 늘어놓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그가 말을 멈추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주먹을 가볍게 움켜쥐며, 그에게 물었다.

“…길드장님. 그 보법,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

황미영.

그는 1차 블랙데이가 시작된 직후 홀연히 대전에 나타났다.

“그래, 이걸 보법이라 부르더군. 이 보법은 미영 누나에게 배웠네. 내 도법도, 내가 자질이 부족해 제대로 익히지 못했지만… 역시 그에게 배웠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180이 훌쩍 넘는 키와 어지간한 남자는 쉽게 들어올리는 힘, 오랜 단련으로 만들어낸 근육과 특출난 전투 실력.

그 모든 것이 황미영을 대전의 강자로 만들었다.

황미영은 막 각성한 사람들을 규합해 길드를 만들고, 검술과 보법을 가르쳤다. 정작 그는 각성자가 아니었으나 갓 각성한 이들 중 그 누구도 검술로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힘으로는 내가 훨씬 앞섰는데도 비무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 그 움직임이 얼마나 기기묘묘하던지. 마치 검룡 자네처럼…….”

1차 블랙데이가 끝난 뒤에도 괴물은 지상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저들끼리 생식하며 그 수를 불려나갔다.

유성길드는 그 괴물과 맞서며 성장했다. 황미영은 각성자를 조직하고, 훈련시키고, 군대와 연합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기업에게 투자를 받아가며 성벽을 쌓아올려 지금의 대전성을 만들었다.

“떠나겠다 하더군. 이곳은 이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황미영은 목적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붙잡았지. 붙잡히지 않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붙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하지만 역시 잡히지 않더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남천이 중얼거렸다.

“월악문이라. 그런 말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네. 검룡 자네가 미영 누님과 같은 월악문의 제자라니… 이것, 참… 그래서 자네가 그 검에 눈길이 갔나보이. 운명이구먼. 운명이야.”

그 월악의 제자는 각성자가 아니었다.

지남천의 설명으로 추측하건데, 내력조차 보잘 것 없었다. 겨우 검기나 형성하는 수준이었을 터.

그런 실력으로, 자신조차 돌보기 힘든 실력으로, 자신의 검까지 내주고서,

기껏 일궈놓은 길드를 두고 떠나다니.

‘월악. 월악이라…….’

첫 번째 삶에서 나는 월악문을 세웠다.

하지만, 오직 그뿐이었다.

나는 월악의 제자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중원에 나들이를 나가 돌아올 때마다 한 움큼씩 가져다주는 영단만으로 문주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여겼다.

내가 곧 월악이고, 내가 강해지면 월악이 강해진다 여겼다.

이번 생에서 월악을 찾았을 때, 월악문의 흔적은 그곳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쓸쓸하고 또 씁쓸했다. 그러나 전혀, 놀랍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나 없는 월악은 당연히 멸문되리라 여겼던 건가.’

그러나…….

월악은 존재했다.

단지 명맥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그 무공까지도.

심지어 힘닿는 곳까지 약자를 지킨다는 소화의 정신까지도.

‘이러다가는 저승에서 월악의 제자라도 만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하겠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지남천을 바라보았다.

비무대를 훑고 내려온 서늘한 바람이 지남천의 억센 수염을 흔들고 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내며 마른 입술을 뗐다.

“인근의 괴물을 섬멸할 방법이 있어요. 어때, 들어 보실래요?”

***

이바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또 뭐야?”

“선배님도 참. 보고도 모릅니까? 유성길드에서 보내준 최신형 쇠뇌잖아요. 선배님도 참. 눈깔은 뒀다가 어디…….”

쉬이이익.

이바름이 건방진 후배 하하민을 향해 휘두른 오른손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선배님. 후려치기는 아무나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요즘 많이 늘었습니다요. 헤헷!”

날래게 허리를 젖힌 하하민이 단발머리를 팔랑이며 해맑게 웃었다. 저 새카맣게 어린 후배 하나 후려치기도 어려운데 그 대표님은 어쩜 그렇게 북 치듯이 후려치는지. 그것도 그 김강산을.

잠시 허무함을 삼킨 이바름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성벽을 둘러보았다.

유성길드에서 출장을 나온 수십 명의 불속성 건축술사와 흙속성 건축술사들이 성벽에 달라붙어 아스팔트를 옮기고 녹이고 철근을 박아 넣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약해진 여장을 완전히 드러내고 새 여장을 올리는 두 명 건축술사의 벗은 등으로 연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성이 지어진 지 30년. 제대로 된 성벽 보수 공사는 처음이었다. 덕분에 성벽은 매일매일 더 단단해지는 중이었다.

서림이 사흘간의 유성길드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지 한 달째.

그 한 달 동안 계룡성은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녹슨 강철검만 빼곡하던 무기고는 반짝반짝한 새 무기로 가득했다. 가볍고 튼튼한데다 디자인까지 깔쌈한 오크 가죽 갑옷이 계룡문의 모두에게 무료로 배급되었다.

“히엑!”

이바름이 헛숨을 삼키며 하하민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만치, 멀리 떨어진 성벽 위를 걷고 있는 남자.

옆에 선 최지수도 2미터가 넘는데 그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데다가 2미터가 넘는 김강산의 도보다 1미터는 더 긴 듯한 거도를 등에 짊어진,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이어진 삐죽빼죽한 수염과 서로 닿을 듯한 짙은 양쪽 눈썹과,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우렁우렁한 목소리.

유성길드의 길드장, 불패도(不敗刀) 지남천.

절대로 대전성을 나오지 않는다고 알려진 그가, 대체 왜 계룡에……?

“아아. 불패도님요? 건사단 독려한다고 조만간 방문하신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네요.”

“대 유성길드 길드장께서, 계룡문 따위를……?”

“계룡문 따위라니. 말 다 하셨습니까, 선배님.”

자신을 노려보는 하하민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이바름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러다 눈빛으로 선배 패겠네.’

이바름은 얼른 자신의 실수를 부정했다.

“말이, 말이 헛나왔네. 유성길드 따위가 대 계룡문에 감히, 라고 하려고 했지.”

“뭐. 맞는 말이긴 하네요. 길드장이면 길드장이지, 지가 뭐라고 우리 대표님께 길 안내를 시켜요.”

이바름은 하하민의 입을 막으려고 팔을 올렸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이제 이 팔랑거리는 후배를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터덜터덜 팔을 내렸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지.’

여리여리한 미남자가 곡사파의 열려 있는 철문을 박살내면서 뛰어들었을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이 이바름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바로 그 자신만 해도,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이게, 계룡을 지키는 검.’

이바름은 주먹을 움켜쥐다가 또 눈을 끔벅이고 말았다.

언제 왔는지, 서림의 어깨에 내려앉은 월매가 불패도의 손을 쪼아대고 있었다. 불패도가 팔을 내밀어 월매를 껴안으려 하자 월매가 재빠르게 날개를 펼쳐 그 팔을 후려쳤다.

무어라고 이야기했는지 서림이 웃고, 뒤이어 불패도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그 불패도가?’

이바름은 또다시 제 눈을 의심하며 죄 없는 눈꺼풀을 거칠게 비볐다.

***

“일미호 꼬치구이랑 맥주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나는 얼굴을 덮고 있던 마스크를 슬며시 내리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며 일미호 뒷다리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갓 구워내 뜨끈한 고기가 이빨 사이에서 으깨지고, 흘러나온 육즙이 혀 위로 스며들었다.

‘캬아. 역시 이 맛이지.’

계룡문 본부 건물의 맞은편 일미호 꼬치구이 전문점, 일호꼬치.

김강산의 손에 이끌려 몇 번 와본 후로 나 역시 이곳의 단골이 되었다.

소고기처럼 부드럽고 돼지고기처럼 고소한 데다 숯불에 익힌 양꼬치처럼 바깥이 크리스피한 게 아주 끝내줬다. 대체 일미호 특유의 그 쿰쿰한 향취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몰라도 전생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맛이었다.

문제는 요즘 내 얼굴이 너무 알려진 터라 가게 주인과 손님들이 너무 얼어붙는다는 건데.

마스크와 모자로 중무장을 하고 구석에 처박혀 먹으면 간단히 해결이다.

점심시간을 갓 넘긴 가게의 군데군데 빈 테이블이 보였다. 나는 계단 아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꿀떡꿀떡 맥주를 삼켰다.

갓 따라낸 맥주의 탄산이 목구멍을 훑으며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 최지수가 포장해온 맥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맛… 대존맛이다.

500cc 잔이 순식간에 비었다.

한참 흥을 돋우고 있던 내 귀에 은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걸려든 것은 막 맥주 한 잔을 더 시키고 부지런히 꼬치구이를 씹던 도중이었다.

“무령문으로 오시면 지금 받으시는 월급의 두 배를 약속드립니다.”

내가 앉은 테이블의 바로 앞 테이블.

마찬가지로 계단 아래 마련된 구석진 자리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꼬치를 먹느라 턱까지 끌어내렸던 마스크를 슬그머니 올리며 그 테이블을 주시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남자는 말쑥하게 정장을 빼입고 머리에 번지르르한 기름을 바른 꼴이 딱 봐도 양아치였다. 그리고.

놈의 맞은편에 앉은 떡 벌어진 뒤태는…….

‘……조은조.’

요즘 공주 무령문과 논산 황산벌파 따위에서 파견된 헤드헌터들이 애들을 들쑤시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걸 이렇게 목격할 줄이야.

조은조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헤드헌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조님의 활약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오크 습격 때 활약하시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겠지.

1인분도 못하는 애를 용을 써서 훈련을 시키고, 거기다 더해 마핵까지 먹였다.

그 덕에 은영단 애들은 이제 오크 한 마리씩은 혼자서도 썰어내는 실력자가 되었다. 평범한 4세대 각성자는 꿈도 못 꿀 수준이다. 그랬더니…….

‘이 새끼들이. 이제 와서 애들을 빼가려고 해?’

내가 당장 놈의 대가리를 박살내지 않은 이유는 조은조의 대답이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조은조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뒤통수만으로는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꼬치를 잘근잘근 씹는 사이 놈의 열띤 설득이 이어졌다.

“계룡문은 추가 수입도 거의 없다지요? 말씀드린 대로 월급은 지금의 두 배. 여기에 출장 수당도 추가되고, 물론 근무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개인 의뢰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마 현재 수입의 다섯 배 정도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는 아니군.’

놈의 이야기는 의외로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일반인들의 의뢰가 대폭 줄어들었다. 빡센 성벽 방어로 계룡성 안에서는 이제 구울 한 마리도 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성벽 바깥의 야인들을 모두 받아들이니 그들로부터 생기던 의뢰 수입도 줄어들었다. 몬스터 웨이브 때 인근의 괴물을 섬멸하고 나면 그 수입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안전해지니 의뢰가 줄고, 의뢰가 줄어드니 수입이 준다. 수입이 줄면 세력이 약화되고, 세력이 약화되면 성이 위험해진다. 위험해지면 의뢰가 많아지고…….

기묘한 순환이다.

그래도 계룡문도가 받는 월급은 농장 노동자의 열 배 이상이지만…….

‘이런 건 상대적인 법이니까.’

다른 조직의 각성자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금액이다. 일취월장한 그들의 실력에 비하면 더욱 그렇고.

조은조의 얼굴을 살피듯 말을 멈췄던 놈이 다시 끈질긴 설득을 시작했다.

“최근 계룡문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던데, 그러다 월급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물론 은조님께서 돈 때문에 움직이시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 일도 목숨 걸고 하는 거 아닙니까. 그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받으셔야…….”

‘이건 또 뭔 소리냐. 재정이 좋지 않아?’

그러고 보니 최지수에게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그딴 일로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었지.

당분간 수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대환단 대여섯 개를 소화하면 길드장들과도 무력으로 비벼볼 수준이 될 터.

앞으로 계룡문이 내가 생각하는 길로 나아가려면 현재 내 힘으로는 부족하다.

보다 압도적인 무력.

…이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과거의 무림이 아니라는 걸 깜박깜박한다.

“저희 무령회로 이적하시면 충분한 보상을 약속드립니다. 어떠십니까, 은조님?”

꼴까닥.

나는 침을 삼키며 기감을 끌어올렸다.

예민해진 감각 속으로 조은조의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두근. 두근. 긴장한 가슴에서 심장이 뛰었다.

‘시부럴… 나 지금 떨고 있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