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첫 번째 의뢰 (1)
“수입은 어쩔 수 없어서 지출을 줄이기로 했다.”
“지출을 줄일 게 뭐가 있다고?”
최지수가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아래 다크서클이 짙었다.
“…림이 너. 하영이한테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걱정 말고 연구하라고 했다면서.”
연구소에 들어가는 돈이 그토록 어마어마할 줄은 미처 몰랐다. 기본 재료는 괴물 사체니까 추가 재료가 들어 봐야 얼마나 더 들까 싶었는데.
무슨무슨 시약에, 무슨무슨 용액에…….
“모두 지금은 만들어지지 않는 옛 시대의 유물들이다. 부르는 게 값이야. 힐링포션이나 마력증폭제에는 다행히 그런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것’을 연구하기에는 무리라는 소리다.
“안 돼. 그건 포기하면 안 된다고.”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재정 상황으로는 어렵다.”
원래 계획으로는 유성길드를 남김없이 털어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유성길드를 월악의 제자가 창립했다는데, 내가 그걸 털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지남천이 감사의 표시라며 보내준 검과 갑옷까지는 낼름 받았지만 월악문의 개파시조의 양심이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지남천은 자신의 성의를 받아달라고 했으나 그의 생각과 유성길드 모두의 생각은 같지 않을 터.
유성길드의 길드 본부가 무너지는 광경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지남천도 석민혁 일파를 처리하고 길드 뒷수습을 하느라 꽤나 애를 먹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유성길드에서 뜯어낼 수도 없고…….
돈.
돈이 필요하다.
-아니오. 전혀 생각 없습니다.
비록 조은조의 대답은 감동적이도록 단호했지만…….
‘계룡문 백삼십 명 애들이 모두 그러기는 어렵겠지.’
내가 우리 은조를 의심한 스스로를 조용히 반성하는 사이, 그 때려죽일 새끼가 다시 예쁘… 고 착… 한 우리 은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시죠, 은조님. 무령회는 개인적인 의뢰가 아주 활발합니다. 개인 의뢰만으로도 월급 이상의 수입을…….
-됐습니다.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안 옮길 거예요.
-그러면 무엇을…? 그렇다면 수비대장 자리를 약속드리면…….
-저기요.
조은조가 싸가지 없는 말투로 놈의 말을 끊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참 잘 배웠다.
-돈 많이 벌면 뭐 해요. 뒈지면 끝장인데. 거기 사망률 10퍼잖아요. 계룡문 사망률은 0퍼라고요. 0퍼.
둘의 대화는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나는 세 잔의 맥주를 더 비운 뒤에 천천히 가게를 나섰다.
조은조는 단호하게 NO를 말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월급이라도 밀렸다가는…….
“형. 우리 외부에서 의뢰 들어온 거 있다고 했지?”
최지수가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며 대꾸했다.
“림이 네가 화공자와의 비무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유성길드 석민혁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퍼진 모양이더라.”
의뢰 목록은 생각보다 길었다.
“애들 밖으로 내돌리지 말고 훈련이나 잘하면서 계룡성이나 지키라고 하더니?”
“뭐. 애들끼리 보내기는 위험하니까. 하지만 내가 가면 아무 문제없잖아?”
“림이 네 수련은 어쩌려고.”
“그러게. 세상이 나를 참 가만히 두지를 않네.”
나는 꼼꼼히 목록을 살폈다.
수련도 해야 하고, 계룡성도 지켜야 한다. 매번 밖으로 돌며 몸으로 때울 수는 없는 노릇.
장기적인 돈줄을 잡아야 한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이고 빵빵한 돈줄.
근데 그런 게 뚝 떨어질 리가…….
……있네?
“형. 이 사람. 아직 계룡에 있어?”
최지수의 눈동자가 내 검지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의뢰인: 보령염전 염전주 연합 회장 곽선우
의뢰 내용: 염전 인근의 나가와 세이렌 완전 소탕
의뢰 보상: 삼만 칠천 돈]
***
“야! 안 뛰어? 발이 땅에 닿잖아!”
“헤엑… 헥… 대표님. 어떻게 발을 땅에 안 디디고… 어떻게… 헥… 뜁니까.”
“어떻게 뛰긴? 이렇게 뛰지!”
경공을 시전해 앞으로 내달리자 은영단 애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따라왔다.
“저기, 검룡님. 조금, 조금만 천천히…….”
“왜요? 급하다면서요?”
“토…. 토할 것… 같… 우웩!”
내 옆구리에 꿰어져 있던 곽선우가 노란 토사물을 토했다. 나는 재빨리 녀석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결국 5분간 휴식.
기다렸다는 듯 은영단 애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요즘 훈련하는 꼴을 들여다보지 않았더니 상태가 영…….
“형. 그거 아니야.”
“그래, 그거 아니다. 림아.”
“내가 뭘?”
김강산과 최지수를 필두로 은영단 애들이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새벽에 동이 트자마자 은영단 애들을 채근해 내달린 지 네 시간.
중간에 5급 위험구역을 피해 빙 돌아오느라 생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4차선 국도의 우그러진 중앙분리대 위로 따가운 가을 오후의 햇볕이 떨어졌다.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면 그 즉시 지불하겠습니다.
곽선우는 머리를 짧게 깎고 얼굴이 햇볕에 짙게 그을린 덩치 큰 사내였다.
충청 전역과 경기도의 남부에 소금을 공급하는 서해 최대의 염전인 보령염전.
보령염전의 염전주 연합, 이른바 보염련은 근처의 소금 상권을 주름잡는 거상이었다. 거상이다 보니 상행 호위와 염전 방어를 위한 각성자를 직접 고용했다.
그 숫자가 계룡문의 절반에 달한다고 들었다. 적어도 나가 무리나 세이렌 따위를 처리하지 못해 끙끙거릴 세력은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문제가 있다는 건데…….
-저기, 회장님. 저는 말이죠. 보염련이 남 같지가 않아요. 우리 이번 한 번으로 인연을 끝내지 말고 길게, 길게 가보자고요.
-길게… 말씀입니까?
그렇게 시작된 협상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끝났다. 아주 만족스럽게.
말하자면 계룡문의 첫 번째 원정 의뢰다. 드디어 우리 계룡문이 중소문파를 벗어났다는 의미.
그 즉시 은영단을 소집했다. 곽선우는 고작 여섯 명으로 괜찮겠냐며 걱정스러워 했지만.
얘들이 알고 보면 마핵 한 알씩 처먹은 일당백의 용사…….
들이 아스팔트 위에 대자로 뻗어 헉헉거렸다.
“역시 훈련이 부족…….”
“아니라고요! 대표님!”
하하민이 곧 울 듯한 얼굴로 와락 소리를 치다가 대가리를 후려 맞고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언덕배기 아래로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에 잠긴 바다가 붉은 빛으로 일렁였다.
이번 생에 처음 보는 바다.
문득, 언젠가의 기억이 둥실 떠올랐다.
-야. 한지혁. 우리 수능 끝나면 바다 보러 가자.
-미쳤냐? 남지호 너랑 바다 보러 가서 어쩌라고?
-씹새끼야. 그냥 닥치고 좀 가자고. 고3 끝난 기념으로다가. 콜?
-콜은 개뿔. 어차피 수시로 가는 놈이 수능은 무슨.
그해 수능은 치러지지 않았다.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수능은 치러지지 않았다.
만약 수능이 치러졌더라도 나는 이미 죽어서 못 갔겠지만.
‘남지호는… 역시 죽었겠지.’
가끔 전생의 인연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모두 나보다 먼저 떠난 이들.
그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검에 찔린 듯 쓰라…….
“시발. 저게 바다야? 와. 림이 형. 미쳤다. 존나 끝이 없는데? 시발. 와. 지수 형. 바닷물은 원래 빨간색이야?”
“…노을이다. 산아. 바닷물도 물이야. 붉은빛일 리가 없잖니.”
“김강산 이 새끼 완전 산골 촌놈이네. 바다 처음 본 티를 그렇게 내야겠냐.”
“그러는 은조 누나는? 바다 본 적 있어? 누나도 흙 파먹고 산 계룡 토박이 아니냐?”
“누가 아니래?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으라는 거지.”
“왜? 내가 쪽팔려? 쪽팔리냐?”
“…강산 선배님. 드디어 깨달으셨… 하하! 그럴 줄 알았지요!”
김강산이 일으킨 불길이 하하민의 얼음벽에 가로막혀 소멸했다.
하여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놈들이다.
최지수에게 타박을 받은 김강산이 투덜거리며 쥐었던 도를 집어넣었다.
“내려가자.”
바닥을 박차는 내 등 뒤로 은영단의 발소리가 바싹 따라붙었다.
‘그래. 이번에는 절대로……!’
***
보령 염전주 연합의 마을은 봉대산 자락에 있었다. 옛 대천역 인근에 건설된 보령성벽과는 북쪽으로 6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거리였다.
10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방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이번에 연이어 공격받기 전에는 저희끼리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고용하고 있던 용병들이 계약을 대거 해지하는 바람에…….
어떤 상황인지 알만했다.
괴물들이 들끓기 시작하자 용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계약을 해지했다.
평판으로 먹고사는 용병이 계약을 중간에 해지할 정도면 꽤나 매력적인 제안이 들어왔거나 거부할 수 없는 협박을 받았을 터.
그리고 그 수작을 부린 이들은…….
“보령회겠지?”
“그래. 보령회다. 인근 성에도 보염련의 의뢰를 받지 말아 달라고 했다더구나. 유성길드도 관여하기 껄끄러워하는 눈치고.”
내내 눈독을 들이고 있던 보령염전을 꿀꺽할 수 있는 기회.
보령회는 아마 그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도 안 미안하고, 이건 내 차지거든.’
37000돈짜리 의뢰?
그 정도로 끝낼 수는 없지.
보염련이 매년 생산량의 30%를 계룡문에 제공하는 대신 계룡문은 소금 상단과 마을을 호위하는 계약을 제시해놓은 상황이다.
곽선우는 염전을 습격하는 괴물들을 소탕하는 게 먼저라며 계약서에 도장 찍기를 미뤘다. 계룡문의 무력이 정말로 소문대로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눈치였다.
무력행사야말로 우리 계룡문의 전문 영역.
계약은 성사된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이걸 강원까지 갖다 팔 유통망만 갖추면…….
소금이 흔한 서해와 달리 강원 산간에는 소금이 곧 금값이다. 산길이 험하고 괴물과 도적이 들끓어 그곳까지 들어가는 소금 상단이 없기 때문이다.
즉,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일만 남았다 이거지.
자고로 나라의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소금 전매제가 등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전생에 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골랐던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히힛. 히히힛!
“저깁니다.”
곽선우가 팔을 들어 해안도로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염전은 마을에서 가까웠다.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나는 소금 결정이 네모지게 구획된 공간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도로를 넘어가면 바로 괴물들이 몰려와서 일을 못한지 보름째입니다.”
“예에. 그랬겠네요. 이렇게 가까이 자리를 잡았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드글거리는 괴물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수 형. 느껴지지?”
“그래.”
우리는 고객님의 소중한 염전을 망가뜨리지 않도록 도로를 크게 우회해 해변에 멈춰 섰다.
바다와 맞닿은 언덕 위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라나 있었다. 산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넙대대하고 둥근 바위 열서너 개가 반쯤 바닷물에 잠겨 넘실거렸다.
괴물의 기운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고객님은 여기서 편안히 구경하고 계시고요.”
곽선우가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다 나가의 서식지를 50여 미터 남긴 지점에서 멈췄다.
탐색술을 익힌 최지수를 제외한 애들은 아직 괴물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즉, 나가놈들도 아직 우리의 기척을 파악하지 못할 거리.
“시작해.”
김강산이 싱글거리며 등 뒤에 메고 있던 도를 뽑았다.
“쪼오아! 얼른 끝내고 집 갑시다, 형님들.”
조은조가 어깨에 걸머졌던 철퇴를 움켜쥐고,
하하민이 쌍검을 양손에 쥐었다.
최지수와 박명칠, 이바름 세 술사의 주위로 마력이 일렁였다.
콰아아!!!!
굉음과 함께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뚫고 디귿자 모양의 거대한 석벽이 솟아올랐다.
바닷물 위로 뾰족하게 올라와 있던 바위가 날아온 화염탄에 박살나 부서지고,
동시에, 바닷물이 수천 개의 얼음 화살이 되어 공중으로 솟구쳤다.
바닷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나가, 인간의 몸에 물고기의 얼굴을 붙인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의 위로 얼음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최지수의 석벽으로 놈들의 퇴로는 이미 막힌 상황.
몇몇 놈들이 화염탄과 얼음 화살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놈들은 그보다 몇 십 배 많다.
얼음창을 거머쥔 백 마리 넘는 나가 떼가 괴성을 내지르며 해변에 선 우리를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차며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역시 싸움은,
“선빵필승이다,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