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잊은 것, 잃은 것 (1)
카강!
검기가 날개의 중앙에 직격했다. 강철도 잘라내는 검기를 맞고서도 놈의 날개는 멀쩡했다.
삼반공의 적(積)으로 형성한 검강도 큰 데미지는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상처는 남았지.’
재앙이니 신이니 해대도 덩치 큰 괴물이다. 마력을 응집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면 죽일 수 있다.
남쪽의 주작은 지난 블랙데이에 무등길드의 길드장의 손에 죽었다.
놈들도 결국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의미.
신도 아니고, 불사신은 더욱 아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죽일 수 있다. 죽여야만 한다.
정점에 다다른 내 몸이 이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하민이 만들어낸 얼음판을 걷어차며, 다시 몸을 솟구쳤다. 놈이 긴 꼬리를 거칠게 휘둘렀다. 내 몸통보다 더 두꺼운 저 꼬리에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터.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시전에 공중을 디디며 허리를 비틀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겨드랑이 아래를 스친 꼬리가 다시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공기를 가르는 요란한 파공성.
다시 얼음판을 걷어차며 몸을 솟구쳤다. 간발의 차이로 꼬리가 발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놈이 뒷발을 뻗었다.
하나하나가 작은 단검만한 크기의 발톱들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아마 그 발로 내 대가리를 움켜잡아 터뜨리고 싶겠지만….
‘아직 죽기에는 많이 이른 걸.’
스팟!
검기를 응축한 검이 놈의 단단한 가죽을 뚫고 발가락 사이에 꽂혔다.
발톱에 가시가 박힌 정도는 될까. 분명 별 타격은 아니다.
하지만.
‘통증은 확실하지.’
놈이 여섯 날개와 네 발을 거칠게 휘저었다.
기맥을 타고 오른 기운이 검날에 들어찼다. 용조수로 놈의 발목을 잡아채며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스파앗!
투명한 액체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놈의 발가락 두 개가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다시 얼음판을 걷어차며 몸을 솟구쳤다.
사자 대가리를 닮은 놈의 얼굴을 향해 김강산이 연신 화염구와 화염탄을 쏘아대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린 원정대 몇몇이 김강산의 옆에 합류했다.
원정대에 합류한 보염련 회장 곽선우도 그들 중 하나였다.
“시발! 계속 쏘라고! 우리 형 죽으면 니들 다 뒈진다!”
김강산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지 않아도 곽선우는 안간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곽선우는 백호가 나타나자마자 도망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멀리 가지는 못했다. 이곳에서 백호가 떠난다면 그 재앙은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검룡이 백호를 향해 돌격했을 때, 곽선우는 숨어 있던 바위 뒤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의 성도 아니다. 얼마든지 도망쳐도 되는 계룡검룡과 은영단이 재앙과 맞서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더 던지라고! 씹새끼들아! 저 도마뱀 새끼가 우리 형 신경 못 쓰게 하라고!”
비명에 가까운 김강산의 외침을 들으며 곽선우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들어 올린 바윗덩어리가 백호의 이마에 직격했다.
요란한 타격음과 달리 백호는 멀쩡했다. 멀리에서 쏟아 붓는 속성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는 게 확실했다.
20미터는 훨씬 넘을 듯한 거대괴수는 재앙 그 자체였다.
그 재앙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면 시체가 되어 눕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금 그의 발 옆에 나뒹구는 이들처럼.
곽선우는 자신의 생존이 누구의 덕분인지 명확히 이해했다. 그것이 실낱같은 희망이라 할지라도 지금 기댈 곳은 오직 그뿐이었다.
‘계룡검룡! 제발…!’
곽선우는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모른 채 간절히 기도했다.
곽선우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간절한 바람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검룡.
공간을 잘라내는 듯한 흰 빛무리가 번쩍일 때마다 백호가 괴성을 지르며 날개와 꼬리를 꿈틀거렸다.
백호의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검룡이, 거대괴수의 등줄기를 향해 다시 한 번 검을 찔러 넣었다.
***
놈이 공중에서 360도 회전했다. 나를 떼어내기 위한 수작.
나는 검 자루를 쥔 오른손을 움켜잡고 왼손으로 용조수를 운용해 놈의 비늘 하나를 잡아 뜯었다.
검이 강철 같은 가죽을 파고들 때마다 놈이 괴성을 질러댔다. 이쑤시개로 발등을 찔리는 기분이겠지만.
놈의 피해의 정도보다, 놈의 신경을 긁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행히 놈은 자신의 등을 찌르는 이쑤시개를 잡는 데에 신경을 쏟느라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거둔 상태였다.
하지만, 내 공격이 별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한 순간 귀찮은 이쑤시개 따위는 무시하고 다른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
허공을 휘저은 놈의 꼬리가 내 등을 후려치기 직전,
검을 뽑아내고 놈의 등줄기를 걷어찼다. 검을 둘러싼 검기가 앞을 가로막는 날개를 두텁게 베어냈다. 상체를 낮춘 내 몸이 놈의 등줄기에 스치며 정면으로 쇄도했다.
나를 떼어내려는 듯 놈이 거칠게 몸을 뒤챘다.
천근추를 운용해 균형을 잡으며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비늘로 뒤덮였던 놈의 등줄기 위로 뾰족한 창들이 솟아올랐다.
극성까지 끌어올린 호신강기에 부딪혀 박살난 얼음 조각들이 단번에 기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창이 호신강기를 꿰뚫고 피부에 상처를 입혔다. 팔꿈치의 상처를 통해 극독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거, 좀 위험한데.’
꼬리가 스친 왼쪽 발목은 아마 부러진 듯했다. 급한 대로 혈도를 눌러 독의 침투를 막았으나 그저 임시방편일 뿐.
진기를 일으켜 독을 태우며 기운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삼반공의 1절, 적(積)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왼손에 하얗게 맺혔다.
신전의 기둥처럼 두꺼운 놈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눈앞에 다가왔다.
콰직!
검끝을 타고 솟아오른 검기가 놈의 두꺼운 가죽을 파고들었다. 일 미터 가량의 검날이 놈의 가죽에 송곳처럼 박혔다.
하지만 그것까지가 한계.
모가지를 통째로 잘라내기에는 내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오른손으로 검 자루를 움켜쥐며 놈의 목덜미를 향해 왼손을 거세게 내질렀다.
솟아오른 얼음창들이 손바닥에 부딪혀 차례차례 박살나고,
권기로 희게 빛나는 손이 놈의 목덜미에 닿았다.
‘강기가 통하지 않는다면….’
왼손에 맺혀 있던 진기가 놈의 가죽 사이로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나는 솟아나는 얼음창을 연환퇴(連環腿)로 걷어차고 호신강기로 버텨내며 놈의 목덜미에 손바닥을 붙인 채 연신 진기를 흘려보냈다.
거대괴수답게 마기가 짙다.
슬라임을 잡을 때처럼 마기의 농도로 마핵의 위치를 찾을 수는 없다. 찾는다 해도 심장 근처에 있을 마핵까지 검이 꽂힐 리도 없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모가지를 잘라내는 것. 남녘의 지배자 주작도 목이 잘려 죽었다고 했으니.
어깨를 뒤채 날아오는 꼬리를 가까스로 회피하며 나는 진기의 운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흘려보낸 기운들이 의지의 부름에 따라 한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진기와 놈의 마기가 놈의 목줄기 곳곳에서 맞부딪쳤다.
단전의 모든 내공을 한 점을 향해 쏟아붓자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간 진기가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기운의 밀도를 한계까지 높인 그곳에서,
진기와 진기가 부딪혔다.
잘려나간 진기의 조각이 단단해진 마기와 부딪혔다.
응축된 마기가 다시 진기와 부딪혔다.
삼반공의 2절, 파(破).
결(結)을 풀어내고, 합(合)을 깨뜨려,
유형(有形)을 파괴하는 무형(無形)의 기운.
수백 번의 충돌이 단숨에 수천 번이 되고, 수천 번의 충돌이 순식간이 수만 번으로 증폭되었다.
놈의 두껍고 단단한 가죽 안 깊은 곳에서 파지직, 스파크가 튀었다.
파직.
파지직.
주먹만한 놈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부풀어 올랐다. 검날처럼 뾰족한 이빨이 돋아난 아가리를 벌리며 놈이 괴성을 질렀다.
콰직!
폭발음은 크지 않았다. 놈의 몸 안쪽에서 일어난 폭발이었으므로.
고요한 폭발과 함께,
거대한 기둥 같은 목뼈가 부서졌다.
동강난 놈의 모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 줄기 남은 내력으로 놈의 등에 가까스로 매달린 채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여 미터 상공에서 떨어진 놈의 대가리는 피떡이 되어 아작나 있다. 박살난 대가리에서 흩뿌려진 희뿌연 피 때문에 대가리 주변이 온통 흐릿했다.
…진짜, 진짜로,
‘내가 재앙을 잡은 거?’
무려, 재앙이다.
서쪽의 지배자에다 서해의 파괴자. 엄청난 크기의 마핵이 나오겠지. 계룡문 애들에게 나눠 먹이고도 각성촉진제 연구에 쓸 만큼 커다란 마핵이 나올…
‘근데 왜, 내가 아직도 떠 있지?’
허벅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놈의 목은 잘렸다.
허여멀건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가지의 단면이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거대한 몸체는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공중에 떠 있다.
파스슷.
호랑이의 발과 용의 날개를 가진 놈의 몸통 위로 불꽃같은 스파크가 튀었다.
‘또 무슨 괴상망측한…!’
[제법이구나.]
그 순간.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귀가 아닌,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
두억시니도 이렇게 정신계 공격을 시전했다.
물론 걔는 한국어로 지껄이지는 않았으나….
괴물의 생태에 관해 고민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다.
‘대가리를 박살내도 살아 있으면,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고.’
삼반공의 2절, 파(破)도 통하지 않았다.
검황 시절 깨달음의 집대성이자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상승 무공. 그 필사의 공격조차 무위로 돌아간 것.
[인간의 아이야.]
놈이 말을 걸었다.
어째 바로 공격해 올 기세는 아니었다. 설마 대화를 하고 싶은 걸까.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 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줄려나.
“야, 아니, 백호새ㄲ… 아니, 백호님. 이 정도면 충분히 보여주셨으니 쉬던 곳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직 블랙데이도 아닌데 이거 세계관 최강자가 좀 비겁하신 거 아닙니까?”
목이 잘려나간 괴수가 웃었다.
눈도 없고 입도 없고 얼굴이 통째로 박살났으나, 머릿속의 음성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래. 이거 아니구나. 아닐 줄 알았다고.
[아직 한참 멀었구나.]
“뭔 개소리냐… 입니까.”
깊고 짙은 시선이 느껴졌다.
[인간의 아이야.]
목이 잘려나간 괴수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잘려나간 모가지에 달린 두 개의 눈동자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너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존재감.
‘이래서 신격을 갖춘 존재라고 떠들어 대는 건가.’
나로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지금은, 절대로.
내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부은 공격 덕에 단전은 거의 바닥이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선천진기(先天眞氣)뿐.
하지만.
내 모든 선천진기를 다 끌어다 쓴다 해도 과연 놈을 죽일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전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모가지가 박살났는데도 살아 있는데. 대체 어떻게 확신하냐고.
오히려….
‘확실히 죽는 쪽은, 내가 되겠지.’
만약 내가 또 죽는다면.
여섯 번째 생을 시작하게 될까. 그 약해빠진 어린 시절을 살아남을 수 있을까. 또다시 허무하게 죽게 될까. 혹여 이번에는 각성하지는 않을까. 각성해서 계룡문에 입문하면 어떨까. 계룡문 애들은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을까.
‘아니. 그럴 리가.’
김강산은 되도 않는 실력으로 내 원수를 갚겠다고 저 괭이도마뱀에게 달려들다가 대가리가 박살나겠지.
하하민은 검도 들어보지 못하고 아작날 거다.
최지수는 또 어떻고. 감옥에 갇힌 이바름은, 조은조는, 박명칠은, 정하영은, 이일삼과 이이사는….
하하.
하하하.
…아무래도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겠는 걸.
고민은 단번에 끝났다.
이곳에서 뒈질 수는 없다. 저 괴물 새끼를 죽일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일격을 날리고 바로 튀는 거다. 우리 애들만 잽싸게 빼내서, 당장 계룡으로…
놈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잘라냈다.
[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잊었구나.]
마치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의미심장한 문장.
그것을 마지막으로,
시선이 사라졌다.
내내 머릿속을 울리던 가벼운 웃음도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는,
[멈추어라.]
정신계 공격.
그날은 머리털이 쭈뼛 서도록 놀랐으나 이제 두 번째 경험. 파훼법은 이미 알고 있다.
백회와 후정, 아문과 기해가 차례로 닫히고 기맥을 휘돌던 진기가 멈춰 섰다.
바로 그 순간.
공간을 일그러뜨릴 듯한 거센 마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허공을 떠다니던 수증기가 놈의 마력에 반응하여 모여들고 있었다. 모인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고, 단단하고 날카로운 얼음창으로 변하고 있었다.
얼음창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다.
그 창날이 향하는 곳은,
‘…아래쪽?!’
하늘을 뒤덮은 빽빽한 창날 아래, 원정대가 있었다.
그들의 가장 선두에서 김강산과 하하민이 입을 벌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재앙은 정신계 공격을 할 수 있다.
재앙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신계 공격이 단일 개체가 아닌, 다수에게도 통한다는 이야기는…
‘시발. 들은 적 없다고!’
정신계 공격에 당해 석상처럼 굳은 김강산의 얼굴이 내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
‘죽는다.’
김강산은 죽음을 예감했다.
백호의 목이 공중에서 떨어진 순간에 느꼈던 환희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다.
서림에게 들었던 정신계 공격.
파훼법도 물론 들었으나 김강산은 그 파훼법을 익히지 못했다. 김강산만이 아니라, 은영단 모두가 파훼법을 습득할 수 없었다.
진기의 흐름. 그것을 느낄 수 없었으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머릿속을 울리고, 뒤이어 몸이 굳었다.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시야는 환했다.
그러므로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지는 얼음창을 두 눈 뻔히 뜨고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강산은 두려웠으나, 절망하지는 않았다.
‘림이 형. 내 원수는 갚아 줄 거지?’
김강산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괴수의 등에 매달린 서림을 응시했다.
서림은 가진 힘을 모두 쏟아 부은 듯 가까스로 검에 의지하여 백호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그 서림으로부터 눈부신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이 멀 정도의 밝은 빛.
‘저게… 검기야?!’
김강산에게는 익숙한 빛이었다. 서림의 검에서 솟구치는 기운.
서림은 그것을 검기(劍氣)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검기는 김강산으로서도 처음 보는 그것이었다.
채찍처럼 뻗어 나온 검기가 마치 서림이 휘두른 검처럼 허공에 수평의 원을 그렸다.
흉흉한 기세로 내리꽂히던 얼음창이 검막에 부딪혀 조각나 부서졌다.
괴수의 등을 딛고 선 서림이 팔을 들어올렸다.
검 전체가 검기로 희게 빛나고 있었다. 검끝을 따라 10미터도 넘게 뻗어 나온 검기가 빛 그 자체인 듯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김강산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림이 팔을 내렸다.
손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손에 들린 검이 움직이고, 용의 몸체처럼 긴 빛줄기가 그 손을 따라 움직였다.
빛이 지나간 모든 곳이 잘려나갔다.
공기가, 바람이, 수증기가, 서림을 향해 날아들던 얼음화살이, 그를 짓누르려던 얼음벽이, 그리고,
서림의 검이 아래를 향했다.
빛줄기의 끄트머리가 괴물의 목이 사라진 자리, 찢겨나간 단면의 중앙에 닿았다.
수십 개의 화염탄과 수천 개의 얼음화살이 상처도 내지 못했던 단단한 가죽이 마치 물렁한 일반인의 피부처럼 잘려나갔다.
단면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단면에서 괴수의 체액이 비 오듯 떨어졌다.
김강산은 문득, 몸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신이시여….”
누군가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중얼거렸다.
서림의 검은, 서림이 만들어낸 눈부신 빛은 괴수의 몸통을 절반 가까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괴수의 거대한 몸체가 가리고 있던 태양이, 갈라진 틈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다 검기에서 뿜어져 나온 빛줄기까지 더해지니 김강산이 보기에도 마치 서림이 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느릿느릿 움직인 검은 이제 괴수의 몸통을 지나 꼬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으로 마력을 잃은 괴수의 몸통이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등을 밟고 있던 서림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추락했다.
“시바알, 형!!!!”
김강산이 바닥을 박차며 솟구쳤다.
땅에 부딪힌 서림의 대가리가 박살나기 직전, 김강산은 가까스로 서림을 받아 안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발목이 덜렁거렸고, 독이 스며들었는지 오른쪽 팔이 온통 검은 빛이었다.
“림이 형! 형!!!”
김강산이 거칠게 서림의 어깨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