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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27화 (27/122)

27화. 잊은 것, 잃은 것 (2)

“계약을 승낙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계룡문 부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보염련 회장 곽선우는 두 손으로 최지수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혹시, 검룡님 상태는 어떠신지요.”

“아직입니다.”

둘의 목소리가 모두 침통했다.

서림이 백호를 소멸시킨 것이 사흘 전의 일이었다.

보령회의 전령이 5단계 위험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고 연이어 봉화를 올렸을 때, 최지수는 이바름의 재판에 필요한 증인을 찾기 위해 보령성의 일반인 주거지를 탐문하는 중이었다.

조은조와 박명칠을 찾을 생각조차 못하고 최지수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빙결술사들이 바다 위에 만들어낸 얼음 다리 위를 김강산이 날듯이 통과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서림을 그 등에 업은 채로.

하하민이 마력을 쏟아부어 힐을 했으나 역시 별 소용이 없었다. 연이어 도착한 보령회의 상급 회복술사들의 힐도 마찬가지였다.

저녁 무렵 유성길드의 지남천이 도착했다. 5단계 위험, 블랙데이 중 거대괴수에 의해 성이 공격받을 상황에 놓였을 때에만 사용하는 봉화를 보고 달려온 그는 유성길드의 핵심 전력을 모두 이끌고 왔다.

-오는 도중에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봉화를 보기는 했네만… 모두 믿기지 않는 일이군. 블랙데이가 아닌데 재앙이 나타나다니… 그런데 그 재앙을 홀로 소멸시키다니…….

최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블랙데이에만 나타나는 재앙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평소라면 파고들고 또 파고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따위에 전혀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림아… 림아.’

보령성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는 일반인 의사도 서림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남천이 대전에서 불러온 의사도 같은 반응이었다.

-기계가 없어 확실히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사실상 뇌사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통증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동공반사와 안구운동 역시 소실된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자가 호흡을 하는 상황조차 기적입니다.

-그러면 깨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얘가 이렇게 죽을 애가 아닙니다. 아주 독한 애라고요. 이렇게 죽을 애가…….

늙은 의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마 곧 심장이 멈출 겁니다. 길어도 세 시간입니다.

하지만 세 시간이 지나도 서림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가느다란 호흡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사흘째 이어지는 중이었다. 사흘 밤을 뜬눈으로 새운 김강산이 서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내 탓이야. 내가 고집을 부렸어. 내가… 내가 형 말을 들었어야 했어.

의식을 잃은 계룡검룡에게 보령회의 각성자들과 보령성민들이 보내온 편지와 선물과 화환이 숙소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령회와 유성길드, 그리고 계룡문은 섬에 나타난 괴물이 서의 재앙, 백호임을 부정하기로 결정했다. 블랙데이가 아닌 이 시기에도 거대괴수가 활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현재의 아슬아슬한 평화는 바로 끝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림이 거의 재앙에 준하는 괴물을 소멸시켰다는 이야기가 현장에 있던 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막을 수도 없었다.

4차 블랙데이에 소멸한 주작과 마찬가지로, 백호의 사체 역시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마핵이 남았다.

성인 남자의 주먹만큼 커다란 마핵.

그 마핵을 가져온 자는 보령회의 회장 김선규였다.

-검룡께서 보령성을 구하셨습니다. 삼만 보령 성민을 대표하여 그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염전에서 백 년 동안 소금을 캐도 그 마핵의 가격만큼의 돈을 얻지는 못할 터.

최지수는 조심스레 마핵을 갈무리했다. 이 마핵의 사용처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각성촉진제 연구는 계속해야 해.

-지금까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림아. 거기 마핵이 얼마나 들어갈지 생각해 봐라. 흡수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형. 원래 최초는 그런 거야.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기 전에는 아무도 스마트폰을 만들지 못했다고.

-…아이폰? 그… 옛 시대의 유물?

가끔 서림은 까마득한 옛 세대를 겪어 본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그럴 때마다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각성촉진제 개발에 성공해 모든 사람이 각성자가 되는 것.

한 번도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최지수는 서림이 그런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인체실험을 할 수는 없다. 각성촉진제의 부작용은 너무 크다.

-그래서 이번에 데려왔잖아.

-…여 소장? 그래서 안 죽였구나?

원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였을 여 소장을 살려서 계룡문에 데려올 정도로 서림은 진심이었다.

계룡문 대표가 벌려놓은 일이 한둘이 아니다.

‘림아. 얼른 일어나라. 네가 없으면 계룡문은, 나는… 우리는…….’

그 벌려놓은 일 중 하나이자 서림이 보령으로 향한 원인이 지금 막 손에 들어왔다.

보령염전의 소금.

최지수는 자꾸만 옆으로 새는 정신을 붙잡으며, 눈앞의 곽선우를 향해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계약을 번복하여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대신 생산량의 35%로 조건을 변경하는 데 동의하셨지 않습니까. 저희 계룡문으로서는 잘된 일이지요.”

서림이 일어나면 아주 기뻐할 것이다.

“저희야… 저희가 너무 소문에 흔들렸습니다. 떠도는 말이 아니라 제 눈으로 판단했어야 했는데…….”

“이바름 각성자의 재판 결과에 따라 계약을 번복하시지는 않겠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표님이 깨어나셔서 매우 분노하실 겁니다.”

곽선우가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희 보염련은 전적으로 계룡문을 신뢰합니다. 재판 결과와 무관합니다. 그날 보여주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칩니다. 그때는…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진심으로…….”

***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내 손과 발이 묶여 있다. 뒤통수가 아릿하게 아프다.

‘여기는 어디지?’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추위와 배고픔에 산길에서 쓰러졌었다. 어떤 사내가 나를 안아 들었고, 나는 그가 나를 구해주었다고 생각했다.

‘…구해주려는 게 아니었어.’

안간힘을 다해 팔을 뻗자 허벅지에 묶어 놓은 단검에 손끝이 닿는다.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에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너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 소화가, 내 딸이 일주일째 굶고 있다. 어차피 너는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거야. 대신… 편하게 죽여주마.

중얼거리는 사내가 나를 향해 커다란 식칼을 들이대는 순간, 내 단검이 한 발 먼저 사내의 목줄기를 찌른다.

사람을 잡아먹으려 생각할 정도로 사내의 집에는 먹을 것이 없다.

방 안에 아기가 자고 있다. 아주 어린 아기.

이번에 나는,

무덤 앞에 서 있다.

등 뒤에 업은 아기가 칭얼거린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있구나.

길고 흰 수염이 얼굴을 가린 노인이 다가온다.

-쯧쯧. 어린 것들이… 부모님이 돌아가셨느냐?

-이 애 아버지의 무덤이에요.

-…너는?

내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네 이름이 뭐냐?

-아무요.

-그래, 아무야. 네 갈 데가 없으면 내 너를 거둬주마. 따뜻한 밥은 먹을 수 있을 게다. 애들 둘이서 이 겨울을 견딜 수는 없다.

이번에 나는,

창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형. 들어오시지 거기 서서 무얼 하셔요.

방 안에는 다 자란 소화가 있다. 나를 발견한 소화가 입술에 미소를 띠며 손짓을 한다.

-이번 중원행에서 가져다주신 차가 향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 막 차를 내리던 중이었어요.

-뭐, 그냥 오다가 주웠어.

-사형도 참. 일부러 구해 오신 거 알아요. 이런 차를 어떻게 오다가 줍겠어요.

뒤이어 문이 벌컥 열리고 설표가 들어온다.

-또 나만 빼놓고! 둘이서 뭐 합니까?

-…너는 차 맛도 모르잖아.

-어이구? 그러는 아무 사형은 차 맛을 압니까? 술맛이면 모를까.

-또, 또. 싸우지들 마세요.

여리고 향긋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노란빛을 띠는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들이마신다.

그리고… 나는,

검을 들고 홀로 서 있다.

마교의 소환술을 막기 위해 조직된 결사대와 마교의 주술사들과 마교 교주마저 시체가 되어 바닥으로 널브러진 어두운 동굴 안.

마교 본산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마기를 응시하며.

내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길하고 짙은 마기.

‘…소화야.’

힘닿는 대로 모든 이를 지키겠다고 말하던 사매를 떠올리며 단전 깊숙한 곳의 문을 연다.

‘…표야.’

나를 지키다가 죽어간 사제를 떠올리며 모든 선천진기를 끌어낸다.

아직 쓰지 않은 무공이 남아 있다. 미완성의 무공.

소화가 내려준 차를 마시다가 불쑥 찾아온 깨달음.

지금의 몸으로 제대로 시전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시전한다면 저 마기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역시 불분명하다.

‘그러니까, 해봐야 알겠지.’

지금까지의 내 무공과 완전히 다르다. 중원의 모든 무공과도 이질적이다.

진기를 모으지 않고 흩뿌려 자연의 기운을 운용하는,

삼반공의 3절, 합(合).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채운다. 검끝으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검기의 주위로 자연의 진기가 모여든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야. 내가 바로 자연이 되는 것……!’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이 전신에서 용솟음친다.

형언할 수 없는…….

형…….

아까부터 계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형? 림이 형?’

그게 누군데. 뭘 그렇게 애절하게 불러.

***

이바름, 본명 이성민의 재판은 공개 재판으로 진행되었다.

서림이 계획한 그대로였다.

서림은 이 재판으로 계룡문이 덮어쓴 깡패 소굴이라는 오명을 씻으려 했다.

그 목적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계룡문과 검룡은 보령에서 거의 수호신 대접을 받고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단상 위 피고인석을 향해 걸어가는 이바름을 향해 환호 섞인 박수를 보냈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형까지 각오하고 있던 이바름은 재판이 진행될수록 혼란스러워졌다.

얼굴은커녕 존재조차 기억나지 않는, 11년 전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가 증인으로 나와 아버지의 상습적이고 극심한 폭력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당시 이바름의 집안 형편으로는 절대 갈 수 없었던 일반인 전문 병원의 의사가 두 번째 증인이었다. 그는 당시 병원에 방문한 환자 이성민이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골절과 전신 타박상을 입었으며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증언하면서 증거물로 진료 차트를 제출했다.

‘내가 병원에 간 적이 있었나?’

이바름이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을 때, 세 번째 증인이 들어왔다.

“…엄마, 누나……?”

각성한 이후 백방으로 찾았으나 행적을 알 수 없어 죽었다 생각하고 포기했던 이들.

엄마가 울먹이며 남편의 폭력에 대해 진술했다.

뒤이어 누나가 담담한 목소리로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성민이가 찔렀으나 저 역시 항상 그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제 아버지이지만 절대로 제 아버지가 아닙니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을 아버지라고 여기는 이는 없을 테니까요.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은 저입니다. 그 사람의 시체를 태우려고, 제가 불을 질렀습니다.”

이바름은 가까스로 서림과 나눈 대화를 기억했다.

체포된 다음날 대체 어떻게 들어왔는지 감옥으로 찾아온 서림은 죄송하다는 이바름의 뒤통수를 후려패자마자 물었다.

-그 새끼 말이야. 숨 끊어진 거 확인은 했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청문회냐? 헛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바빠 죽겠는데.

-아니, 정말로… 막 두들겨 맞다가, 부엌칼이 손에 집혀서 푹 찔렀는데, 푹 들어가고, 피가,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그래서 튀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보령성 밖이었습니다.

-엄마랑 누나는? 그 뒤 소식은 모르고?

-…네.

서림은 왜 그랬느냐는 말도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있으라는 소리와 함께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이바름이 손등으로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눈물이 흘렀다.

“이상으로 증인신문을 마치겠습니다.”

증인신문을 마무리한 최지수가 단상 위에 마련된 변호인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재판은 서림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형? 사아아형? 절대 안 나와.

-보령성의 법은 엄하다. 특히 친족살해는 처벌이 가중되는 경향이 있어.

-이바름이 계룡문 사람인 거 뻔히 알면서 사형을 부르겠냐? 걔네도 우리랑 척지기 싫을 걸. 우리가 가만히 있었어도 끽해야 오 년 형 정도 불렀을 걸. 물론 그렇게 두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세력 눈치 보면서 진행되지는 않지 않으냐. 그래도 죄목이 살인죄인데.

-형은 참… 대가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니까. 사람 하는 일 중에 세력 안 따지는 것이 있간디? 보염련 문제 안 걸려 있었으면 아예 체포도 안 했을지도 몰라요, 이 사람아.

만약 재앙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서림이 그 재앙을 막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형이 가벼워지지는 않았겠지만.

그 모든 일 덕택에 오히려 서림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에 따라, 피고인 이바름에게 오늘부터 5년간 보령성 출입 금지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바람에 판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계룡문의 활약에 감사하며 변호인 측의 요청을 수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피고인의 무해함을 보증할 세 명의 보증인을 세운다면 보령성 출입을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명의 보증인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보염련 회장 곽선우는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반색하며 수락했다.

두 번째 보증인은, 보령회의 해무단 단장 양승미.

그는 이바름 누나의 오랜 친구였다. 보령성의 ‘보증인 제도’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바로 양승미였다.

그리고 세 번째 보증인은 당연히…….

“세 번째 보증인, 앞으로 나오십시오.”

세 번째 보증인은 당연히 계룡문 대표의 몫이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최지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광장의 끄트머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가 터졌다.

왁자지껄한 소란 사이에 언뜻 잘생겼다는 외침이 들린 것 같았다.

‘이런 맥락 없는 외모 칭찬은 보통 림이에게나 나오는 것인데?’

의자에서 일어서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선 최지수의 시선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석벽을 세운 듯 양쪽으로 갈라진 인파를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드는 이가 보였다.

김강산에게 부축을 받으며, 서림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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