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잊은 것, 잃은 것 (4)
-뀩뀩뀩!!! 뀨욱뀨욱!!!
은빛갈기늑대가 끄는 50대의 수레를 몰고 계룡성에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그 반가움만큼 격렬하게 급강하한 월매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대표님.”
최지수가 없는 사이 계룡성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박명칠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형 돌았냐? 왠 높임말?”
“아무래도 같은 인간 같지가 않아서요. 그걸 잡으시다니, 역시 구미호가 둔갑하신 게 아닐까… 악! 림아, 아파! 아프다고!”
“내가 센 줄 몰랐어? 새삼스럽게 왜 이러셔.”
“알지, 악! 안다고! 그래도 그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했지! 길드장들 누구도 못한 일을 고작 4세대 각성자가 해내다니!”
지난 4차 블랙데이에 무등길드의 전대 길드장은 남(南)의 주작을 소멸시키기 위해 마력증폭제를 무리하게 복용했다. 치열한 결전의 끝에 그는 주작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증폭제의 부작용으로 폭주했고, 끝까지 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이성을 잃고 괴물화한 그에 의한 희생자가 수백에 달했다.
알면서도 쉬쉬하던 증폭제 부작용이 재조명되고, 각 길드에서 복용량을 제한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무등길드의 현 길드장과 길드원들은 괴물화한 전대 길드장의 제압을 위한 원정에 나섰다. 통칭, ‘다도 전투’. 다도면에서 벌어진 그 전투의 희생자들이 흘린 피로 인해 사흘 동안 핏빛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결국 생포를 포기하고 전 길드장을 죽였다. 승리했으나 아무도 웃을 수 없었던 전투.
괴물화하여 사망한 무등길드의 전대 길드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지금껏 재앙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놀람과 감탄이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 순간은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이룩한 업적으로 내가 칭송받는 기분.
계룡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수련실에 틀어박혔다.
5차 블랙데이가 시작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균열은 잠잠했으니 착각은 아니다. 하지만,
때 이른 재앙의 출현.
그리고, 아득하게 느껴지던 ‘그’의 존재감.
단순히 크고 강한 괴수의 마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격을 뛰어넘은 어떤 상위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신이 있다면, 아마 그런 존재겠지.’
소화의 필지로 시작된 그 두꺼운 책자, ‘魔神降臨之述’.
그 제목에는 ‘신’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교의 주교를 생포하는 데 성공한 월악문의 3대 문주는 50년 전 마교가 우연히 발견한 주술을 사용하여 신에 닿을 수 있는 문을 열려고 시도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시도가 멸마단에게 파훼되었다는 사실 또한.
멸마단.
무림맹주 제갈표를 중심으로 구파일방과 일부 사파까지 참여한 대규모 토벌대.
나, 검황은 그들의 청을 듣고 멸마(滅魔)라는 뜻에 손을 보탰다.
그때. 그 내전에 존재했던 짙은 마기의 소용돌이.
‘그게 정말로 균열이었단 말이지.’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내가 균열이 생성되는 것을 막은 듯했다.
그곳에 살아 있는 존재는 나뿐이었으므로.
[신에게 통하는 문이 열리고 다섯 번째로 검은 하늘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
[비로소 죽음이 세상을 뒤덮고 죽음을 딛고 일어난 필멸자는 불멸의 영혼을 얻게 되리라.]
일만 명 인간의 맑은 영혼을 제물로 77일간 제사를 지내고 주문을 외고 어쩌고저쩌고하는 허황된 주술의 마지막에 적혀 있던, 두 개의 문장.
나는 그 문장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으므로.
비로소 죽음이 세상을 뒤덮는다는 개소리가 사실이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한층 빡세진다는 의미다.
현재도 충분히 죽음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데. 여기서 대체 뭐가 더 얼마나 빡세진다는 소리냐고.
하지만 이제는….
-지수 형. 문이 열리고, 이거 말야. 균열을 비유했다고 볼 수 있겠지?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었다, 림아.
-…그랬냐?
-그래. 림이 네가 ‘헛소리 지껄이는 거 보니까 덜 굴렀네.’라면서 월매를 불렀었지. 그때 월매를 좇아온 히포그리프들을 잡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
-됐고, 그러면, 다섯 번째 검은 하늘은?
-5차 블랙데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만.
-이미 죽음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헛소리야.
-이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지금이 최악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필멸자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불멸의 영혼을 얻는지에 대해서는 책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사실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저 구절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동일하므로.
단지,
‘…서둘러야겠어.’
빨리 내상에서 회복하고,
빨리 공력을 높이고,
삼반공(三反攻)의 3절을 떠올려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잊었다고?’
괭이도마뱀 놈이 지껄인 소리.
그놈이 대체 왜 그런 소리를 지껄였는지, 뭘 알고 지껄인 건지, 정말로 신에 가까운 존재인지, 혹은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게 얻어 걸린 건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사실은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삶의 중간중간이 가위로 자른 듯 턱 턱 잘려나가 있다. 잘못 편집한 유튜브 영상처럼.
기억이란 게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순간, 매일을 싸그리 기억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삼반공의 3절…. 그게 진짜 있는 거 같은데.’
삼반공은, 내가 창안한 기공.
1절은 적(積).
강기의 구슬이지만 일반적인 강기에 비해 내력의 소모가 적고 기운을 응집하는데 소모되는 시간이 훨씬 짧다. 말하자면 효율성을 올린 기공이다.
2절은 파(破).
그동안 내력이 부족해 운용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수련과 대환단을 통해 쌓은 공력으로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한 수준에 올랐다.
상대와 접촉해야 하고 운용에 상당한 시간이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으나 이 요건만 만족시킨다면 이 기공을 견딜 수 있는 존재는 없다.
30갑자 내공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가 돌던 마교 교주의 단전을 삶은 계란처럼 으깨버린 것도 바로 파(破)였다.
이름이 삼반공이고, 1절과 2절이 있으니 마땅히 3절이 있을 텐데.
내 기억에는 도무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름을 지을 때는 3절까지 창안하려 했으나 결국 2절에서 그만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날카로운 검기로도 고작 찌르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괭이도마뱀놈의 단단한 몸체를 간단히 둘로 나눴… 다는 위력.
그게 아마 삼반공의 3절이 아닐까.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시간을 두고 엉망이 된 단전을 회복하고, 그 뒤 차분히 수련에 몰두하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이걸 한 번에 먹어치워?’
철함에 남은 대환단은 18개.
나는 한 움큼 영단을 집어 들었다가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뒈지지 않으려고 하는 짓인데 일부러 저승행 급행열차 티켓을 끊을 필요는 없지.
‘일단 열… 아니, 일곱… 아니, 다섯 개만….’
사실 다섯 개도 저승행 급행열차 탑승 티켓이다.
하지만 지난번 지남천의 딸, 괴물화된 그의 마기를 없애며 얻었던 깨달음이 있다. 어렴풋하던 깨달음은 백호와의 전투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거라면 돼. 무조건 되게 만든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손바닥 위 다섯 알 영단에서 지독하리만큼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약도 과하게 쓰면 독이 되는 법.
내 손에 들린 영단 역시 까딱 잘못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을 알더라도 무릅쓸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꿀꺽.
다섯 알의 대환단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크림처럼 녹아내린 기운이 몸속으로 스몄다. 대환단 특유의, 폭풍우 치는 바다처럼 활달한 기운.
활짝 열어젖힌 명문과 기해를 통해 단전에 자리한 삼재혼원공의 내기(內氣)가 임맥과 독맥을 타고 올라, 기맥의 곳곳에서 대환단의 외기(外氣)와 엉기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두 개의 기운.
이 두 기운이 자연스럽게 섞여들 때까지 대주천을 반복하는 것이 영단을 흡수하는 보통의 운기조식이지만….
외기가 지나치게 거세다.
금이 간 단전과 회복하지 못한 내력으로 감싸 안기에는 버거울 만큼.
거센 외기가, 내기를 잡아먹으려는 듯 공격적으로 기맥을 휘돌았다.
이질적인 두 기운이 맞부딪치는 곳마다 격통이 몰아쳤다.
근육이 갈기갈기 찢기고, 뼈가 부서질 듯한 격렬한 통증.
그 극심한 통증 속에서 기맥을 타고 솟구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내 의지를 따르지 않는, 대환단의 외기가 독맥을 타고 올라 백회를 두들겼다.
환골탈태를 이루었다고 주화입마의 위기가 끝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가진 내력보다 지나친 공력을 흡수하려 들다가는 언제든지 주화입마가 올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나는 백회를 단단히 닫고, 뒤이어 후정과 아문과 기해를 차례로 닫았다.
기맥을 휘돌던 내기가 멈춰섰다.
그러나.
외기는 내 의지에 따르지 않았다.
한 덩어리로 뭉친 대환단의 외기가 조금도 기세를 늦추지 않은 채 닫힌 혈을 두들겼다.
쿵. 쿵. 쿵.
머리를 직격하는 통증이 연달아 몰아쳤다.
뇌가 휘발되는 듯한 격통.
이를 악물며 닫았던 기해를 열자,
폭포수처럼 휘몰아치는 외기가 열린 단 하나의 문을 통해 기해를 타고 단전으로 휘몰아쳤다.
열었던 기해를 다시 닫으면,
단전은 그대로 닫힌 공간이 된다.
이질적인 두 개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충돌하는.
그 충돌로 결(結)을 풀어내고, 합(合)을 깨뜨리는.
삼반공의 2절 파(破).
‘나한테 쓰려고 만든 기공은 아니지만.’
잘게 흩어진 내기.
한 덩어리로 뭉친 외기.
이질적인 두 개의 기운이 부딪힐 때마다 단전이 폭발할 듯 흔들리고,
충돌에 견디지 못한 외기가 드디어 잘게 쪼개지기 시작했다.
‘아직 아냐. 조금만 더…!’
갈라지고 쪼개지고 있으나, 아직 충분히 작지 않다.
쿵. 쿵. 쿵. 쿵. 쿵.
나는 이를 악물고 격통을 버티며 ‘그 순간’을 기다렸다.
수십 번의 충돌이 단숨에 수백 번이 되고, 수백 번의 충돌이 순식간에 수천 번으로 증폭되고 있다.
그대로 두면 내 단전이 백호의 모가지처럼 폭발하고 말 터.
‘지금……!’
소리 없이, 단전의 깊은 문이 열렸다.
가느다란 선천진기가 열린 문을 통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지만, 무엇보다 맑고 깨끗한 기운.
가장 맑은 물은 무엇에도 스며들 수 있는 법.
‘…두 번 하다가는 뒈지겠네.’
이마에서 솟은 땀이 턱을 타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등줄기가 온통 축축했다.
한 줄기 선천진기가 느릿느릿 단전을 휘돌았다.
파(破)로 잘게 나누어진 대환단의 외기(外氣)가 머뭇머뭇 그 뒤에 따라붙었다.
자석이 철가루를 끌어당기듯.
시내가 강으로 흐르듯.
그 주위를 다시 삼재혼원공의 내기(內氣)가 호위하듯 에워쌌다.
날뛰던 외기의 기세가 점차 수그러들고, 세 개의 기운이 조금씩 섞여들기 시작했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다시 또 한 바퀴.
그리고… 또다시…….
***
“지수 형.”
김강산이 최지수의 어깨를 찔렀다.
최지수는 김강산이 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계룡문 본부의 3층, 대표실이자 수련실.
서림이 들어오면 뒈질 줄 알라는 소리와 함께 수련실에 처박힌 지 벌써 세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바람은 하루하루 차가워지는 중이었다.
첫눈이 내렸고,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곧 몬스터 웨이브가 닥칠 것이다.
지난 세 달 동안 서림은 아침에 잠깐 식당에 내려와 그 몸뚱이에 도무지 들어가지 않을 듯한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해치우고는 바로 수련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밥 먹고 수련하고 밥 먹고 수련하는 일상이었는데도 어째 날이 갈수록 애가 홀쭉해졌다. 휴식 시간을 쪼개가며, 밤을 새가며 수련을 하던 보육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지수는 서림이 또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서림이 귓등으로 흘리리라는 사실도.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모든 걸 다 하려고 하지 마라. 잠은 자면서 수련하고 있는 거냐.
서림은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다가 뜻 모를 소리를 웅얼거렸다.
-언제는 힘닿는 곳까지 도우라며?
-내가 언제…
-그게 그거지.
서림은 그가 다시 말을 붙이기도 전에 팽하니 일어서 수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틀째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는 게 살아 있기는 한데.
오늘까지 나오지 않으면 오늘 밤에는 벽을 부수고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수련실을 바라보는 최지수의 시선에 가느다란 빛줄기가 잡혔다.
서림의 검에서 볼 수 있는, 그 빛줄기. 서림이 검기라고 부르는 그것.
내상을 입어 한동안 검기를 쓰기 힘들고, 회복될 때까지는 성벽 방어도 알아서 하라고 했었는데.
“지수 형. 저거 그거 맞지?”
“그래. 검기구나! 림이가 회복되었나보다!”
최지수와 김강산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단을 뛰어올랐다.
수련실의 나무문, 그 틈새로도 빛줄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뚫을까?”
“내가 하마.”
와르르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벽 중간에 뚫린 문으로 새어나온 빛이 눈부셔, 둘은 눈을 찡그렸다.
두 번째 태양처럼 환히 빛나는 서림이, 가부좌를 튼 채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