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몬스터 웨이브 (1)
대전성벽 방향에서 다섯 줄기 봉화가 올랐다.
그쪽의 준비도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신호.
성벽 바깥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여전히 수북하게 깔려 있었다.
하얀 눈밭 위로 연신 피가 흩뿌렸다.
백여 미터 밖.
술사의 공격 범위 바깥에 몰려든 괴물들은 거대한 장벽처럼 보였다.
본격적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지 오늘로 닷새째.
1월의 시작과 함께 함박눈이 내리고, 뒤이어 한파가 이어졌다. 먹을 게 없어진 괴물들이 무리를 지어 인간의 냄새를 맡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조금씩 늘어나던 괴물들은 이제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구울과 고블린 따위 하급 괴물들을 제외한 숫자였다.
저기 오크가 수백 마리.
그 옆에 삼미호, 사미호, 오미호 떼가 또 수백 마리.
오우거, 슬라임, 서리거인… 그 외에도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한 가득이었다.
하늘에도 수백 마리의 화염박쥐와, 그보다 수가 적지만 위력은 비할 바 아닌 와이번과 히포그리프로 가득했다.
몬스터 웨이브에 대처하는 정석적인 방법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성벽 바깥에 괴물을 위한 적당량의 먹이를 남겨두는 것.
그 먹이는 성 바깥의 거주민, 즉 야인들의 책임이었다. 야인들은 괴물을 위한 식량을 남겨두었는지 확인받은 후에야 몬스터 웨이브가 진행되는 일주일에서 보름 남짓의 기간 동안 성 안의 임시 거주를 허가받았다.
야채, 곡식, 하급 괴물 고기. 그리고…….
죽은 인간의 싱싱한 시체.
성 바깥의 마을은 모두 얼음 창고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식용 얼음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시체를 썩지 않게 보관하기 위한 장소였다. 물론 희망보육원의 건물 뒤편에도 얼음 창고가 있었다.
이번에 그 ‘먹이’들은 괴물을 유인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여장 위에 올라선 최지수가 작전에 대한 마지막 당부를 하고 있었다.
“…유인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영단이 지뢰지대를 탈출하면 작전은 마무리됩니다.”
나는 최지수를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계룡문 애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다들 몇 달 전에 비해 몸이 꽤나 우락부락해졌다.
얼마 전 지남천이 선물해 준 오크 가죽 갑옷 위에 미호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껴입어 더 몸이 커 보였다.
상처 가득한 몸뚱아리와 떡 벌어진 가슴팍이 역시 용맹한 산적떼…….
크흠. 이건 아니고.
최지수에게 집중하고 있는 애들의 얼굴빛에 긴장이 어려 있었다.
이 정도 규모로 원정에 나서는 일은 충청 전역을 통틀어도 처음이니 어느 정도의 긴장은 당연했다. 아예 긴장이 풀린 것보다는 이 정도 긴장하는 편이 더 나았다.
몇 달 사이에 한층 짙어진 마력이 성벽 위에 일렁였다.
나눠준 마핵도 모두 잘 섭취했고, 그 마력을 바탕으로 또 부지런히 괴물을 잡아 경험치를 쌓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이제 어지간한 괴물들에게 황망하게 죽을 녀석은 없다. 최지수가 준비한 작전도 더하고 뺄 것 없이 깔끔하다.
단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설마 못 먹을 밥상에 재 뿌리자고 나오지는 않겠지?’
-괴물 소탕이라. 좋지요, 잘 되면 좋은데 말입니다. 저희 무령문은 공주성 방어하기에도 벅차서요.
-논산성도 사정이 썩 좋지가 않아서…….
한 달 전 열렸던 충청중앙 4성 대표들의 회의.
공주성 무령문주 김경민.
논산성 황산벌파 회장 박지은.
청주성주 처철수.
계룡문 대표인 나.
무령문주와 황산벌파 회장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아마 그 자리에 지남천이 없었더라면 나에게 젊은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쩌고 따위의 설교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인원이 부족하다면 유성길드에서 지원을 해줄 수 있네.
지남천의 말에도 그들은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가지지 못한 자는 잃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가진 자만이 자신의 손에 쥔 것을 놓칠까 두려워한다.
성주로서의 권위.
성민을 보호하는 자에게 쏟아지는 존경과 감사.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돈.
그 모두는 몬스터에게서 나온다.
인근의 몬스터의 세력이 약화되면 그들이 누리는 것 역시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줄어들 것이다. 얼마 전 내 계룡문이 그러했듯이.
최지수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하나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 수행이 간단해져서 안심했다.
그쪽 전력은 엉망일 게 뻔했다. 더군다나 딴생각 하는 놈들과 합동 작전이라니. 우리끼리 진행하기도 빡빡하기 그지없는 작전인데.
월매가 한국어를 지껄이는 편이 빠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번 작전에 지남천이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유성길드가 뒤에 없었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았을 터.
하지만 어디든 미친놈은 있다. 주제파악 못하는 놈도 있다. 상황파악 못하는 놈은 쌔고 쌨다.
‘굳이 대가리 깨지고 싶다면야 나도 사양하지 않겠...’
문득, 최지수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뒤이어, 계룡문 대표님께서 한 말씀 하겠습니다.”
“…어?”
“나와. 이럴 때 한 마디 해야지.”
소리 죽인 박수와 숨죽인 환호가 성벽 위에 물결쳤다. 이글이글한 시선에 떠밀리듯 여장 위에 올라섰다.
…이럴 때 뭐라고 하지.
“어… 약해빠진 애들이 빡센 훈련 따라오느라 고생들이 많았고… 황새 따라오다가 뱁새 다리 찢어질까 걱정했는데 뭐 찢어져도 뱁새 책임이니까…….”
-대표님, 잘생겼어요!
하하민이 목소리를 낮춰 외쳤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저걸, 확, 그냥.
“암튼…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 많이 오던데 한 놈도 안 빠져나갔지만 만약 나갔으면 대가리 박살… 아니, 이게 아니고……!”
조은조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뒤이어 킥킥거리고 히히거리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림아. 내가 잘못했다. 그냥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만 하고 끝내라.
옆에 선 최지수가 속삭였다.
하고 싶은 말.
가장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뭐, 다들 살아남아라.”
내 목소리를 뒤따르듯,
챙.
도를 뽑아드는 소리가 맑은 공기를 청량하게 울렸다.
김강산이었다.
뒤이어 이바름이 제 검을 뽑아들었다.
챙. 챙. 챙. 채앵.
이내 성벽 위는 검날과 도날과 철퇴와 도끼와… 어쨌든 가득 들어찼다.
옆에 엉거주춤 서 있던 유성길드원들도 전염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제 무기를 뽑아 들어올렸다.
이거, 꽤…….
‘믿음직한데.’
날카로운 날이 겨울의 햇볕을 받아 번쩍였다.
월매가 소화의 옷자락 같은 흰 날개를 펄럭이며 내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
콰아아!!!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오른쪽.”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하하민이 달리며 손을 등 뒤로 뻗었다.
유도루트의 양옆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흘러내리고, 이내 얼음으로 변했다.
바싹 뒤따르던 미호 떼가 얼음의 길 위로 미끄러졌다. 컁컁거리는 소리가 잠시 멀어지고,
뒤이어 오우거 다섯 마리가 쓰러진 미호의 벽을 뛰어넘었다.
남문을 나선 유인조는 서쪽과 동쪽으로 나뉘어 성벽을 한 바퀴 돌아 북쪽 성벽에서 합류했다. 성벽을 포위하고 있던 수천의 괴물이 유인조의 꽁무니에 매달려 있었다.
뒤좇는 괴물들과의 거리는 20여 미터 남짓.
그보다 멀어지면 괴물들이 추격을 멈출 가능성이 있다. 그보다 가까우면 우리 애들이 위험하고.
유도루트를 따라 미리 설치해 둔 장벽과 함정들이 괴물의 진행을 가로막았고, 간혹 루트를 벗어나는 괴물들이 있으면 매복조가 괴물들을 루트로 몰았다.
규모가 클 뿐, 단순한 몰이사냥이다.
그 사냥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괴물들.
쿵. 쿵. 쿵. 쿵.
바싹 가까워진 오우거의 발소리가 귀를 때렸다.
유인조와 괴물의 사이.
속도가 빠른 괴물들의 속도를 늦추거나 해치우는 별동대 역할은 두 팀으로 나뉜 은영단이 맡았다.
나와 이바름, 하하민이 한 팀을 이루고,
김강산이 박명칠과 조은조를 이끌고 있었다.
“작전 C로 간다. 준비됐지?”
“옙!”
“네.”
나는 땅에 스치듯 팽그르르 돌았다.
앞과 뒤가 바뀌는 짧은 순간.
이바름이 쏘아낸 금빛의 화염구가 내 뒤를 바싹 뒤따르던 오우거의 무릎을 불태웠다.
충분히 뜨거우나, 전차 갑주처럼 단단한 오우거의 가죽을 녹이기는 어려운 온도.
하지만.
불꽃이 사라진 무릎을 향해 하하민이 얼음송곳을 쏘아 보내고,
그 사이 생성된 이바름의 화염탄이 같은 지점에 격중했다.
마지막은, 하하민의 얼음창.
불과 얼음의 극심한 온도 차이를 견디지 못한 오우거의 무릎이 결국 박살났다.
무릎 하나를 잃은 놈의 거체가 기우뚱 기울어지고, 이내 고꾸라졌다.
그 사이 나는 반대쪽의 오우거 한 마리의 무릎을 쓱싹했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갑자기 3미터 높이의 언덕 두 개가 나란히 나타난 셈.
뒤따라 돌진하던 괴물 떼가 놈의 몸뚱아리에 걸려 나뒹굴었다.
귀를 찢을 듯 쏟아지는 괴성을 가볍게 외면하며, 우리는 속도를 높여 유인조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
오크와 비슷한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오우거가 상급 괴물 취급받는 이유는 단단한 가죽과 더불어 그 어마어마한 재생력 때문.
어디 하나 약점을 찾기 어렵다. 파(破)를 시전하면 모를까, 마핵을 단번에 파괴하기도 힘들다.
벌써 무릎 재생을 마친 오우거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는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1분도 지나지 않아 박살난 무릎의 재생이 끝난 것.
그리고 놈들은 제 몸에 상처를 입힌 이의 냄새를 절대 잊지 않는다.
그것이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재앙이라 불리는 거대괴수가 어떤 기준으로 공격 대상을 결정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성을 완전히 파괴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슬그머니 물러나는지 따위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거대괴수가 아닌 일반괴물들의 행동 원리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콩알만한 뇌에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듯한, 인간에 대한 적개심.
그리고, 식욕.
구울 같은 하급 괴물이든, 오크 같은 중급 괴물이든, 괴물도 잡아먹는 상급 괴물이든 마찬가지다.
고블린은 여기에 물욕이 더해지고, 오크는 번식욕이 더해진다. 와이번은 동족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 오우거는 자신을 상처 입힌 자에 대한 복수심이 더해진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과 식욕은 모든 괴물들이 동일하게 갖는 격렬한 욕구였다. 초식을 하는 고블린조차 기회만 되면 인간을 죽이려고 덤벼드니까.
수천 마리의 괴물을 60명의 인원으로 유인하는 이번 작전은 바로 그러한 괴물의 행동 원리를 바탕으로 수립되었다.
인간이라면 공포나 불안, 혹은 의심이 식욕과 적개심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터.
인간에게 쓸 수 있는 작전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작전의 대상은 인간이 아닌 존재. 그들의 이성은 본능보다 훨씬 약하다.
굶주린 그들의 눈앞에,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바로 코앞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
‘먹음직스러운 먹이라…….’
60명의 유인조는 세 줄로 늘어선 채 선두에 선 최지수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북서쪽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등 뒤에 커다란 자루를 하나씩 짊어지고 있었다.
자루에 낸 구멍에서 연신 붉은 핏물이 떨어졌다.
-시체를 손상시킨다고?
최지수의 제안에 되물은 사람은 오직 나 하나였다.
다들 좋은 생각이라는 반응이었다. 하하민은 숫제 박수를 쳤다.
한지혁의 시대에서 보았던 몇몇 범죄 뉴스가 떠올랐으나 나는 말을 아꼈다.
살인자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시체를 잔인하게 훼손한 살인자에게는 더 큰 비난이 쏟아지던 시대.
더 이상 그런 시대는 아닌 것이다.
내 검으로 꽤 많은 인간을 찔렀는데도 간혹 이 시대와 한지혁 시대 사이의 간극에 놀랄 때가 있다.
이들이 살아보지 않은…….
“야리다! 아뿌라비야따!”
문득, 아스팔트에 성대를 긁은 듯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역시 저런 놈들이 있나.’
아무래도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괴물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나는 속도를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다른 오크들보다 대가리 하나가 더 큰 대장 오크가 거대도끼를 들어올리며 무어라 지껄이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그 소리를 들은 오크놈들이 옆으로 빠지는 꼴을 보니 무슨 이야기인지 알만했다.
놈이 계속 무엇인가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그 주위의 괴물 놈들이 주춤주춤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흐름인데.’
가만히 두면 다른 괴물 놈들도 저놈들을 따라 멈추고, 주변으로 흩어졌다가 성벽으로 되돌아갈 터.
그러면 작전 실패다.
나는 청색 신호탄을 앞으로 쏘아 보내 유인조의 속도를 줄이라고 지시하고 이바름과 하하민을 돌아보았다.
“작전 E…….”
“준비됐습니다!”
“예압!”
하하민이 적색 신호탄을 쏘아 올리자 대장오크놈을 향한 유성길드 매복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유도루트의 양쪽 언덕에서 바위와 화염구, 얼음창이 쏟아졌다.
놈들이 우왕좌왕하는 순간.
콰아아아!!!
괴물 새끼들을 홍해의 물처럼 반으로 가르면서,
5미터 높이의 석벽이 솟아올랐다.
대장놈에게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다이렉트 고가도로.
나는 바닥을 걷어차 석벽 위를 내달렸다.
나를 공격하려 뛰어오른 괴물들의 팔과 무기가 연이은 속성 공격에 박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현재 매복조에 배치된 대지술사가 이 석벽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30초.
최지수의 마력이라면 그 배의 배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는 지금 유인조의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