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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31화 (31/122)

31화. 몬스터 웨이브 (2)

이제 오크 한 마리는 순식간에 박살낼 수 있다.

가위팔의 출수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난 석 달.

위험을 무릅쓰고 수련한 보람이 있었다.

내상은 완벽하게 치유되었고, 오히려 공력은 늘어났다.

비록 소모한 선천진기를 채우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그래도 초절정을 벗어나 화경(和境)에 이른 것만으로도 성과는 컸다.

평범한 수련으로는 30년은 걸렸을 것을 세 달 만에 도달했으니.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불가능한 성장이다.

이미 검황일 적 현경(玄境)을 밟았던 나에게는 다음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깊은 사색과 깨달음의 순간은 필요치 않다. 오직 내력의 절대량, 그것이 문제일 뿐.

하지만 화경을 벗어나 현경에 닿는다 해도 한계가 있고, 내 몸은 인간의 그것이다.

만약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인 현경의 끝을 보더라도,

설사 긴 무림의 역사 동안 아무도, 그 검황조차 발 디디지 못했다는 초월경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숨어버린 수천 괴물을 모두 찾아 죽일 수는 없을 터.

그러므로…….

‘박살내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대장놈의 오른팔 두 개가 내 팔과 다리를 향해 거칠게 뻗어 나왔다. 동시에, 좌상팔이 정수리를, 좌하팔이 심장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네 개의 팔이 서로 다른 존재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오크는 중급 괴물로 분류되지만 이런 대장놈의 전투력은 거의 상급 괴물에 버금간다.

놈의 우하팔이 내 발목을 쥐려는 순간,

허리를 비틀어 우하팔을 회피하고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희게 빛나는 검날이 놈의 무릎에 깊숙이 박혔다.

고통으로 놈이 멈칫하는 찰나.

검을 뽑아내며 동시에 왼손으로 나한권(羅漢拳)을, 오른발로 연환퇴(連環腿)를 시전했다.

권과 각에 얻어맞은 놈의 두 개 오른팔이 잠시 휘청이는 사이,

비스듬히 들어올린 월영검의 끄트머리가 낭창하게 휘었다.

지나치게 빨라 오히려 느린 듯 보이는 검세.

뒤이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기가 내 주위를 에워쌌다.

은영검법 제17절. 세우윤윤(細雨潤潤).

스팟! 팟! 파앗!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튀었다.

대장놈의 좌상팔이 월영검의 검날에 날아가고, 좌하팔의 팔꿈치가 덜렁거렸다.

“ORKKKK!!!!!!!!”

안 그래도 찢어진 것처럼 큼직한 아가리를 찢어질 듯 벌리며 놈이 괴성을 질렀다. 송곳니에 긴 치석까지 다 보일 정도다. 거 참, 양치 좀 하고 살지…….

놈은 얼마 없던 이성까지 마저 상실한 듯했다. 등줄기에서 가위팔까지 뽑아냈으니 말 다했다.

이걸로, 목적 달성.

자리로 돌아오는 내 발꿈치 뒤로 석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말해 뭐해.”

나는 검기를 끌어 올려 오크의 회녹색 체액으로 범벅이 된 은영단의 검날을 깨끗하게 만든 뒤 검집에 집어넣었다.

꽤나 마력을 소모했을 텐데 이바름과 하하민은 숨도 헐떡이지 않았다. 얼굴색도 멀쩡했다.

내가 수련하는 동안 은영단 모두가 미친 듯이 괴물을 잡아 마력을 쌓고 또 죽기 직전까지 훈련했다는 김강산의 얘기가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정신계 공격에 당해 두 눈 뻔히 뜨고도 내 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스스로가… 뭐랬더라? 부끄러웠다?

김강산이 이끄는 은영단 2팀도 무난하게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번 작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비행 괴물에 대한 대응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월매가 나타나자마자 히포그리프들이 미친 듯이 월매를 쫓아가 전열에서 이탈해 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면 부모님을 죽인 원수를 마주친 얼굴이 아니었을까 싶은 기세였다. 종종 월매의 부리 끝에 묻어 있던 깃털이 어떤 종족의 깃털이었는지 덕분에 확실히 알았다.

비행 속도는 월매가 히포그리프보다, 심지어 와이번보다 더 빠르니 월매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고.

허공에 휑하게 남은 화염박쥐들은 술사들의 집중공격에 박살났다.

그리고 와이번은…….

“내려옵니다!”

성문을 나서자마자 한 놈에게 적(積)을 쏟아붓고 이하민이 만들어준 얼음 발판을 타고 올라 결국 시체로 만들었다.

그 후로 서른여 마리의 와이번은 줄곧 나를 노리고 있었다. 나‘만’ 노리고 있었다.

이 역시 작전대로였다.

“셋입니다!”

한 마리씩 돌아가면서 급강하하다 얻어터지더니 이제 팀을 나눠 차륜전으로 돌입한 모양이었다.

1차로 매복조의 속성 공격을 견뎌낸 놈들이 이바름의 화염벽을 꿰뚫었다. 그러나 하하민의 얼음벽까지는 뚫지 못하고 다시 하늘 높이 상승했다.

그 뒤로도 유인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돌발 행동을 하는 괴물들도 있었으나 그래 봐야 뇌가 콩알만한 괴물 새끼. 모두 최지수가 세운 작전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유성 길드의 유인조와 합류를 마쳤다.

이제 만 마리를 훌쩍 넘는 괴물이 뒤꽁무니에 매달려 있다.

땅이 갈라질 듯한 발소리.

귀를 찢는 듯한 괴성.

‘너네는 이제 싹 다 뒤졌어.’

“대표님! 거의 다 왔습니다!”

하하민의 말대로 지뢰 지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다른 성놈들의 방해도 없었다.

지남천의 눈치를 봐서인지, 혹은 보령에서의 내 활약이 퍼졌기 때문인지는 모르……?

“…시발.”

없기는, 개뿔이.

“네?”

하하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호탄을 올리자 이내 2팀의 조은조가 이쪽으로 옮겨왔다.

“앞에 좀 확인하고 올 테니까 끝…….”

“네엡! 끝까지 긴장 놓지 않겠습니다!”

…이놈들이 내 분량을 자꾸 끊어먹네.

***

“성주님! 2팀이 포위되었습니다!”

“5팀도 위험합니다!”

“어디가 더 급한가?!”

호위대장의 대답보다 먼저 신호탄이 올랐다.

전멸 직전임을 알리는 붉은 신호탄이 번쩍였다.

청주성주 처철수는 호위대를 이끌고 다급히 2팀이 있는 방향을 향해 달렸다.

충청중앙 4성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 직후, 무령문주 김경민과 황산벌파 회장 박지은과 청주성주 처철수는 은밀한 회합을 가졌다.

김경민은 시작부터 격앙되어 있었다.

-협력이라니. 가당찮은 소리지요. 이번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분명 모두 계룡검룡의 공이 될 겁니다. 다들 보령회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요? 그 전투에서 열 명이 넘는 각성자들이 전사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검룡 소리만 합디다.

박지은이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보염련과 계약까지 맺었다더군요. 보염련이 순순히 세력에 소속될 이들이 아닌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검룡이, 그 개차반이, 아무 대가 없이 그런 작전을 제안한다? 구울이 시체를 피해 돌아간다는 소리죠. 이번 작전에 그자의 도움을 받으면 분명 이것저것 요구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지금까지 일궈온 것들은…….

-유성길드마저 대놓고 계룡문을 밀어주고 있잖아요. 그 엉덩이 무거운 길드장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다니요. 그 얼굴로 미인계라도 썼나 싶다니까요.

-어린놈의 새끼가… 그 눈빛, 봤지요? 우리가 각성자로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그런 햇병아리 새끼가!

-어머. 난 그 눈빛은 좋던데. 그 얼굴이면 무슨 눈빛이라도 좋고말고요.

-…어이, 박지은 회장. 정신 차리쇼.

-정신 타령까지야. 일은 일이고, 잘생긴 건 잘생긴 거지.

‘성주라는 인간들이 시야가 그리 좁아서야.’

처철수는 오가는 대화를 흘려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생각하기에 계룡검룡이야말로 손익에 밝은 자였다.

땅이 넓어지면 일반인이 모여들고, 일반인이 모여들면 성이 부유해지기 마련.

주변의 성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제 땅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 계룡은 번영하고, 그들의 성은 고꾸라질 터.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단독으로 작전을 실행해 봐?’

그 자리에서 그들 셋은 무령문과 황산벌파, 청주성의 긴밀한 협조를 결의했다. 또한 이번 작전에 합류하지 않기로 약조했다.

처철수는 자신이 지금껏 이룩한 것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듣기에, 계룡검룡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계룡문 부대표가 설명한 작전은 꽤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지뢰지대는 청주성의 남쪽 성벽과 꽤나 가깝다.

그는 최지수가 회의에서 설명했던 작전을 청주성 단독으로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수십 번에 걸친 훈련 끝에 드디어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날, 처철수는 처음 각성했던 날처럼 가슴이 뛰었다.

각성자로 20년. 청주성주 자리를 물려받고 10년.

그 긴 시간 동안, 스스로 공격을 결정한 일은 처음이었다. 항상 습격에 대응하기 급급했다. 괴물이 공격해오면 방어하고, 습격해오면 물리쳤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다운 선택…….’

그는 스스로에게 감동하며 3대 기보의 이름을 딴 파마신검(破魔神劍)과 참룡보검(斬龍寶劍), 쌍검의 검자루를 쓰다듬었다.

그 감동이 남김없이 후회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부 괴물의 속도는 너무 느렸고, 일부 괴물의 속도는 지나치게 빨랐다.

결국 유인조를 따라오던 괴물의 절반 가까이가 농토가 되어야 하는 평야로 흩어졌다. 아마 괴물들은 곧 방어가 헐거워진 청주성으로 돌아갈 터.

마음이 다급했으나 상황은 마음보다 더 급박하게 흘렀다.

급강하한 와이번이 유인조를 공격했고, 그들의 부상을 치유하느라 회복술사들이 마력을 모두 소모했다. 유인조의 속도가 느려지니 괴물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가까스로 전사들이 괴물을 상대해가며 겨우 지뢰지대 앞, 금강에 도착했을 때는 절반 이상의 성방원들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처철수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히포그리프의 부리가 파고든 왼쪽 어깨가 으스러졌고, 오크의 가위팔에 꿰뚫린 오른쪽 허벅지에서는 연신 피가 흘러내렸다. 어디에서 입은 부상인지도 모를 자잘한 상처들은 셀 수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힐링포션을 들이마시고 파마신검과 참룡보검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실수였다.

스스로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부신 빛에 눈이 멀어 잠시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이었다.

비명 소리와 피 냄새. 모두 그의 결정을 따른 청주성방의 것이다.

시야가 모두 괴물로 가득했다.

처철수의 보검이 펄쩍 뛰어오른 오미호의 앞발과 맞부딪쳐 튕겨나왔다. 한 시간 전에는 잘려나갔던 오미호의 앞발은 조금의 상처만 났을 뿐 멀쩡했다. 마력이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성주님, 피하십시오! 저희가 뒤를 막겠습니다!”

“성주님께서는 청주성을 지키셔야 합니다!”

‘…모두 내 책임이구나.’

어금니를 짓씹으며, 처철수가 막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콰아아!!!!

엄청난 폭음이 귀를 강타했다.

‘저 정도 화염탄을 날릴 마력이 남은 사람이 없을 텐데……?’

하지만 화염탄에 따라붙는 탄내는 나지 않았다. 대신, 괴물들이 질러대는 괴성 속, 희미한 환호가 귀를 파고들었다.

-…검룡이다! 검룡님이 오셨다!

‘…검룡이, 이곳에 어째서? 그는 지금 강의 남쪽에서 한참 계룡의 괴물을 유인하고 있을 텐데?’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돌아서려던 발이 멈추었다. 처철수는 우뚝 선 채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챙! 채앵!

참룡보검으로 앞발을 가까스로 막고, 파마신검으로 뱃가죽을 찔렀다.

처철수가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

‘주제파악을 어지간히도 못하는 놈들이네.’

파앗!

급강하하던 와이번이 내지른 검에 화들짝 놀라 다시 급상승했다.

“그래, 너 말이야. 물론, 쟤네들도.”

금강의 북쪽 강변.

드글거리는 괴물의 기운에 또 누가 수작을 부렸나 싶어 다급히 달려온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예상과는 다른 장면이었다.

지뢰지대의 강 건너편에서 격렬한 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녹색 씨앗을 그려 넣은 깃발을 보니 청주성주가 이끄는 청주성방이었다.

‘지들끼리 홀랑 끝내려고 했다, 이거지?’

만약 저들이 먼저 지뢰지대에 도착했더라면 상황이 꽤나 번거로워질 뻔했다. 폭음을 듣고 괴물들이 흩어지기라도 했다면 지금까지 한 고생이 모두 헛짓거리가 되었을 테니까.

계룡문의 유인조가 지뢰지대에 도착하기까지는 약 오 분.

“이걸 도와줘, 말아?”

-림아. 무슨 일이 있어도 무리하지 마라.

유인조의 선두에서 달리고 있던 최지수마저 그렇게 당부했다. 내가 사흘간 뒤졌다 살아난 후로 최지수의 염려가 좀 더 심해졌다.

힘닿는 데까지 도와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무리는 하지 말래지.

말을 들어주려 해도 워낙 오락가락해대니 들어 줄 수가 없다.

내가 머리를 긁으며 고민하는 사이 또 한 놈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황하 같은 큰 강이면 보이지나 않을 텐데, 이놈의 금강은 100미터가 조금 넘을까. 아쉽게도 건너편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날아다니는 화염구가 콩알만한 걸 보니 다들 마력도 바닥난 것 같은데…….

“에이 씨. 내가 진짜 못 산다.”

내 발이 얼어 있는 땅을 걷어찼다.

파삭!

얇게 얼어 있던 얼음이 발바닥 아래에서 깨져나갔다.

세 번째 얼음이 박살나는 순간.

높이 몸을 솟구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의 구슬이 검끝에 동그랗게 맺혔다.

잔뜩 젖혔던 어깨를 거세게 휘두르자, 회전하는 기의 덩어리가 놈들을 향해 총알처럼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선빵필……!”

아. 이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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