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쓸 만한 패 (1)
금강의 남쪽 강변을 따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박살난 괴물의 사체가 쌓여 강둑을 이루고 있었다. 온갖 체액이 흘러든 금강의 물은 흑빛이었다.
아마 이만 마리 이상.
대전성과 계룡성 주변에서는 한동안 괴물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성벽의 바깥에 외성벽을 건설하고 나면, 블랙데이 이전까지는 그곳은 정말로 안전지대가 될…….
“지수 형. 저기.”
내 손가락 끝을 따라 폭음이 사라진 강변을 확인한 최지수의 얼굴이 파드득 굳었다.
지남천이 침음을 흘렸다.
폭발로 파인 구덩이, 그 위에 수북하게 쌓인 시체 조각들.
박살난 가죽과 바스러진 뼛조각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얼음이 녹은 강처럼, 혹은 녹기 시작한 빙하처럼.
리치?
아니다.
근처에 리치가 없다는 것은 진작 확인했다. 더군다나 리치는 ‘저런’ 식으로 시체를 일으키지 않는다. 리치는 기존의 형태를 복원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군.”
지남천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꿈틀거리는 시체더미는 한 방향을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서, 시체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밀도 높은 마력.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기운이다.
“지수 형.”
“어둠술사인 듯하다. 조건을 만족할 경우 주술이 발동하도록 장소에 미리 주술을 걸어 둔 모양이다. 아마 지뢰지대가 사라지면 주술이 발동되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전쟁 때 걸어둔 주술은 아니겠지?”
“어둠술사의 암주술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십 년이 넘게 마력이 유지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구나.”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건 우리를 위해 준비된 빅엿이라 이거지.
누가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모여든 시체 조각들은 하나의 거대한 괴물의 형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만 마리가 넘어가는 괴물 시체로 이루어진 되살아난 괴물은 마치 산처럼 거대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나자빠질 수준이라면 계룡문 이름표 떼야지.
은영단 애들을 필두로 계룡문 애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게 느껴졌다.
“저거, 상대할 수 있겠지?”
“어둠술사가 새로 마력을 불어넣어 조종하지만 않는다면 그저 크고 단단한 시체덩어리일 뿐이다. 화염공격과 빙결공격을 반복해 약화시킨 뒤 물리공격으로 조금씩 소멸시키면 될 듯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무령문? 황산벌파?’
그럴 리가.
그들에게 이 정도 되는 주술을 실행할 어둠술사가 있을 리 없다. 뒤치기도 능력이 되어야 치는 법이다. 이 정도가 가능한 세력은 아마…….
‘…혈귀단?’
화르륵!
금빛 화염에 휩싸인 검이 내 가슴팍을 향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바닥을 걷어차며 단번에 검을 뽑아 들었다.
허공을 격한 놈의 검이 전진하며 다시 가슴팍을 노렸다.
지남천의 경호대 팀장이다.
아까부터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훔쳐보던 놈. 하하민과 비슷한 눈빛이었는데. 존경, 흠모, 경외… 그런, 당연한 눈빛.
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지금도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관종인가? 관심을 끌려는 수작?’
유치원생도 안 쓸 만큼 뻔한 공격을 튕겨내려는 찰나.
챙!
도를 뽑아 쥔 김강산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무거운 도와 가벼운 검.
김강산과 이름 없는 조연.
어떻게 봐도 왼쪽의 승리다.
김강산이 검을 떨군 놈을 향해 거침없이 도를 내리그었다. 도날이 놈의 어깨를 지나고, 깔끔하게 잘려나간 오른팔이 눈밭 위를 굴렀다.
놈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는 움켜쥐었던 검 자루를 슬그머니 놓았다.
역시 애들을 잘 키워놓으니 몸이 편……?
“야! 죽이지 마!”
“…왜?”
김강산이 놈의 모가지를 향해 도를 내리그으려던 자세 그대로 나를 돌아보았다.
애가 눈탱이가 맛탱이가 갔다. 아무튼 보령에 다녀온 뒤로 다들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이다.
조은조와 박명칠과 하하민과 이바름이 김강산의 팔다리를 하나씩 붙드는 사이, 굳은 채 얼어 있던 지남천이 버벅거리며 주절거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이 자가 대체 왜 검룡 자네를… 내 꼭 배후를 밝혀…….”
“됐고요.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죠.”
지남천이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공들인 주술.
목표는 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듯한 친절한 암습.
그리고…….
기감의 그물, 그 끄트머리에 걸리는 마력.
거리를 고려하면 마력의 크기가 상당하다.
저들 중에 어둠술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부가 어둠술사일지도.
지금으로서는 시체덩어리일 뿐인 저 되살아난 괴물에게 어둠술사의 마력이 새로 깃들면 꽤나 상대하기 까다로워질 터.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선빵필승이겠지.’
놈들이 준비한 함정에 빠져주는 꼴이 썩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그거야 박살낸 뒤에 생각하기로 하고.
고민은 짧게 끝났다.
“길드장님, 형. 뒤는 맡길게.”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박찼다.
“림아, 또 어딜 혼자 튀어나가는 거냐아아아아아------.”
최지수의 소리가 멀어졌다.
기운을 끌어올려 경공을 최대한을 전개하자,
“형 뒈지면 죽어버린다아아아아------!!!”
내 뒤에 따라붙었던 김강산의 결연한 얼굴이 저 멀리로 떨어져 나갔다.
어둠속성.
발현 이후 마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각성자의 능력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또라이 집단이 생겼다.
불, 물, 대지의 기본 속성에서 어둠 속성으로 바뀌는 과정, 놈들이 ‘전직’이라고 부르는 그 과정에는 최소 백 명의 살인이 요구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전직을 마치면 인간을 해하기에 안성맞춤인 능력을 갖게 된다.
괴물의 독보다 훨씬 해독하기 어려운 암독술(暗毒術),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암시술(暗示術),
죽은 괴물의 사체를 일으키는 암주술(暗呪術) 따위의 능력들.
옛 시대였다면 연쇄살인마가 되었을 놈들.
괴물을 죽이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능력에 마력을 쏟는 인간쓰레기들. 거악 중의 거악.
전쟁으로 대한민국이 망할 즈음 악명을 떨쳤던 어둠속성의 조직 KKK단은 각성자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일반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워 테러를 벌이던 미국 극우세력의 이름이 그들에게 붙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강에 암독을 타고, 일반인에게 암시를 걸어 살육을 자행한 KKK단은, 3차 블랙데이 이후 대한길드가 주축이 된 길드연합의 총공세로 거의 소멸했다.
하지만.
‘단지 조직이 사라졌을 뿐이지. 그 조직에 있던 놈들은…….’
길드 연합은 KKK단을 없애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곳에 몸담았던 모든 어둠속성 놈들을 싹 다 잡아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다.
안산성 전투에서 대패하고 탈주한 KKK단의 잔당들은 새로이 혈귀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놈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끔찍한 혈겁을 일으켰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인간도 아닌 새끼들아.’
.
.
.
스팟.
땅을 훑듯 수평으로 휘두른 월영검의 검날이 철퇴를 휘두르는 복면인의 발목을 잘라냈다.
동강난 발목이 땅을 구르고, 철퇴놈이 한 발로 껑충 뛰어 몸을 피했다.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철퇴놈의 심장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챙!
오른쪽에서 뻗어 나온 환도가 월영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도날을 타고 미끄러진 검날이 환도의 방패마기에 부딪히는 찰나.
손목을 비틀어 우상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목표는, 환도를 휘두르는 놈의 가슴팍.
환도놈이 검을 회피하려 재빨리 상체를 뒤로 젖혔다.
검끝이 갑옷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강철처럼 단단한 가죽 갑옷 위에 옅은 선이 생겼다.
검이 짧다. 그리고… 환도놈도 그리 판단할 터.
그대로 오른발을 거세게 내딛으며 좌하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제자리로 돌아왔던 환도놈의 상체가 단번에 뒤로 젖혀졌다.
감탄할 정도의 빠른 반응 속도.
하지만.
기맥을 타고 오른 검기가 월영검의 검끝을 타고 솟구쳤다.
지금까지 전투를 통해 월영검의 길이에 익숙해진 놈에게는 일순간 검이 길어진 것처럼 보일 터.
튀어나간 검기가 흰 직선을 그렸다.
희게 빛나는 얇은 선은 놈의 왼쪽 어깨를 파고들어 오른쪽 허리에서 놈의 몸을 빠져나왔다.
“크헉!”
짧은 비명과 함께,
두 조각으로 나뉜 환도놈의 몸이 피를 흩뿌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쉬익!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어깨를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철퇴를 회피하는 사이,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온 단창이 가죽 갑옷을 찢었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호신강기를 뚫고 스멀스멀 암독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는 산매진화를 일으켜 독을 태우며,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다.
‘벌써 회복됐다고?’
과연 철퇴놈의 발목은 멀쩡했다.
거무튀튀한 맨발로 바닥을 디딘 채 놈이 철퇴를 연속으로 휘둘렀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
캉! 카앙! 캉!
수십 번의 연속적인 공격이 검막에 가로막혔다. 그 순간. 허공을 가르며 화염탄이 날아왔다. 옆구리의 상처를 노린 정확한 공격-.
콰앙!
권강과 부딪힌 탄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화염탄이 아냐.’
폭발과 함께, 짙은 극독이 주변을 잠식했다.
나는 풀썩 뛰어 독무에서 벗어나며, 재빨리 진기를 운용해 호흡으로 스며든 독기를 태워 소멸시켰다.
단창놈이 따라붙고, 뒤이어 철퇴가 허공을 갈랐다.
어둠속성답게 대인전에 익숙한 놈들이다.
합동 공격에도 능숙해서 세 놈이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인다.
놈들의 날카로운 날붙이에 맺힌 검은 기운은, 뱀파이어의 독보다 몇 배는 강한 암독(暗毒).
“하압!”
복면인이 기합과 함께 철퇴를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허리를 뒤틀어 철퇴를 회피하며 거세게 오른발을 내딛었다.
월영검의 검끝이 철퇴놈의 어깨를 향하자, 놈이 다급히 철퇴를 거두어 월영검을 가로막았다.
끼익, 끼이익!
맞닿은 두 날붙이 사이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진기를 가득 담은 공격을 막아 세우는, 엄청난 마력이다.
검과 철퇴 사이에 팽팽한 힘과 힘의 대결이 벌어졌다.
스파앗!
그 사이 내 왼쪽으로 돌아간 단창놈이 옆구리를 향해 단창을 내질렀다.
한 명이 움직임을 봉쇄하고, 나머지 한 명이 공격하는,
합공의 기본에 충실한 움직임.
…에 당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고, 내가.
당랑각(螳螂脚)으로 단창의 끄트머리를 쳐내며, 월영검을 쥔 오른팔의 기운을 거뒀다.
팽팽하게 밀어대던 반대편 손바닥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
순간적으로 철퇴놈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물론 아주 순간이었으나,
퍼억!!!
앞으로 기울어진 놈의 복부에 내 왼손이 격중했다.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의 폭발이 전사의 단단한 가죽을 두부처럼 으깼다.
철퇴놈의 몸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찰나.
스파앗!
철퇴놈의 어깨를 뚫고, 단창이 날아들었다.
‘…자기 동료를 방패로 삼다니.’
아주 악독한 놈들이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미 바닥에 나뒹구는 시체는 열구를 넘어선지 오래다.
어지간한 놈들이라면 공포로 인해 손이 어지러워졌을 터.
하지만 놈들은 프로그래밍 된 로봇처럼 공격을 반복할 뿐이다.
단창.
철퇴.
환도.
세 놈이 한 팀을 이룬다. 그리고 몇 개의 팀이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눈 쌓인 숲 이곳저곳에서 꽤나 많은 살기가 느껴질 따름이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른다.
공력을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싸우고 있지만, 꽤 힘들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든다.
이런 놈들이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왜 난데없이 나를 공격하는지도.
다만 확실한 것은,
‘아주 위험한 놈들이야.’
카앙!
비스듬히 휘두른 월영검이 단창의 창날을 쳐냈다.
캉! 카앙!
연달아 찔러든 공격이 모두 가로막히자, 단창놈이 풀썩 뛰어 거리를 벌렸다.
단창의 날을 에워싼 검은 기운이 일순간 짙어졌다.
마력이 응축되고 있는 것.
‘저건 막아야……!’
바닥을 걷어차 놈을 향해 쇄도하는 순간.
사방에서 얼음송곳, 아니, 암독송곳이 날아들었다.
극성으로 일으킨 호신강기에 부딪힌 얼음송곳이 조각나 허공으로 흩어져 단번에 기화했다.
그 곳에 남은 것은, 시커먼 암독무(暗毒霧).
곧바로 호흡을 멈췄으나 아주 짧은 순간 들이쉰 숨에 딸려 들어온 극소량의 독만으로도 기맥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독을 태우느라 잠시 진기의 운용이 흩어진 순간.
응축된 마력을 실은 단창이 엄청난 기세로 눈앞을 가르며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