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35화 (35/122)

35화. 쓸 만한 패 (3)

“아직 먹으면 안 됩니다! 기다리세요!”

“철민아, 가게 가서 맥주 더 가져와! 아니, 걍 들통 채로 갖고 와!”

본부 앞 공터는 왁자지껄했다.

군데군데 피어오른 모닥불 위에는 일미호 통구이와 꼬치구이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길 건너 일호꼬치에서 출장 나온 두 부부 사장님과 총출동한 점원들은 모닥불 하나씩을 차고 앉아 통구이와 꼬치구이를 익히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계룡문 애들은 모닥불마다 들러붙어 아직 익지도 않은 꼬치구이를 처먹다가 일호꼬치 분들께 연신 손등을 얻어맞았다.

…월매 너는 해독 안 된 생고기도 먹어치우는 녀석이 거기 왜 껴 있냐.

“다들 고생했다! 내 밑으로 원샷!”

“원샷!”

“끄어어!”

김강산이 맥주를 들어 올리며 외치고는 꼴딱꼴딱 잔을 기울였다.

2000cc짜리 잔이 작아 보이는 덩치이기는 한데, 먹어치우는 속도도 과연 그러했다. 다들 1인 1일미호는 할 기세다.

“먹고 뒤지자!”

“머어억고오오 뒤지겠습니다아아!”

작전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근처 괴물은 싹쓸이했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인원은 0명.

팔다리 잘린 애들마저 단풍잎처럼 자라나는 손가락 발가락을 조물거리며 신나서 맥주를 처마시고 있다.

그래. 오늘 고생들이 많았지. 특히 내가 말이야.

내가 육즙 뚝뚝 떨어지는 꼬치구이를 씹으며 맹물을 들이키고 있을 때, 건물에서 최지수가 걸어 나왔다.

그가 바싹 다가와 속삭였다.

-또 한 명 찾았다.

나를 찌르려던 애새끼의 암시를 해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괴물 체액과 파천궁 놈들의 피로 범벅된 몸을 깨끗이 씻은 직후였다.

지남천이 빌려준 회복술사의 솜씨였다. 계룡문에는 해주 가능한 회복술사가 없었다.

어둠술사의 독과 주술은 평범한 회복술사의 힐로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마력이 아까워 그런 데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에게 어둠술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이제 우리 계룡문도 그에 대항한 해주술과 해독술을 키울 필요가 있다.

나는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와 나를 찌르려던 놈, 유성길드 경호대 백희찬이라는 놈이 갇혀 있는 방에 들어갔다.

백희찬은 우물거리며 울먹이다가 뒤통수를 다섯 대 후려맞고서야 겨우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주점에서 스치며 마주친 사이였습니다. 제가 동료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데 먼저 말을 걸더라고요.

백희찬에게 다가온 사내가 처음에 걸었던 암시는 ‘계룡에 오면 일호꼬치에 방문해라.’였다.

백희찬은 석 달 전 지남천을 경호해 계룡에 왔을 때 일호꼬치에 방문했고, 그 일을 오늘에서야 기억해냈다.

-사실 저는 그 집 좋아하거든요. 암시가 아니었더라도 아마 방문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내’를 또 만났다.

그가 두 번째로 건 암시는 ‘일호꼬치에서 맥주를 사주는 사람을 만나면 큰 소리로 검룡에 대한 이야기를 해라.’였다.

그게 놈들의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한다. 그 사람의 평소 행동 패턴과 일치하는 암시로.

나에게 ‘술을 권하면 받아 마셔라.’라는 암시를 걸었던 것처럼.

그리고 대상자의 정신이 반복되는 암시에 익숙해지면, 조금씩 방향을 바꾼다.

백희찬이 걸린 일곱 번째 암시는 ‘내일 해가 지면 몰래 성벽을 넘어 일호꼬치로 오라’였다.

열한 번째 암시는 ‘펄럭이는 무지개 깃발을 보면 검을 뽑아 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잘라라’였다.

-바보냐? 제 손가락을 자르고도 기억을 못해?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줄 알았습니다. 요즘 기억이 깜박깜박하는 일이 많아서요. 그게 다 암시 때문이었더군요.

쯧. 이걸 무던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등신들이나 걸리는 기술이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치밀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미 암시에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첫 번째 암시에 걸렸더라면 위험… 은 아니고.

그 암시, ‘조각난 시체가 땅을 딛고 일어서면 계룡검룡을 찔러라.’는 열다섯 번째 암시였다.

꽤 끈덕진 놈들이다. 저 한 수를 위해 석 달이나 존버할 줄 아는 인내심을 가진.

문제는…….

-얼굴을 모른다고?

-죄송합니다. 그게, 매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말투는 어땠냐? 발음이 어색했냐?

-아뇨? 전혀요.

역시 협력자가 있다. 분명히.

한 명의 스파이는 때로 열 명의 적보다 큰 위협이 되는 법.

애들이 흥겹게 파티를 즐기는 동안, 유성길드에서 지원해준 열 명의 회복술사를 동원해 애들을 하나씩 은밀히 불러 차례차례 해주술을 시행했다.

이제 계룡문 전원에 대한 해주술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암시에 걸린 애들은 총 일곱 명.

암시의 내용은 ‘아침에 일어나면 엉덩이로 이름쓰기’ 따위의 수준이었으나…….

-이번에는 누구야?

-그게…….

-왜. 누군데 뜸을 들여.

-명칠이 형이다.

시바알. 은영단까지 걸려 있었다고?

은영단 애들 하나하나의 마력은 이제 어지간한 중소성의 성주에 맞먹는다.

그런 박명칠이 암시에 걸렸다는 것은, 놈들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것.

큰 일 터지기 전에 알아내서 다행이기는 한데…….

갑자기 빡치네, 이거.

-얼굴은?

-알고 있다. 그런데 림이 너에게 직접 말한단다.

박명칠은 격리실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꽤나 어두웠다.

그는 한숨을 스물일곱 번 내쉬고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대가리를 후려맞고는 겨우 입술을 뗐다.

“…죽일 거냐, 림아.”

“형. 어둠술사야.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오냐?”

어둠술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모를 리 없는 박명칠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는 사람이겠지. 아마, 꽤 친분이 있는.’

박명칠이 깊은 신음을 흘렸다.

신음과 함께 흘러나온 이름은 나도 알고 있는 이였다.

“…기석이 형이다.”

전 청응파 부회장이자 나문덕이 쓰러진 후 임시회장이 된 놈.

청응파 애들을 이끌고 계룡문으로 들어온 놈.

지금 계룡문 17팀 팀장을 맡고 있는 놈.

그러니까, 더러운 어둠술사에다 배신자 새끼가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잡은 괭이도마뱀에게서 나온 마핵을 처먹었다 이거지.

박명칠이 내 다리를 붙든 것은, 내 발이 막 바닥을 박차려는 순간이었다.

“죽이지만, 죽이지만 말아줘, 림아. 너 그거 있잖아. 마력, 마력만 없애는 거 있잖아. 그 기술 쓰면 되잖아……!”

박명칠은 아주 다급해 보였다. 내가 그를 보아온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가 그토록 다급한 모습은 손에 꼽았다.

“그 사람, 옛날에는 진짜 착한 사람이었다. 기석이 형이 먼저 각성하고 내가 각성 못했을 때도 얼마나 우리 집을 잘 챙겨줬는지 몰라. 우리 아버지 쓰러지셨을 때도 그 형이 의사를 불러줬다고. 림아, 내가 진짜 잘할게. 앞으로 작은, 그래, 소악도 저지르지 않게, 내가……!”

그의 열 손가락이 내 발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이해할 것 같았으나…….

나는 허리를 굽혀 희게 질린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형. 미안해.”

어쩔 수 없다.

이 일로 박명칠이 나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해도.

설사 어긋난다 해도…….

***

가기석은 술이 떡이 되어 본부 앞 광장에 널브러져 있다가 잡혀 들어왔다.

나는 그가 술이 깨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몇 군데 혈도를 누르자 가기석이 돼지 목 따는 비명을 지르며 먹은 것을 토해냈고, 다시 몇 군데 혈도를 누르자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초점이 돌아온 놈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놈은 처음에 모든 잘못을 부인하다가 몇 번 분근착골을 맛보고 나자 곧 눈물콧물과 함께 사실을 토해냈다.

“더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놈이 내 발목을 움켜쥐고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찧었다.

놈의 이마에 이미 피가 맺혀 있었다.

“더 강해지고 싶으면 괴물을 잡았어야지. 성 밖으로 나가서 오우거를 죽이고, 리치를 죽이고, 두억시니를 죽였어야지. 왜 사람을 죽이냐고, 사람을.”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었으면… 아악!!!”

내 발이 놈의 팔목을 밟자 놈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나는 놈을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알아내야 하는 정보가 많았기 때문이다.

놈은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얇은 희망을 붙잡고 자신이 아는 바를 필사적으로 털어놓았다.

그 덕분에 접(椄), 환(換), 용(用)으로 이어지는 암시술의 삼 단계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놈이 찌끄레기라서 파천궁 놈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정말로 모른다. 정말로… 그저 일이 잘 풀리면 파천궁에 자리를 마련해 준다기에…….”

눈물과 콧물과 온갖 오물로 범벅이 된 가기석을 내려다보다 나는 월영검의 검자루를 쥐었다.

놈이 부러진 팔과 다리로 꿈틀거리며 내 발을 향해 기어오려 안간힘을 썼다.

“림아. 림아… 내가 잘못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내가, 잠깐, 잠깐 실수를 저질렀어. 너 나 알잖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알지. 알다마다.”

박명칠의 결사적인 변호가 아니더라도 나 역시 과거의 가기석을 알고 있었다.

청응파의 유망주 각성자이던 시절.

종종 보육원에 파견 나온 그가 삼미호의 불길 앞에서 용맹하게 두 팔을 내밀어 석벽을 세우던 모습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는 가끔 일호꼬치에서 포장해 온 꼬치를 애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가기석은 한때 보육원에서 ‘꼬치형’으로 통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이미 첫 살인을 저질렀다.

-가기석의 남동생이… 성폭행을 당했더구나. 그게 계기가 된 모양이다.

최지수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서른한 명. 마을의 모든 사람을 죽였더구나. 사망자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에 취했고, 자신이 대상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사실에 취했다.

범인(凡人)이 악인(惡人)으로 바뀌는 평범한 과정을 거쳐 그는 어둠속성으로 전직했다.

“가기석.”

“…림, 아니, 대표님.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백이십 명의 일반인을 죽인 걸 실수라고 하지는 않지. 그건 악행이라고 부른다고.”

“평생, 평생토록 죄를 뉘우치며 살겠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에게 어린 동생과 나이 드신 어머님이 계시다는 거…….”

“네놈도 좋은 형이자 좋은 아들이지. 제 가족에게는.”

“…아, 아시는군요. 제가 정말 열심히…….”

악인도 때로는 착한 딸이고, 살가운 남편이며, 효성스러운 딸이고, 좋은 형이다.

하지만…….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목을 지났다.

피가 솟구치고, 잘려나간 목이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악인은 종종 선을 행한다. 악인 역시 인간이므로…….

***

가기석을 비롯한 세 명의 파천궁 협력자의 목은 사흘간 계룡문 본부 앞에 내걸렸다.

유성길드에서도 열 명의 협력자를 찾아내 제거했다.

숨은 협력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과정이다. 어쩔 수 없는 절차다.

박명칠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쉽지만은 않았다.

서림을 원망하다가 그런 자신에게 화들짝 놀라고, 다시 가기석을 원망하다가 눈을 부릅뜬 그의 얼어붙은 모가지와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났다.

마지막은 언제나 자책이었다.

‘내가 조금 더 형에게 신경을 썼다면.’

가기석이 처음부터 어둠술사였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가 계룡에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각성자 서림을 예전부터 격렬하게 질투했다는 사실도 박명칠은 알고 있었다.

그게 거북해 그를 조금씩 멀리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거북하다고, 불편하다고 멀리하지 않았더라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가기석을 멈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명칠은 사흘간 휴가를 내고 집에 처박혔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리라. 그렇게 위로하면서.

하지만 광장에서 제 손으로 가기석의 목을 잘라낸 서림이 박명칠을 찾아왔을 때는 아직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않았다.

“명칠이 형.”

“오늘은 돌아가 주라, 림아.”

서림은 돌아서지 않았다.

“대표님. 제가 지금은 마음이 너무 힘드네요. 대표님의 얼굴을 보기가…….”

서림은 끝나지 않는 그의 문장이 끝나기를 잠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청응파 회장 나문덕 씨가 깨어났어. 형을 보고 싶어 하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