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36화 (36/122)

36화. 이제 시작이라고. (1)

나문덕은 지난 일 년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중환자치고는 안색이 좋았다.

박명칠은 수십 번의 병문안에도 줄곧 감겨 있었던 가느다란 눈이 뜨여 있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10년 가까이 회장님으로 모셨던 분이다.

갓 각성한 신입이었던 자신에게 새 강철검을 선물로 주시며 직접 검술을 가르쳐주셨던 정 많았던 회장님.

나문덕이 껄껄 웃으며 박명칠의 어깨를 짚었다.

그 손에 예전만큼의 힘은 담겨 있지 않았다.

“서림이, 아니 서 대표님께서 될성부른 떡잎인 줄은 알았지만 말이야. 세상을 떵떵 울리는 계룡검룡이 될 줄은 몰랐지, 내가.”

나문덕을 해친 것은 어둠술사 가기석의 암독이었다.

오랜 기간 조금씩 스며든 암독이 나문덕의 마력을 앗아가고 그를 쓰러뜨렸다.

많은 회복술사와 일반인 전문 의사가 다녀갔는데도 원인을 찾아낼 수 없었던 이유였다.

서림이 보낸 유성길드의 해독 전문 회복술사는 이렇게 악독한 암독은 보기 드물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문덕에게 남은 마력은 많지 않았다. 더 이상 각성자 노릇을 하기는 어려울 터.

그럼에도 그는 주름진 눈으로 웃고 있었다.

“회장님….”

“서 대표 그 사람이 나를 잊지 않았군. 내가 그 사람에게 죄를 지었는데도….”

나문덕은 보육원 원장이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보호 계약을 유지해왔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보육원의 아이가 각성해서 원장의 목을 가지고 청응파에 찾아왔을 때 그는 과거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업가일 뿐,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그에게 어째서 자신들을 외면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그를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슬라임을 제거하고, 그 힘에 걸맞는 계약을 요구했을 뿐.

그 아이가 아직 청응의 불도저라고 불리던 시절, 나문덕은 여러 번 서림에게 청응파로 들어오기를 권했으나 서림은 끝까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는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명칠이 네가 참말로 대단한 리더를 만났구나.”

“…그렇지요.”

박명칠은 진심으로, 진심을 다해 대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꽉 막힌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회장님은 이제 무엇을 하실 생각이세요. 혹시 농장이나 가게를 운영하실 생각이시라면 제가 자리를 봐드리겠습니다.”

과거에 입은 은혜와 지금 박명칠 자신의 입지로는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이었다.

나문덕은 고맙다고 하면서도 필요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어쩌시려고……?”

“천신교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지원하려고.  애들은 많은데 손이 부족하다더군.”

나문덕이 껄껄 웃으며 덧붙였다.

“이 할애비를, 애들이 좀 귀찮아하겠지만 말이야.”

***

“형! 내가 간다!”

“저도 갈래요, 저도요!”

“제가 어머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서울 구경 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대표님.”

“니들 장유유서 몰라? 그래도 은영단에서 내가 최연장자거든? 림아. 나 데려가라.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들 데려갔다가 무슨 꼴을 볼려고…….”

“대표님! 저 이바름, 스스로의 실력이 그 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하고 싶! 습니다!”

김강산과 하하민, 조은조와 박명칠이 내 팔과 다리를 하나씩 붙들고 늘어졌다. 이바름은 등 뒤에 매달렸다.

“월매야!”

하늘을 휘돌던 월매가 날개를 벌리고 활강해 애들… 아니, 내 머리를 부리로 쪼아댔다.

…너까지 왜 이러니. 응?

결국 다섯 각성자와 한 마리 매는 각기 대가리를 붙들고 성벽 위에 널브러졌다.

대한길드의 사절단이 계룡성에 도착한 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녀석들은 내가 기다리던 것, 랭킹전 초청장을 가져왔다.

계룡문이 받은 초청장은 세 장.

제5회 랭킹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4년마다 한 번씩, 몬스터 웨이브가 지나간 뒤 이른 봄에 열리는 랭킹전.

각 길드에서는 7명씩 참가할 수 있지만 길드를 제외한 성들은 사정이 다르다.

길드 연합에서 배부하는 초청장의 숫자만큼만 참가할 수 있다. 지난 랭킹전에 계룡성이 받은 초청장의 숫자는…….

영. 제로. 0.

그때는 서로 멱살잡기 전이었던 입암파와 청응파, 곡사파 회장 셋이서 나란히 서울 구경을 다녀왔다고 했었지. 이 자존심도 없는 놈들.

그때 나는 보육원 지키느라 정신없었고.

얼마 전 길드장 회의에 다녀온 지남천이 이번에는 계룡성에 초청장이 나올 거라고 귀띔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받아들고 보니 감회가 새롭기는……!

구울 풀 뜯어먹는 소리.

길드 연합. 지들이 뭐라고 참가 인원을 정하냐고. 하여튼 썩어 빠진 구파일방에 오대세가 같은 새끼들이다.

파천궁 놈들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내가 암시에 걸려 있다고 믿으며 꺼졌으니 나에게 접근하기 전에 계룡문을 박살내려고 공격하지는 않을 테고.

괴물을 싸그리 정리한 뒤로 계룡성 주변은 1차 블랙데이 이후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평화로워졌고.

이번에는 참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참가해야 하는 이유가 산더미다.

파천궁이라는 거대 세력이 나를,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으나 계속 놈들의 인형놀이에 응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군이 필요해.’

유성길드만으로 충분하다 여겼으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전국의 중소문파와 각 길드의 얼굴들이 모이는 랭킹전.

어떤 놈이 믿을 만한지, 어떤 놈이 쓸 만한지 알아볼 기회다.

더불어 신약 홍보도 하고.

소금 판매할 강원 쪽에 안면도 트고.

내 계획보다 조금 빠르지만,

이번에 계룡문이 전국구로 이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지뢰지대를 이용한 괴물 소탕 작전 이후 계룡문 애들을 총동원해 한 달 만에 높이 20미터, 폭 5미터, 총 길이 30km짜리 성벽을 완공했다.

길드가 자리잡은 본성들에 맞먹는 성벽이다. 이제 중소성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수준.

기존의 성벽을 허물어 그 재료를 가져다 써가며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했다.

기껏 괴물 소탕을 끝냈는데 다시 서식지가 생기면 말짱 도루묵이니깐.

그 결과 계룡성은 이전보다 세 배 더 넓어졌다.

그리고 그 땅에, 새로운 계룡성민들이 자신의 삶을 일구는 중이다.

인근의 성에 입성을 허가받지 못했던 야인들.

괴물에게 박살난 부산에서 도망쳐 유랑하던 유랑민들과 혈귀단이 일으킨 혈겁에서 겨우 생존한 횡성성민들, 철원성민들도 이주 신청자 목록에 상당수 이름을 올렸다.

그보다는 드물지만, 다른 성의 성민들이 이주를 희망하기도 했다. 계룡성이 다른 성들보다 안전하게 여겨진다는 방증이었다.

그들은 그 동안 버려져 있던 땅에 집을 짓고, 땅이 녹자마자 논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하하민이 맡아 진행한 제2회 계룡문 각성 페스티벌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신청자 3만 명 중 1만 명이 훈련을 수료했고 10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각성했다.

계룡문에도 2대 제자들이 생긴 것이다.

듣자하니 은영단은 그들에게 거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모양이던데…….

‘걔들이 이 꼴을 봐야 하는데 말이지.’

실제로 초소 경비를 서고 있던 애 하나가 목을 빼고 이쪽을 넘겨다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림이 형. 역시 센 놈이 가야겠지? 거기 가서 계룡문 체면 구기면 쪽팔리잖아.”

김강산이 히죽거리며 도를 움켜쥐었다.

“그래라. 니들끼리 치고받고 해서 정해라.”

나는 하품을 하며 가부좌를 틀고 앉… 으려다가 벌떡 일어섰다.

“새끼들아! 밖에 가서 싸워! 성벽 무너진다고!”

“예압, 형님!”

김강산이 가장 먼저 뛰어내렸다.

조은조가 그 뒤를 바싹 쫓았다. 이바름과 하하민, 박명칠이 질세라 제 무기를 붙들고 성벽을 뛰어내렸다.

…팝콘 각인데. 아쉽게 팝콘이 없네.

***

퐁.

포오옹.

파아앙. 팡!

김강산이 천장에 닿도록 날아올랐다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침대 매트리스를 두 손바닥으로 짚었다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다섯 바퀴를 돌아 엉덩이로 침대를 콩 찧고, 다시 튀어올랐다.

“형, 형들아! 이거 레알 쩐다!”

“강산아. 그러다가 천장 뚫겠다. 제발 앉아라.”

최지수가 간절한 목소리로 김강산을 불렀다. 물론 김강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형은 애새끼한테 뭘 또 그렇게 빌고 앉았냐.”

‘샤워실’이라고 적힌 문에서 걸어 나온 서림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며 왼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퍼법버벜!

왼손에서 빛이 번쩍거리더니, 이내 김강산이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서림이 그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탁자 위 ‘드라이기’를 집어 들었다. 막 씻은 얼굴이 거의 자체발광하듯 번쩍거렸다.

그들은 길드연합, 정확히는 대한길드가 주최하는 랭킹전에 참가하기 위해 계룡성을 떠났다. 그리고 일곱 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 서울성 외곽에 마련된 불꽃성의 숙소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최지수로서는 눈이 돌아갈 만큼 화려한 성이었다. 김강산과 하하민도 마찬가지였다.

서림만이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스럽게 지껄였을 뿐.

-와. 진짜 여기 전기가 들어오네. 이 새끼들… 이거 블랙데이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태양광 설치해서 완공했다더니. 이게 진짜였네, 진짜였어.

하지만 서림의 불만이 감동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미친. 엘베라고, 엘베가 있다고. 엘베 타보기가 얼마만이냐. 내 인생에 엘베를 다시 탈 줄이야…….

계룡문의 숙소가 마련된 불꽃성 8층에 오르는 동안 ‘엘리베이터’라는 옛 시대의 이동기기에 탑승한 서림은 미친 사람마냥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다시 ‘엘베’를 타고 온다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급기야 저녁 식사로 나온 손바닥만한 ‘케이크’를 먹으며 눈물을 훔쳤다.

-시발… 디저트다. 딸기케이크… 미쳤다… 녹네, 녹아… 시발… 나 대한길드 들어올까...

-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이 화려한 시설이 다른 각성자들을 대한길드로 끌어가기 위한 대한길드의 수작이라고 말한 사람이 바로 너잖느냐. 네가 이리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농담이야, 농담. 지수 형. 농담… 이라고….

전혀 농담 같지 않은 얼굴로 서림이 중얼거렸다.

길드연합 주최의 랭킹전 시작이 바로 내일이었다.

계룡문의 참가자는 초청장 쟁탈전에서 예상대로 승리한 김강산과 예상외로 승리한 하하민. 서림에게 듣자하니 하하민이 자힐을 해대며 죽어라 버티는 통에 나머지 세 사람이 기권했다든가.

마지막 한 장은 당연히 서림의 몫이었다.

최지수는 샤워실에서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서림을 힐긋거렸다.

서림은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서림의 기분이 좋다면 좋은 일이지만, 최지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괜히 불안했다.

“림이 너 혹시 아까 시비 걸던 제물포길드 결국 줘 팼냐?”

“왜, 아까는 말리더니. 역시 박살냈으면 좋겠다 싶지?”

“아니,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와. 생각하니까 다시 빡치네. 깃발에 용이 뭐 어때서. 지들이 용 전세냈냐고.”

서림이 드라이기를 침대에 다소곳이 내려놓으며 팔을 걷어 올렸다.

“그렇지, 림이 형? 제물포길드? 이름도 촌빨 날리는 새끼들이 우리 깃발에 시비를 걸어? 갈까? 지금 가?”

“맞습니다, 대표님! 저희 성 이름이 계룡이고 대표님 별호가 검룡인데! 우리 깃발에 용 안 들어가면 용이 운다구요! 바꾼다면 지들이 바꿔야지 왜 우리한테 지랄이지요?”

김강산과 하하민이 맞장구를 쳤다.

최지수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려는 기세의 둘을 잡아당겨 침대와 의자에 각각 내던졌다.

그리고 서림에게 나긋나긋하게 웃어 보이며 물었다.

“림아. 형이 머리 말려 줄까?”

최지수는 서림이 건넨 드라이기를 받아 들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따뜻한 바람을 불어 넣으며, 이번 서울행에 따라오기로 결정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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