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제 시작이라고. (2)
최지수는 처음에는 계룡에 남으려고 했었다. 그래서 은영단의 초청장 쟁탈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서림이 자리를 비운 동안 계룡성을 방어해야 한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뢰지대를 활용한 소탕 작전의 대성공으로 계룡 주변은 전에 없이 평화로웠다. 물론 언젠가는 인근에도 다시 서식지가 생기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큰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때 서림을 습격하고 주술을 실행한 파천궁.
계룡문을 공격한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연구소의 마핵을 소모하면서까지 하하민을 비롯한 회복술사들에게 해주술을 익히도록 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백호 그 괭이도마뱀이 그쪽 동네에서도 유명하다며. 내가 그거 잡았다는 얘기에 한 번 찔러봤나보지.
-…한 번 찔러 봤다?
-그래. 내가 뜨거운 맛을 보여줬으니깐 한동안은 조용할 걸. 거기도 지들끼리 치고받느라 바쁘다며. 여기까지 또 오겠냐고. 아무튼 형은 걱정을 사서 해서 큰일이다, 진짜.
서림은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이상해.’
한반도 모든 각성자를 모은 것보다 몇 배 많은 각성자를 휘하에 두고 있다는 파천궁이다. 그 파천궁이 계룡문을 공격했다.
지남천마저 진심으로 염려하며 계룡문과 유성길드 사이의 신호 체계를 점검하고 새로 증축한 외성벽 방어 시설을 확충하느라 분주했는데.
계룡문 애들이 어디 한 군데 다칠 때마다 미친놈마냥 날뛰는 서림이 그 강대한 적의 습격에 저리 평온할 리가 없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
최지수는 그렇게 확신했다.
괴물 소탕 작전이 끝나고 석 달 동안 최지수는 언제나처럼 서림의 일상을 면밀히 살폈다.
평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 여섯 시에 기상.
두 시간 운기조식 후 본부 1층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최지수가 항상 함께하고 김강산이 보통 함께하며 은영단 애들이 따라붙는 경우도 많다.
그 후 열두 시까지 다시 수련하고 역시 식당에서 점심식사.
오후에는 2대제자들 훈련장에서 한 시간 가량 신입들의 훈련을 봐주다가 외성벽을 한 바퀴 돌며 방어 상태를 점검하고 돌아와서 다시 수련.
일곱 시에 일호꼬치에서 저녁식사. 돌아와서 열두 시까지 수련 후 취침.
힘을 얻은 서림이 보육원으로 갓 돌아왔을 때처럼 단조롭고, 그래서 평화로운 일상.
최지수는 모든 것이 썩 잘 돌아간다고 느꼈다.
약간의 위화감만 제외한다면.
처음에 위화감을 느낀 것은, 대규모 상단인 E&G 상단의 상단주가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그 위스키를 선물로 주고 간 직후였다.
-지수 형. 파천궁 서울지부 말야. 아는 대로 말해봐, AI 모드로.
-파천궁 서울지부의 본부는 서울 3성에 있다. 밖으로 알려진 총 인원은 57명으로 중소조직 수준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요원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한반도 조직들의 정보를 수집해 북경으로 보내는 업무를 하며 일곱 길드와 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지부장은 김영호, 46세, 남, 2세대 각성자로 과거 대한길드의 길드원이었으나 대한길드의 각성자 우대 정책에 반대하였다가 길드에서 쫓겨났고 이후…….
최지수는 설명을 하다가 문득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림이가, 이렇게 내 말을 이렇게까지 안 끊고 들은 일이 있었던가?’
절대로 없다.
분명 처음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어?
-지금 림이 네 모습이… 마치 환(換)에 당한 듯 보이는데 말이다.
-우리 일주일에 한 번씩 해주술 받고 있잖아, 형.
-그래. 그렇지. 그렇기는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루는 혼자 성 밖에 나가서 오우거 체액을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계룡문이 강해지고부터는 서림은 애들 경험치 뺏는 짓이라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괴물을 잡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시 좀 이상한 일이었다.
또 하루는 검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수련을 하다가 다쳤다는데 붕대를 풀어보니 손은 멀쩡했다.
무지개색 깃발을 창문에 꽂아놓은 날도 있었고, 보란 듯이 물구나무를 서서 성벽 위를 오가기도 했다.
가장 이상한 점은, 서림이 파천궁을 그다지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
‘계룡문에 대한 위협이라면 눈을 까뒤집는 애가, 저렇게 태평하다고?’
최지수가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를 내팽개치고, 계룡성의 방비를 남은 은영단에게 맡기면서까지 랭킹전에 따라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 서림과 김강산과 하하민 셋이서 전국의 각성자들이 모이는 랭킹전에 보냈다가 생길지도 모르는 사건사고가 두렵기도 했다.
“지수 형.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냐. 새삼스레 내가 또 잘생겼냐?”
“그래. 오늘 더 잘생겼네.”
“됐고, 가서 씻어라. 온수 나온다. 형 따뜻한 물로 씻어본 적 없지? 끝내준다고, 이거.”
“어? 림이 형, 따신 물로 씻고 싶었어? 진작 나한테 말하지. 내가 들통째로 끓여줄 텐데.”
“아예 나를 수육으로 만들어라, 이놈아.”
최지수는 이번 랭킹전이 열리는 사흘 동안, 서림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고 다시 다짐하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입을 딱 벌렸다.
“…이걸 당기면 따뜻한 물이 나온다고?”
***
-송동철, 제물포길드의 송동철이다! 길드 최연소로 홀로 나가를 잡았다는 그 송동철!
-상대방도 제물포 길드인가?
-눈구녕은 뭐하러 달고 다니냐? 깃발 모양이 다르고만.
-비슷한데? 뭐가 다르다고 지랄이야.
-잘 보라고. 홍코너의 제물포 길드는 용 한 마리, 청코너는 용 두 마리가 엉켜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청코너는 지들이 뭐라고 제물포 길드의 상징인 용을 가져다가 자기네 상징으로 삼은 거야? 참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고만.
-예룡인가, 계룡인가,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그래서 어제 도착하자마자 제물포길드와 한 판 붙을 뻔했다지 뭔가.
-한 판 붙을 뻔? 농담도 적당히 해라. 보나마나 꼬리 말았겠지. 시골구석에 붙은 작은 조직이 제물포길드랑 붙기는 뭘 붙어.
비무대에 바싹 붙어 앉은 관객1과 관객2가 나누는 환담이 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꼬리를 말아?
시골구석에 붙은 작은 조직?
예룡인지 계룡인지?
하하.
하하하.
이게 다 인터넷이 없어서 그렇다.
옛 시대였으면 내가 백호 잡는 게 유튜브 10억 뷰는 너끈히 찍었다. 10억이 뭐야. 100억도 찍었을 걸.
-어, 청코너 저 사람 저거 계룡문의 계룡검룡 아닌가. 내 가게에 소금 대 주는 사람이 보령에 있는데, 그, 뭐라더라… 서해의 재앙에 버금가는 괴물을 잡았다던데.
그래도 진실을 말하는 자가 있다.
-에이이이이이. 그럴 리가.
-허풍도 심하면 병이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런 비리비리한 놈이? 전사라는 놈이 술사보다 더 약해 보이는데.
진실을 말하는 자가 고통 받는 더러운 세상… 이지만.
‘차라리 더 좋아.’
모두가 우승하리라 예상하는 이의 승리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피파랭킹 1위인 브라질이 한국을 이기면 다들 그런갑다 하지.
그러나 반대라면?
난리가 난다.
막 토토 38배 뜨고, 265배 뜨고. 한국이고 외신이고 가리지 않고 스포츠 뉴스란은 그 경기로 도배되기 마련.
이번 랭킹전이 끝날 때쯤에는 우리 계룡상단에 주문 요청이 쇄도하고, 신약 구입 문의가 줄을 잇고, 서로 손잡자고 아우성…….
“애송아.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상징을 바꾸겠다 약조하면 걸어서 비무대를 내려가게는 해주겠다.”
비무대 맞은편의 놈이 내 즐거운 상상을 방해했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계룡문의 깃발이 제물포 길드의 깃발과 비슷하다며 시비를 건 바로 그놈이다.
이름은…….
기억 안 했다. 어차피 한 페이지를 채우지 못하고 사라질 놈이니까.
“이거 참 미안하네. 나는 네가 엎드려 빌어도 걸어서 내려가게 해줄 생각은 없는데.”
내가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고 서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자,
놈이 으득거리며 거도를 움켜쥐었다.
“계집애처럼 생겨먹은 새끼가 주둥아리는 잘 놀리는구나.”
“그거 잘생겼다는 얘기인 거 알어. 그리고 너, 그거 성차별이다?”
생김새부터 멘트까지 딱 지나가는 조연1 답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조연1은 할 말이 없는지 쌍시옷과 지읒을 연신 지껄였다.
그리고, 시작 나팔과 동시에 조연1이 나를 향해 오우거처럼 달려들었다.
‘이렇게 뻔할 수가.’
곧은 직선으로 나를 향해 달려든 조연1이 내 어깨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노란 불꽃 휘감긴 도가 내 오른쪽 어깨를 향해 떨어지…려다가 절반으로 동강났다.
이어지는 타격음.
퍼버버뻐버버버뻐버버버뻐버버버버버뻑.
서른세 번의 연타로 대가리를 얻어맞은 놈이 김강산처럼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시작 나팔 소리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
“카운트 안 해요?”
넋을 빼고 서 있던 심판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카운트를 시작했다.
옛 고척돔의 중앙에 설치된 여덟 개의 비무대, 그 주위를 가득 메운 일만 오천 명 관중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모여들었다.
숨죽인 고요 사이로, 심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홉, 열! 승자는 계룡문의 서림입니다!”
풀썩 뛰어 내려오는 내 등 뒤로, 뒤늦은 환호가 쏟아졌다.
이제 시작이라고요. 이 사람들아.
***
“대표님! 저 하는 거 보셨죠! 저 빙환 성공했어요! 빙환!”
하하민이 세 바퀴 공중제비를 돌았다.
최지수는 마치 자신이 이긴 듯 싱글벙글했다.
“잘했다, 잘했어. 우리 하민이가 벌써 이렇게…….”
“시동 거는 데 8초 걸리던데. 실전이었으면 진작 대가리 박살났지. 상대방이 전사였어봐라. 그걸 그냥 두고 보겠냐? 술사 상대라 운이 좋았지. 거기다가, 마력 배분은 왜 이렇게 개판이야? 얼음벽에 쓸 마력까지 빙환에 쏟아부으면 어쩌자는 거냐고.”
“아니라고요! 그건 긴박함을 연출하기 위해서다가…….”
“내가 뭐라 했더라?”
“16강 못 올라가면 월매 따라 계룡성 2000바퀴요. 근데 솔직히 16강은 좀 심한데요… 대표님, 저 조금만 깎아주세요오요우요…….”
“시장 왔냐? 깎기는 뭘 깎아.”
랭킹전 첫날의 경기가 끝났다.
하하민은 첫 비무인 256강에서 조연2를 가볍게 이겼다. 그리고 128강에서 서문길드 소속의 나름 잘나가는 놈이라는 조연3에게 고전했으나 승리했다.
서문길드 따위.
우리 은영단 막내에 비하면 구울 앞다리 발톱만큼도 못하다.
그 뒤는 뭐, 무난했다.
최연소 32강 기록이라나. 계룡문도로써 이 정도는 기본이지.
“림이 형. 나는 좀… 이건 아닌 것 같애. 나야말로 깎아주라, 응? 으응?”
“야. 하하민이 16강이면 김강산 너는 당연히 8강이어야지.”
“어. 아니야, 형.”
“…너랑 얘랑 각성 경력 차이가 거진 십 년인데 자존심도 없냐?”
“어. 없어.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거 가져다가 어따 써.”
김강산도 세 판을 연달아 이기고 32강에 안착했다. 만약 다음 판을 이긴다면, 물론 이기겠지만, 16강 상대는 강원길드의 대지술사 철기수(鐵機手) 손범석.
작년 준우승자다.
유성길드의 화공자처럼 강원길드의 차기 길드장으로 언급되는 놈이기도 하고.
“비무하는 거 안 봤냐?”
“매번 내가 더 늦게 끝났는데 어떻게 봐.”
별 볼 일 없는 놈이던데.
“어떠냐, 림아. 네가 보기에는?”
“볼 게 뭐 있어. 당연히 우승은 정해져 있는데.”
“…너?”
“설마 나 못 믿냐?”
“아니, 아니지. 그런데 이번에는…….”
최지수가 나를 힐끔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 이번에는 오랜만에 길드장이 랭킹전에 참가했지.
길드장이 랭킹전에 참가하기는 12년만의 일이다.
1회 랭킹전에는 당연히 길드장들도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었다.
그러나 1회와 2회 모두 대한길드의 염화검제가 압도적으로 우승한 뒤로,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길드장은 랭킹전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규칙.
랭킹전에서 부상을 입어 성 방어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느니 어쩌니 하는 변명이 덧붙었으나.
-허허. 세상 모두가 결과를 아는데 굳이 마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
지남천의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뒤로 우승자는 바뀌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대한길드였다.
참마도(斬魔刀) 이석주.
염화검제의 아들로 태어나 분유 대신 마핵을 먹였다는 말이 돌 정도로 애지중지 키운다는 놈이 3회와 4회 백투백 우승을 차지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열린 5회 랭킹전의 최고의 우승 후보로 꼽히는 자는 지난 회 준우승자 철기수(鐵機手) 손범석도, 지난회 우승자 참마도(斬魔刀) 이석주도 아니었다.
“솔직히 사기 아니야? 길드장이 나오면 안 되니까, 전 길드장도 나오면 안 되지.”
“근데 길드 말아먹고 여기에 나오고 싶을까요. 저라면 쪽팔려서라도 못 나설 것 같은데.”
김강산과 하하민이 이야기하는 사람.
지난 블랙데이에 재앙과 괴물 무리, 혈귀단이라는 3연타에 부산성을 잃은 자갈치길드의 길드장 빙화신녀(氷花神女) 곽예린이 강원길드 소속으로 랭킹전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마치 망한 아이돌 멤버가 프로듀스1*1에 참가하듯이,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고 새 출발할 기회로 삼으려는 생각이겠지만…….
‘이번 랭킹전은 내가 접수할 예정이라.’
안 미안하고.
우승은 내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