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38화 (38/122)

38화. 이제 시작이라고. (3)

중년의 사내는 오른손의 검지와 엄지로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눈앞의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옅은 갈색의 커다란 반점이 사내의 왼손의 손등을 절반 이상 덮고 있었다.

여자는 계룡검룡의 암시를 유지, 강화하는 임무를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계룡에 내려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다.

여자가 희끗희끗한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했다.

-생각만큼 까다롭지 않더라고. 하긴, 최초 암시술을 흑암단주님게서 직접 시행하셨다니 말 다했지.

-내일 아침에 또 작업한다고요?

-으응. 일찍 나가야 해.

여자, 어둠술사 전혜미는 꽤나 들떠 있었다.

파천궁의 서울지부 요원이 된 뒤로 이처럼 큰 임무를 맡기는 처음이었다.

흑암단주가 직접 한반도까지 나올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는 장기 작전. 지부장에게 전해 듣기로는 궁주님께서 직접 명하신 작전이라고 했다.

이 일만 잘 끝내면 파천궁의 인정을 받을지도 모른다. 서울지부 따위가 아니라 북경의 본부로 발령받는 일도 꿈은 아니다.

전혜미의 팔이 사내의 등을 감싸 안고, 길고 새하얀 손가락이 사내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자기야. 이번 일 잘 끝나면, 그래서 만약에 내가 북경 본부에 들어가게 되면 말야….

사내가 전혜미의 손짓에 호응해 입고 있던 낡은 갑옷을 벗었다.

두 사람의 옷이 시멘트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곧 나무 침상이 거센 소리를 내며 삐걱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점차 따뜻한 숨으로 데워졌다.

사내의 까끌까끌한 입술이 전혜미의 뺨과 눈꼬리, 귓가에 차례로 닿았다. 따뜻하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에 전혜미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길고 축축한 숨을 내뱉으며 사내가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자기야. 우리 북경에 가면 말이야…….

사내는 나무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전혜미가 벗어던졌던 옷을 걸치는 광경을 무감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누님.

전혜미가 눈꼬리를 접으며 사내를 돌아보았다.

-한 번 더 하자고? 안 돼. 얘기했잖아. 동이 트기 전에 남서문으로 가야 한…….

사내가 새끼손가락에 낀 은반지를 뺐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눌린 반지가 납작하게 우그러졌다.

바로 그 순간.

스파앗.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검끝이 목을 파고들었다.

전혜미의 손에 들린, 전혜미의 검이, 전혜미의 목을 꿰뚫었다.

오래 전부터 걸어 두었던 암시.

[은반지가 우그러지면, 스스로 목을 찔러라]

피 흘리는 시체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 캡을 눌러 쓰고 검은 마스크를 썼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만, 원망한다면 어쩔 수 없지.’

***

[랭킹전의 둘째 날 동이 트면]

[5성벽의 남서문 앞으로 오라]

‘…진짜 귀찮아 뒈지겠네.’

나는 조용히 창문을 열고 8층 아래를 향해 뛰어내렸다.

허공답보로 몇 번 공중을 걷어차고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고양이 착지보다 더 고요한, 10점 만점에 100점짜리 착지.

파천궁의 인형놀이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나는 참여자이자 주인공으로 성실하게 인형놀이에 응하는 중이었다.

이게 의외로…….

‘소득이 있더라고.’

먼저.

어둠술사 새끼들의 낯짝.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가지고 온 놈은 대한길드 산하에 있는 E&G 상단의 상단주였다.

대한길드와 파천궁이 손을 잡은 건지, 대한길드에 파천궁이 첩자를 심어둔 건지는 앞으로 알아봐야 할 일이고.

몇 주에 한 번씩 얼굴이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접촉을 시도한 놈은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의 여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인간쓰레기들의 얼굴을 모두 단단히 기억해 놓았다. 이 인형놀이가 끝나면 그 악행에 걸맞은 대가를 선물할 예정이다.

그리고 또.

파천궁이 나에게 생각보다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날 내가 대가리를 서른 개는 넘게 땄는데도 마주치는 어둠술사 새끼들에게서는 별다른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더니 제 동료 목숨도 공평하게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이렇게 적당히 ‘쓸 만한 패’ 역할을 잘 수행하면 별다른 일이 터지지는 않겠다 싶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서울 나들이도 하고.

…인형놀이가 졸라리 귀찮아서 그렇지.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올려 쓴 채 옛 고척돔을 중심으로 지어진 특별 구역, 이른바 ‘불꽃성’의 높은 성벽을 뛰어넘어 5성벽의 남서문을 향해 느릿느릿 걸었다.

서울은 오랜만이다.

한… 40년? 45년?

한지혁의 할머니 댁이 이 근방이었다.

그때는 고척돔이 지어지기 전이었다. 할머니네 강아지를 데리고 자주 안양천을 산책했었는데.

엄마와 아버지라는 인간이 이혼한 직후 나는 원주에서 떠나 아버지라는 인간을 따라 할머니 댁에서 몇 년 간 살았다.

그동안 나는 왜 아버지가 그렇게 엄마를 때렸는지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똑같이 할머니를 때렸으니까.

한지혁은, 엄마와 살고 싶었다.

그러나 양육권 어쩌고 하는 복잡한 문제로 인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자신이 미안하다며 울었다.

‘참 울음이 많았어.’

결국 나는 엄마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라는 인간의 지갑에서 꺼낸 돈으로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원주로 갔다.

내가 여섯 살 때 일이다.

그때도 엄마는 펑펑 울었다. 내 몸에 생긴 멍과 흉터를 확인하고는 더 울었다. 그리고 다시는 나를 ‘그 새끼’에게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 말을 지켰다.

1차 블랙데이가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엄마와 함께 원주에서 살았으니까.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다섯 마리 세이렌의 몸통을 한꺼번에 갈랐다.

나는 널브러진 세이렌의 사체를 껑충 뛰어넘었다.

그때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지혁이 울면서 지났던 고척교는 중간이 박살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가볍게 바닥을 걷어차 안양천을 뛰어넘었다.

반쯤 무너진 빌라와 완전히 허물어진 다세대 주택 너머가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곧 태양이 올라올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지러운 골목 뒤로 서울 5성벽의 남서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익숙해진 소리가 머릿속을 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계룡검룡 서림이여]

…아직 약속 장소 아닌데. 거 참 성급한 놈일세.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혈도를 차례로 닫았다.

곧, 바늘로 뇌를 쑤시는 듯한 통증이 뒤통수를 파고들었다.

초점을 흐린 시선에 나를 향해 내밀어진 팔 하나가 들어왔다.

한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왼손의 손등을 덮은 옅은 갈색의 커다란 반점.

옷소매로 덮인 팔까지 이어지는…….

내가 알고 있는 팔이다.

30년 전, 저 손에 스테인리스 컵이 들려 있었다. 고소한 돼지갈비가 들어 있었던, 급식실 컵.

두통으로 괴로워하던 나에게 네가 그것을 가져왔고, 나는 짜증을 내며 치우라고 했다.

1차 블랙데이.

균열이 열리고, 내가 죽은 그날.

암시에 걸린 척하는 것도 잊은 채 나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차림새는 나와 닮아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깊이 눌러썼고, 코와 입을 검은 마스크로 가렸다.

그러나…….

쌍거풀 없는 찢어진 눈매.

눈가에 자글자글 주름이 생겼으나 저 눈은 분명 남지호의 그것이다.

그리고.

나를 향해 내민 남지호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은색의 반지.

‘남지호, 네가 대체, 왜 여기에…….’

하마터면 입을 열어 그렇게 물을 뻔했다.

내가 겨우 정신을 붙든 것은 머리를 찌른 날카로운 통증 덕택이었다.

통증 사이로, 목소리가 울렸다.

귀가 아닌 뇌를 통과해 들어오는 목소리는 남지호의 그것이면서도 남지호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일 결승전의 승자가 결정되는 순간]

[네 최대한의 능력으로 염화검제를 공격하라]

***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거세게 휘날렸다.

발이 땅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동쪽 하늘이 환했다.

낮게 깔린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아침 해의 빛살이 무너진 빌라와 허물어진 다세대 주택 위로 반짝이며 쏟아졌다.

한 시간 후면 랭킹전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쯤 최지수도 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겠지.

또 안달복달 애를 태우고 있을 최지수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어쩌면 김강산이 불꽃성을 헤집고 있을지도 모른다.

걱정을 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랭킹전에 불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나는 기감의 그물을 활짝 펼치고 남지호의 기척을 좇는 중이다.

남지호는 나에게 암시를 걸자마자 어둠속성의 능력인 은신술을 사용해 기척을 숨겼다.

그림자 사이로 스며든 놈의 희미한 기척을 좇아 서울 5성벽을 타넘고 골목 사이사이와 우거진 수풀을 통과했다.

놈은 우그러진 파란 철문이 달린 판잣집에 잠시 머물렀다가 곧 다시 나와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의 술래잡기 끝에 놈이 도착한 곳은 서울5성 외곽의 허물어진 3층짜리 빌라였다.

빌라 안쪽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남지호와 마찬가지로 은신술을 쓴 놈들.

예상대로 패거리가 있다.

어둠속성들의 패거리.

남지호의 등장부터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파천궁의 암시는 차근차근 접(椄)의 단계를 밟아가는 중이었다. 어디까지나 먼 미래를 향한 포석으로서.

‘근데 갑자기 염화검제 공격을 지시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첫 번째 지시였다.

대한길드에 대한 파천궁의 단순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혹은, 계룡문과 대한길드가 적이 되기를 바라는 수작일지도. 중국 놈들은 원래 이이제이(以夷制夷)에 환장하니까.

하지만 파천궁이 이를 위해 나에게 암시를 걸었다고 보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때 내가 죽인 놈들이 몇인데. 고작 이렇게 낮은 수의 이이제이를 위해 그 희생을 치렀을 리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지호가 어둠속성이라고?’

거악 중의 거악에, 분리수거도 안 되는 인간쓰레기.

옛 시대였다면 연쇄살인마가 되었을… 그런 놈들.

어린 한지혁이 엄마를 찾아 원주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살던 반지하 방의 위층이 남지호네 집이었다.

엄마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는 동안 나는 집 근처의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미끄럼틀을 오르내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나에게 먼저 남지호가 말을 걸었다.

-너 우리 집 아래층으로 이사 왔지? 혼자 놀지 말고 같이 놀자!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점점 깊어졌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없다고 나를 놀리던 애새끼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 것도 남지호였다.

-아버지? 시발놈들아! 그딴 거 나도 없어! 아버지가 없다는 게 어떻다고?

남지호와 나는 놀이터 구석에 피떡이 되어 드러누운 채 킬킬거리며 웃었다.

남지호의 동생 남지윤이 우리 엄마에게 그날 일을 일러바쳐 나중에 된통 혼이 났지만.

이후 중학교 때 한지혁의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놀림을 받을 때에도…….

내가 그 애새끼 중 하나를 두들겨 패 학폭위가 열렸을 때 반 애들에게 부탁해 그 애새끼들이 평소 나를 괴롭혔다는 내용의 진정서인지 뭔지를 한가득 모아 담임에게 제출한 놈이다.

덕분에 나는 일주일간 교내봉사만 받고 끝났다.

그날 아마 나는 좀 울었던 것 같다.

남지호는 한지혁에게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이었다.

친구이고, 동생이고, 때로는 형이기도 했다.

그 남지호가 어둠술사가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는 분명…….

‘엄마의 반지였어.’

베트남에 계신 외할머니가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향하는 엄마의 손에 끼워줬다는, 그, 엄마의 반지.

2층 창문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벽에 매달린 채 기척을 죽이고 나무판자를 덧대어 놓은 창문에 눈을 가져다 댔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 다섯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옅은 긴장과 어렴풋한 흥분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길다란 쇠채찍으로 어깨부터 허리까지 칭칭 감은 젊은 여자가 다부진 어조로 말했다.

“드디어 내일이 결행이네요.”

남지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결승전이 끝나면 암시에 걸린 검룡이 염화검제를 공격할 거다. 검룡이 일격으로 염화검제를 죽이지야 못하겠지만 우리가 준비한 바를 결행하기에는 충분한 혼란이 생길 거야.”

손가락 관절을 꺾어 딱, 딱, 소리를 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남지호를 응시했다. 오른 어깨에서 손목까지 긴 칼자국이 선명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개죽음이 될지도 모르지.”

칼자국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남지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칼자국에게 꽂혔다.

“신재운. 목숨이 아까우면 처음부터 산을 내려오지 말았어야지.”

신재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런 말이 아니라고, 지호 형. 나도 형만큼, 그 새끼한테 복수하고 싶다고. 아직도 그날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모습이 날마다 꿈에 나와. 나는 다만…….”

남지호가 신재운의 말을 가로막았다.

“처음 우리 혈귀단이 창설되었을 때 우리가 했던 맹세를 기억하나?”

남지호의 말에,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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