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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39화 (39/122)

39화. 내가 기억하는 (1)

‘혈귀단이었군.’

나는 숨소리와 기척을 모두 지운 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남지호의 목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남지호의 목소리는 내 기억보다 낮고, 훨씬 거칠었다.

그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말하는 녀석이 아니었다.

-알아. 지혁이 네가 막 사람 때리고 그러는 애 아니잖아. 다른 애들도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때, 학폭으로 잔뜩 쫄아 있던 나에게 남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머니! 이 샌드위치 너무 맛있어요. 저 이거 사먹으려고 학교 다니잖아요. 이거 이름이 뭐예요?

-그거? 반미가 지호 입에 맞나 보네? 아휴우. 지혁이는 냄새가 싫다고 절대 안 먹는데. 이쁘게도 먹네.

-완전 맛있는데요?

내 엄마한테 하는 말은 어쩜 그렇게 사근사근했는지.

나는 매번 남지호처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남지호는….

“대살육 이후 우리가 어떻게 살았지? 각자 소중한 이를 잃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지. 그 대살육의 흑막이 염화검제라는 사실을 알고 나는 그와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겠다고 피로 맹세했었다. 그 맹세를 지키려 내 손을 더럽히고,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해치며 전직했다.

그동안은 혈왕의 뜻에 따라 적당한 시기를 기다렸으나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산을 내려올 때 너희도 내 마음과 같은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공포 앞에서 복수심을 누그러뜨리고 목숨을 아까워한다면…….”

대살육?

흑막?

전국 곳곳에서 대살육을 일으킨 것은 미친 어둠속성 놈들의 집단, KKK단이었다.

염화검제는 그 KKK단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대한길드는 그 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명실상부 한반도 최고의 길드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KKK단의 살아남은 찌꺼기들이 모인 곳이 혈귀단…….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남지호의 말은 내가 알고 있던 바와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살육이 먼저 있었고, 그 흑막이 염화검제이고, 복수를 위해 전직했다고?

‘아니, 아니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어냈다.

거악 중의 거악인 어둠속성 놈들이다.

악인 치고 혓바닥 짧은 놈이 없는 법. 악행에도 모두 이유를 붙이는 데 선수인 놈들이다.

얼마 전 가기석만 해도 그랬다. 제 동생이 겪은 끔찍한 일이, 가기석에게 악행을 저지를 권리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 말을 지껄인 새끼가 남지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나는 놈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터.

‘…남지호를 믿고 싶은 거겠지. 어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계룡문을 설립한 직후 원주로 향했었다.

보름 넘게 소식을 수소문했으나 엄마의 소식도, 남지호의 소식도 알 수 없었다.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다면, 설마 엄마도……?’

어둠속성 놈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라도 남지호가 살아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한지혁의 엄마 역시 살아 있다면. 내 엄마가 어둠속성으로 전직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떤 광경을 보고 싶은지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높게 떠오른 태양빛이 눈을 찔렀다.

눈이 부셔, 나는 숨을 삼켰다.

***

“림아. 네 차례다.”

“…어?”

“대표님! 정신 차리세요!”

“…아아. 그래.”

나는 최지수와 하하민에게 떠밀려 터벅터벅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정신없도록 바쁜 아침이었다.

파천궁의 인형놀이에 참여하러 갔다가 예상치 못하게 남지호를 마주쳤다.

남지호는 파천궁 소속이 아니었다.

어떻게 내 암시를 알고 끼어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놈은 혈귀단의 단원이었다.

대살육의 주범, KKK단의 후신이라고 알려져 있던 거악 집단.

놈들의 은신처를 떠나 불꽃성으로 돌아온 내가 곧바로 향한 곳은 계룡문의 숙소가 아닌, 염화검제 이정용의 처소였다.

이정용은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곧 내 요청에 따라 주위를 물렸다.

-검제님을 습격하려는 테러범들이 저에게 암시를 걸려고 시도했습니다. 결승전이 끝나는 순간 제가 암시에 걸린 척 검제님을 공격할 테니 대비하고 있다가…….

그는 줄곧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네, 검룡.

-검제님, 저한테 빚지신 겁니다?

-대한길드의 구호는 알고 있겠지?

-그럼요. ‘대한은 언제나 빚을 갚는다.’ 그 말 모르면 한국인 아니죠. 근데…….

-왜 그런가.

-그거 얼음과 불의 노래 표절인 건 아시죠? 라니스터 가문의 가언이잖아요.

-…젊은 사람이 식견이 넓군.

줄곧 여유롭던 이정용의 이마가 살짝 찌그러졌다.

물론 그것으로 저 눈꼴신 새끼한테 좋은 짓을 해줘서 쓰리던 속이 상쾌해지기는 어려웠으나.

이로써 밑밥은 다 깔아 두었다.

은신처에 쳐들어가 놈들을 모두 제압할까 망설였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그 편이 더 나은 선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빚을 잊지 않기로 유명한 이정용에게 빚을 지울 기회.

더불어, 남지호의 동료들을 남의 손으로 싹쓸이할 기회.

이제 오늘 밤에 남지호의 집으로 가서 남지호를 잡아 오기만 하면…….

나머지 혈귀단 테러범 놈들이 계획대로 이정용을 공격해주기만 하면, 살아남은 남지호는 배신자 취급을 받게 되겠지.

만약 놈들이 테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수단을 동원해야겠지.

일단 남지호가 혈귀단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복수를 위해 전직한 독한 새끼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는 이상 나를 따라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순순히 따라오지는 않겠지만…….

‘말 안 들으면 팔다리 좀 잘라내야지, 뭐. 분근착골도 하고, 당문의 독환도 그대로 남아 있으니깐.’

비무대 반대편에 선 놈이 무어라고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림이 혀어어엉----!!!!!”

콰아아!

반대편 놈이 쏘아보낸 얼음창이 내 뺨을 스치고 비무대 바닥에 처박혔다.

뒤이어 날아온 얼음화살이 검막에 가로막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숨겨둔 한 수는 있구나, 애송아!”

이 새끼가. 사람 중요한 생각 하는데 방해하고 지랄이니.

놈이 기합을 내지르며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수증기가 되어 흩어진 물이 공중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간 자체를 얼리는, 공빙(空氷).

중급 괴물에게는 꽤 효과적인 메즈 기술이지만, 받쳐줄 마력이 없으면 강도가 떨어지기에 오히려 얼음창만 못하다.

호신강기로 에워싸인 나를 붙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퍼버벅!

내가 휘두른 월영검의 검날에 얼어붙은 공기가 찢겨나갔다.

이를 악문 놈이 다시 팔을 앞으로 뻗었다.

길고 두꺼운 두 자루의 얼음창이 공기를 찢으며 나를 향해 쇄도하다가,

콰아아!!!!

연속으로 쏘아낸 검강에 부딪혀 박살났다.

그리고

“져, 졌습니다! 졌습니다!”

…어? 왜 월영검이 이 새끼 목에 닿아 있지.

하마터면 죽일 뻔했네.

그러게 사람이 생각 좀 하자는데 왜 끼어들어, 끼어들긴.

“림아. 방금 상대한 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냐.”

“어? 그거 알아야 해?”

“…아니다. 수고했다.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최지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나는 터벅터벅 걸어 계룡문의 자리로 돌아왔다.

세 번째 비무대에서 김강산이 작년 준우승자 손범석을 상대하고 있었다.

비무대 곳곳이 움푹 파여 난장판이었다.

검과 도가 부딪힐 때마다 비무대가 박살났다.

튀어오른 자갈과 흙쪼가리들이 최지수가 세운 석벽과 하하민이 세운 빙벽에 가로막혀 팅 팅 튕겨 어딘가로 또 날아갔다.

최지수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염화검제와 독대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도 최지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김강산과 하하민도 마찬가지였고.

“림아. 대체 아침부터 왜 그리 얼타고 있냐. 산책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뭘? 아무 일도 없는데?”

최지수가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비무대 위의 김강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아무 일도 없다.

서림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서림이다.

계룡문의 대표. 은영단 단장. 계룡을 지키는 계룡검룡.

그리고 나는…….

여섯 살에 죽은 박승주였고,

네 살에 죽은 김은명이었고,

열아홉에 죽은 한지혁이었으며,

일흔여섯에 죽은 검황이었다.

그건 모두 나다.

내가 그 모든 삶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 삶에서 만난 많은 이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으므로.

소화와, 표와, 남지호와, 엄마와,

최지수와, 김강산과, 하하민과, 정하영과, 모든 계룡문과, 계룡성민들.

이미 소중한 이들을 많이 잃었다.

다시는 잃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절대로, 어떻게 해서라도…….’

그러려면 먼저,

…계룡문이 강해져야겠지.

대한길드 따위, 파천궁 따위를 염려할 필요 없도록.

근데 김강산 저 새끼는…….

“고작 저 정도 놈한테 왜 저리 쩔쩔매? 역시 훈련이 부족…….”

“그거 아닙니다, 대표님! 아니라고요!”

하하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 정도면 아주 잘 싸우고 있는 거다. 상대방이 작년 준우승자잖냐.”

“그래봤자 애송이인데.”

나는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쫓아내며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김강산의 상대 손범석은 철기수(鐵機手)라는 별호답게 솜씨가 상당했다. 김강산은 그저 대응하기에 급급했다.

…저 멍청이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면 필패다.

내 흐름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래도 어렵겠구나.”

“그래도 16강이면 많이 올라온 거죠! 16강에 세 명이나 올라온 데는 우리랑 대한길드밖에 없다고요.”

최지수와 하하민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나는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곧 진기를 담은 내 목소리가 비무장의 소음을 뚫고 울려 퍼졌다.

“이 띨빡아! 내가 항상 뭐라고 했냐!”

***

콰아아!!!

발을 딛고 있던 비무대의 바닥이 푹 가라앉았다.

김강산은 구덩이의 벽을 향해 다급히 도를 뻗었다. 단단한 바위에 박힌 도를 지지대 삼아 몸을 솟구치는 순간,

발밑에서 파낸 흙이 수십 개의 검으로 변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마력을 집중하자 김강산의 주변으로 원통형의 화염벽이 생성되었다.

날아들던 검이 백색의 불길에 녹아 원래 상태였던 흙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강산이 도를 움켜쥐고 손범석을 향해 쇄도하려는 찰나.

스파앗!

한 발 빠른 공격이 그를 가로막았다.

김강산은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구친 철창(鐵槍)을 피해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에 솟아났던 철창이 순식간에 솟아올라 등 뒤에서 내리꽂혔다.

‘시발, 존나 빠르네!’

재빨리 허리를 굽히자, 등을 스치고 날아간 철창이 굉음과 함께 바닥에 내리꽂혔다.

강철로 만들었다던 비무대를 뚫고 들어간 철창은 잠시 후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가, 수십 자루 철검으로 변해 김강산을 향해 날아들었다.

김강산은 정신없이 도를 휘둘러 날아드는 철검을 쳐냈다. 마력을 집중할 틈도 없었다.

서림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 띨빡아아아! 내가 항상 뭐라고 했냐아아아아!”

서림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는 단어.

그게 무엇인지 김강산은 잘 알았다.

-선빵필승이지. 형이 맨날 하는 소리가 그거잖아. 선빵치는 놈이 이긴다.

-잘 아네. 그런 놈이 왜 이렇게 밍기적거려?

-형은 쉽지. 나라고 늦게 움직이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악!

-한 발이 어려우면 절반이라도. 절반이 어려우면 그 절반이라도. 어쨌든 상대한테 휘말리면 안 된다고, 멍청아. 네 페이스로 끌어들여야지.

-내가 어떻게 형을? 괴물도 아닌 거대괴수… 아, 아프다고!

서림이 쯧쯧거리며 검집을 휘둘렀다.

김강산은 자신을 향해 기기묘묘한 각도로 날아오는 검집을 피해 몸을 요리조리 돌렸…….

퍼버버벅.

으나 회피기동에 실패했다.

-또, 또! 막기에 급급하지 말고 네 공격을 하라고.

-이렇게 처맞는데 어떻게 공격을 하냐?

-그러면 계속 처맞든지.

퍼버버벅.

퍼버버버버버버벅.

김강산은 서림이 자신을 위해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알았다.

김강산 역시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실제로 강해지고 싶었다.

김강산은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서림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멍하니 손 놓고 지켜보는, 그런 일.

서림이 연신 검집을 휘둘렀다.

검집의 움직임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멈췄다가 내리꽂히고, 오른쪽으로 휘둘렀는데 어느새 왼쪽에 와 있었다.

김강산은 어느새 바닥에 널브러졌다.

서림이 그런 김강산을 툭 툭 찼다.

-좋게 말할 때 일어나라, 응?

-…이미 좋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는데요, 형아.

-어디 제대로 밟아 줄까?

서림이 무서운 기세로 발을 들어올렸다.

콰앙!

발바닥 아래에서 가루가 된 시멘트 조각이 튀어올랐다.

김강산은 풀썩 뛰어올라 도를 쥐었다.

-혀엉! 나 진짜 죽는다고!

-응.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네.

특훈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련이 거듭된 지 한 달째.

김강산은 드디어 서림이 검집에서 검을 빼내게 하는 데 성공했다.

흰 검기가 김강산의 오른 어깨를 지났다.

동강난 어깨가 바닥에 널브러지고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김강산은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도는 어디에?’

잘려나간 오른손은 여전히 도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김강산의 발이 그 팔의 절단면을 거세게 밟고, 김강산의 왼손이 튕겨 올라온 도를 재빨리 움켜쥐었다.

서림이 웃는 듯 우는 듯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정도 끈기는 있어야지. 그래야…….

…살아남지.

서림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김강산은 서림이 내뱉지 않은 단어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김강산은 가끔 서림이 악몽을 꾸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조금만 더 버텨라. 조금만 더. 표야, 제발, 표야. 눈 좀 떠봐라, 표야……!

그 이름은 종종 최지수가 되고 종종 하하민이 되고 종종 정하영이 되고 또 종종 자신이 되었다.

김강산은 서림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서림이 어째서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앞서 달려나가 검을 휘두르는지도.

‘…강해져야 해. 더욱, 더더욱, 훨씬 더, 강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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