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내가 기억하는 (2)
김강산이 다급하게 도를 휘둘러 철검 하나를 쳐냈다.
뒤이어 왼발을 뒤로 물리며, 허벅지를 노리고 날아오는 철검을 회피했다.
어깨를 비틀어 또 하나를 피하고 도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목줄기를 향해 철검이 쇄도했다.
피할 수 있다.
허리를 굽혀 피한다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결국 패배할 것이다.
이렇께 계속 공격을 회피하는데 급급해서는 절대 이기지 못한다. 절대로.
‘림이 형이라면……?’
김강산은 도를 움켜쥐며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퍼억!
목줄기를 겨눈 철검이, 들어올린 왼팔에 틀어박혔다.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림이 형이라면!’
왼손 손목이 박살났다.
그 대신, 비무가 시작되고 10분 동안 한 번도 좁혀지지 못한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손범석이 다급하게 강철벽을 세워 김강산의 돌진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화르륵!
불길이 도를 휘감았다.
파르스름한 빛을 띠는 백색의 불꽃이 강철벽에 부딪히는 순간, 단단하던 강철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
“청염! 벌써 청염을 만들어내다니!”
무등길드의 무등쌍협 중 우협 유재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탄을 내뱉었다.
“이거, 이거… 강원길드의 간판이 썩 위험해 보이는데?”
제물포길드의 해룡의선 원찬우가 유들유들하게 말을 받았다.
속에 담긴 내용과 달리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비무대 위에서는 계룡문의 김강산이 불길이 타오르는 도를 휘둘러 4회 랭킹전 준우승자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술사와 전사의 싸움에서 거리가 좁혀졌다는 것은 승부가 결정되었다는 의미였다.
지난겨울에 괴물 소탕 작전을 함께했던 지남천이 보기에도 김강산의 성장은 눈부셨다.
백염을 만들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들었는데, 벌써 청염이라니.
아직 흰 불꽃 속에 파르스름한 빛이 돌 뿐이다.
그러나 일단 다음 경지에 돌입한 이상, 완전한 청염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정일형 그 녀석은 아직도 백염이거늘…….’
지남천이 가볍게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VIP석에 앉아 비무대를 내려다보는 길드장들의 안색은 천양지차였다.
강원길드의 해동검(海東劍) 은아라는 파리하게 질린 채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손바닥에 맞닿은 나무 의자에 하얗게 성에가 끼었다.
“계룡문의 선전이 대단하군요. 16강에 세 명, 8강에 두 명이라니. 이거 우리 길드들이 체면을 단단히 구겼습니다.”
“뭐라고? 지금 내 서문길드 씹는 거요?”
“그럴 리가요. 내가 언제 서문길드의 참가자가 16강에 고작 한 명 오르고 8강에는 아무도 못 올랐다고, 그걸 길드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말하기라도 했습니까?”
“이 새끼가! 야! 원찬우 이 새끼야!”
서문길드의 무적권왕(無敵拳王) 박민교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삿대질을 했다.
그 대상인 제물포길드의 해룡의선(海龍醫仙) 원찬우는 어깨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비무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십 년 넘게 앙숙인 둘이 마주치면 언제나 생기는 일이었다.
“보는 눈도 많으니 그만들 하시게.”
지남천이 둘을 말렸다.
화성길드의 아수라로 불리는 현진현이 박민교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혔다.
“16강에서 철기수가 패하다니요. 이로써 강원길드는 아무도 남지 못했네요. 아, 빙화신녀가 남았군요. 하지만 설마 해동검께서 빙화신녀가 강원길드 소속이라고 여기시지는 않겠지요?”
혀를 차며 빈정거리는 해룡의선을 향해 해동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천 앞바다에 백호가 나타났을 때 송도성이 아니라 의선 의 아가리를 찢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분께서도 저를 꿀꺽 삼켰다가 아이쿠, 시끄러워. 하면서 뱉으시더군요.”
그때껏 고요히 앉아 있던 염화검제 이정용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불패도께서는 계룡문과 지척에 있으니 잘 아시겠지요. 계룡문의 이름으로 최근 벌어진 일들에 혹 과장이 섞이지는 않았습니까.”
“최근 벌어진 일이라 하면…….”
지남천은 바로 대꾸하지 않고 대답을 흐렸다. 염화검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백호를 소멸시킨 일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괴물 소탕?’
길드 연합이 생긴 뒤로 계룡문과 같은 신생 조직이 이토록 크게 이름을 떨친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길드장들이 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불패도는 길드장들의 입에 계룡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썩 즐거우면서도 조금 걱정스러웠다.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염화검제라면…….
염화검제가 가볍게 웃었다.
“불패도께서는 계룡검룡이 퍽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젊은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요.”
지남천은 염화검제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예순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도록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뾰족하게 솟은 콧날이었다. 날카로운 콧날 아래 얇은 입술이 깊은 호선을 그렸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과연 즐거운 일이군요.”
해룡의선이 불쑥 말꼬리를 잡았다.
“염화검제께서는 이번에도 대한길드가 우승하리라 확신하시는 모양입니다?”
염화검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웃음이 조금 짙어졌을 뿐.
이정용은 자신의 아들, 이석주의 우승을 확신했다.
어렵게 얻은 각성자 아들.
자신이 올린 성을 물려받아 더욱 번창하게 만들 후계자.
염화검제는 대기업의 총수로 키워져 기업을 승계 받았다.
균열이 생겨나고 세상이 뒤집어졌으나 그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각성자가 되었으므로.
그는 그 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투자해 대한길드를 만들고 서울성을 쌓아올렸다.
그는 바뀐 세상이 아주,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는 한반도 최대 길드의 길드장이자 서울성의 성주였고, 성곽 안의 왕이었고, 명실상부 한반도의 최강자였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그의 27번째 아내가 낳은 96번째 아들이 각성했을 때, 그의 단 하나 아쉬움마저 사라졌다.
염화검제는 바뀐 시대에 맞춰 아들을 철저하게 무인으로 키웠다.
검술의 명인과 권술의 달인을 스승으로 모셨고, 연구소의 연구에 따라 어렸을 적부터 마핵을 먹여 마력을 높였다.
아들 이석주는 천재였다.
이석주는 열 살 때 대한길드의 훈련소장을 꺾었고, 스물의 나이로 3회 랭킹전에서 우승했다. 스물넷에 4회 랭킹전에서 우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스물여덟이 된 지금, 쟁쟁한 자들이 모두 모인 대한길드에서 이석주보다 강한 각성자는 이제 염화검제, 그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지.’
3회와 4회에 우승한 이석주가 이번에도 우승을 거머쥐는 것은 전혀 놀라운 소식도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다. 적절한 적수가 있어야 그 무위가 제대로 드러나는 법.
다른 길드장들, 특히 서문길드의 무적권왕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무릅쓰고 전 자갈치 길드의 길드장 빙화신녀(氷花神女) 곽예린의 참가를 허가한 이유는 그래서였다.
빙화신녀를 얕잡아 보아서가 아니다. 그 실력을 잘 알기에, 이석주가 빙화신녀를 누르고 우승하리라 확신했다.
계룡검룡 역시 마찬가지. 걸리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아주 높은 수준의 은신술을 익힌 듯하다고 합니다. 탐색술의 결과, 그자에게서는 마력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계룡에 파견한 정보원들이 가져온 보고는 조금 기묘했다.
-능력 역시 밝혀지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계룡검룡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대지전사. 빙결전사. 혹은, 어둠속성이라는 소문마저 돌았다.
염화검제는 이번 랭킹전에서 그 정체와 능력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계룡검룡은 그의 아들과 같은 세대.
오히려 나이는 검룡이 더 어리다.
‘혹여 걸림돌이 된다면 미리 싹을 잘라내는 일도 필요하겠지.’
염화검제는 가벼운 웃음을 머금은 채 비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다짜고짜 자신을 찾아왔던 검룡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검룡은 테러범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그 암시에 따라 자신을 공격하겠다고 했다.
검룡의 말대로, 본진을 숨긴 혈귀단의 덜미를 잡을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동시에, 검룡을 혈귀단과 한패로 몰아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면 검룡은 그저 순진해 빠진 무인(武人)일 뿐, 정치가는 아니다.
전투에서는 승리해도 전쟁에서는 끝내 유방에게 패배한 초패왕 항우처럼.
그러나…….
‘…그럴 리가 없지.’
아마 검룡은 일이 그렇게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비무대 위의 심판이 막 김강산의 승리를 선언했다.
김강산이 피가 뚝 뚝 흐르는 왼손을 번쩍 들어올리다가 비무대 위로 뛰어오른 검룡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뒤이어 최지수와 하하민이 김강산을 양쪽에서 부축하고 비무대를 내려왔다.
그 뒤로, 우레와 같은 환호가 쏟아졌다.
결승까지 올라오는 동안 검룡과 계룡문이 보여준 무위는 과연 놀라웠다.
그러나 이 관중들이 누구인가.
지방에서 랭킹전을 보기 위해 올라온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서울성의 성민들이다. 대한길드가 지켜주는, 바로 자신, 염화검제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이들.
‘…이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는가.’
염화검제는 여론의 힘을 잘 알았다.
한 개의 입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 개의 입은 없었던 일도 사실로 만들 수 있고, 백만 개의 입은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십여 년 전 서울성에 극심한 전염병이 돌았을 때 무리해서 ‘그 작전’을 실행했던 이유도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지금의 대한길드와 서울성, 그리고 길드 연합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렸다.
그 민심은 지금 계룡을 향해 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계룡검룡이라는 이름을 알지도 못했던 무지렁이들이 모두 계룡을 칭송하고 있으므로.
재앙에 버금가는 괴물을 해치웠다는 소문과 더불어, 일반인과 각성자를 동등하게 대한다는 계룡성의 성칙에, 열네살까지 각성하지 못한 보육원의 고아 출신이라는 서사까지 더해져 검룡은 5차 랭킹전의 라이징 스타로 떠올랐다.
‘굳이 민심을 거스를 필요는 없지. 어차피 사람들의 마음이란 쉽게 불타오르는 만큼 쉽게 사그라질 것이니.’
그리고 잠시 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함성이 고척홈을 뒤흔들었다.
-잘생겼다, 용용아!!
-검룡님!!! 여기 봐주세요!!!!
-계룡문 멋있다아아아!!!!!
-우승해버려, 계룡검룡!
계룡검룡이 오늘의 마지막 경기, 준결승전을 위해 첫 번째 비무대로 올라서고 있었다.
“검룡의 인기가 뜨겁군요.”
해룡의선이 놀란 척 눈을 크게 뜨고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지남천은 그렇군요, 하고 대꾸하며 비무대를 내려다보는 염화검제의 얼굴을 잠시 흘깃거렸다. 그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대로 검룡이 우승을 차지하면 정성껏 준비한 랭킹전의 열매를 굴러들어온 검룡에게 넘겨주게 될 텐데.’
-망한 길드의 길드장이요? 대한길드 도련님? 에이, 두고 보시라니까요.
검룡은 자신만만했다.
지남천이 지금까지 본 검룡은 이루지 못할 일을 이룰 수 있다 말하는 이가 아니었다.
혹자는 그를 두고 겸손을 모른다고 평할 것이다. 자신 역시 그를 직접 보기 전에는 그렇게 여겼다.
그러나 그와 가까워진 후로는…….
듣도 보도 못한 일을 해내고, 믿을 수 없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운다.
‘…설마 정말로 대한길드 외의 인물이 우승하는 모습을 보게 되려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지남천은 자신이 검룡의 우승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비무대를 향한 지남천의 시선에, 홍코너에서 걸어 나오는 빙화신녀(氷花神女) 곽예린의 모습이 들어왔다.
성을 잃고 길드원이 뿔뿔이 흩어졌다 해도 빙화신녀 자신의 힘이 줄어들었을 리는 없다. 여덟 길드장의 실력은 압도적인 염화검제와 조금 떨어지는 무등쌍협을 제외하고는 모두 엇비슷했다.
‘검룡. 나와 비무를 했을 때 그대로라면… 아무리 자네라도 어려울 걸세.’
우승. 그러려면 먼저 결승에 진출해야 한다.
대한길드에서 대진표를 이렇게 편성한 이유는 분명하다.
검룡과 빙화신녀를 붙여 기운을 소모하게 만들고, 결승에서 이석주와 붙게 만들려는 의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어깨가 잘려나가거나 무릎이 부서지는 부상은 랭킹전에서 흔하게 발생했다.
큰 부상 없이, 기운을 보전한 채로, 승리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군.’
침음을 삼키는 지남천의 귓가에 시작을 알리는 긴 나팔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