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41화 (41/122)

41화. 걸어온 길 (1)

챙!

월영검의 검날이 곽예린의 빙환과 충돌했다.

다른 물속성 각성자들과 달리 물통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바닥의 흙에 섞인 물 분자, 공중을 떠다니는 수증기마저 다룰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빙결술사.

그가 사용하는 주무기는 지름 30센티 남짓한 도넛 모양의 빙환.

분명 얼음이지만, 얼음이라고 부를 수 없다.

월영검과 부딪힌 빙환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곽예린의 손으로 되돌아갔으므로.

만년한철, 그 이상으로 단단하다. 곽예린이 몇 달에 걸쳐 만들어냈다는 극한의 얼음. 그리고 그것을 생성한 곽예린은…

‘과연 1세대 각성자라 이건가.’

나보다 조금 더 큰 키.

두상이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회색 머리 아래 드러난 두 귀에는 두꺼운 은색 링이 달랑거리고 있다.

상당한 미인이다.

나이가 50에 가깝다고 들었는데 절대로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느껴지는 마력이 어마어마하다.

마력만으로는 지남천 이상이다.

나는 5미터 앞에 선 곽예린을 주시하며 기운을 끌어올…

“자기야. 자기 진짜 잘생겼다. 나 자기한테 반한 거 같애. 나 심장이 왜 이렇게 격렬하게 뛰지?”

저 나불거리는 아가리만 제외하면 아주 그럴듯해 보이겠는데 말이지.

“나이 생각하시죠. 협심증 조심하세요.”

“어머, 어머. 자기 너무한다. 나 어디 가서 스물다섯이라 해도 먹히거든?”

“네. 먹히는 데 가서 많이 파세요. 저는 안 삽니다.”

곽예린이 툴툴거리며 빙환을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빙환이 거세게 회전하며 다시금 나를 향해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빙환을 막으려 월영검을 들어 올린 순간, 빙환이 목이 아닌 어깨를 향해 급격히 방향을 바꾸었다.

다급히 어깨를 비틀어 회피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채우고, 이내 하얗게 빛나는 강기의 구슬…

이 형성되기 직전,

허공을 한 바퀴 돈 빙환이 내 등줄기를 노리고 날아드는 파공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자기야, 피해!”

“그쪽은 피하지 마시죠!”

“싫은데!”

빙환을 회피하려 허리를 잔뜩 굽히려는 순간.

쩌쩌적, 소리와 함께 눈앞의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공간 자체를 얼리는 빙공(氷空).

아까 그놈이 시전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빙공이다.

호신강기를 뚫고 오한이 내 몸을 침투했다.

얼어붙은 등줄기를 향해 빙환이 쇄도했다.

가까스로 일으킨 산매진화가 얼어붙기 시작한 몸을 녹였다.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빙환이 다시 비무대 위를 한 바퀴 돌아, 이번에는 정면으로 날아왔다.

“대단해! 이걸 파훼하다니!”

곽예린이 깔깔대며 손을 휘저었다.

동시에, 세 개의 얼음송곳이 정수리와 오금, 명치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근거리.

나는 호신강기를 최대로 끌어올렸다.

콰아아!!

깨져나간 얼음 조각이 다시 공중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번에 송곳의 형체가 되어 내 몸에 충돌했다.

강기의 벽을 뚫고 충격이 전해질 정도로 단단한 얼음.

극성으로 끌어올린 호신강기를 뚫어낼 수 있는 강도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호신강기를 계속 유지하다가는 내 내력이 남아나지 않을 터.

‘빨리 끝내야겠군.’

타닷.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급커브로 회전한 빙환이 허리를 반으로 가를 기세로 등 뒤에서 날아들었다.

이건 호신강기로 막을 수 없다.

너무 차갑고, 너무 단단하다.

의지에 따라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왼손에 하얗게 맺혔다.

나는 쇄도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왼손을 뒤로 뻗었다.

그 순간, 내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의 수증기를 움직여 빙환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는 것은 진작 눈치챘다.

‘허리가 아냐. 공기의 흐름을 볼 때….’

급격히 방향을 바꾼 빙환이 내 몸을 타고 돌아 왼쪽 어깨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

권강(拳剛)과 빙환(氷環)의 격돌.

격렬한 폭음과 함께 빙환이 비무대 밖으로 튕겨 날아갔다. 관중석 상단이 박살나고, 시멘트와 철근이 뒤엉켜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관중들의 환호와 비명이 뒤섞였다.

그 사이로, 나는 쇄도했다.

“제법이야! 역시 마음에 들어! 용용아, 너 우리 집 가서 고양이 보고 갈…”

“사양하겠습니다.”

헤벌쭉 웃으며 곽예린이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마혈을 짚인 듯 몸이 파드득 굳었다.

‘정신계 공격? 아니, 아냐. 이건…!’

온몸을 얼리는 극한의 한기.

상대의 체액을 얼리는 빙혈(氷血).

“이 정도로 죽지는 않을 거지? 아니면, 지금 항복하든지. 그러면 실망스럽겠지만.”

어느새 오른손에 거대한 빙검을 쥔 곽예린이 잔뜩 흥이 오른 표정으로 지껄였다.

…저기요. 나 각성자 아니라고요. 팔 하나 박살내도 괜찮다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스파앗!

날카롭게 빛나는 빙검이 내 오른 어깨를 향해 쇄도했다.

나는 이를 악물며 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몸속에서 생성된 불꽃, 산매진화가 얼어붙은 체액을 재빠르게 녹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빙검의 날이 어깨에 닿기 직전.

카앙!

굳어 있던 몸이 비로소 움직였다.

흰 검기를 줄기줄기 내뿜는 월영검의 검날이 빙검의 검끝을 가로막고,

캉! 캉! 카앙! 캉!

이어진 연격이 단단한 얼음을 조각조각 박살냈다.

단번에 기화한 얼음이 순식간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오른발을 깊숙이 내딛으며 수평으로 검을 찔렀다.

검끝이 향하는 곽예린의 가슴팍 앞에 대번에 얼음벽이 생성되었다.

어깨를 가볍게 비틀어 검의 궤도를 바꾸어 우상단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곽예린의 손에 들린 새 빙검이 월영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 관자놀이를 얼음송곳이 타격했다.

그리고 동시에.

공간이 얼어붙었다.

술사들이 근접 공격에 약하다더니 다 약해빠진 놈들의 헛소리다.

챙! 채앵! 챙!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 격돌했다.

아마 하하민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속도.

‘대체 동시에 기술을 몇 개까지 쓸 수 있는 거냐.’

술사가 기술을 시전하기 위해서는 극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최지수가 석벽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 검질을 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원리.

그런데 눈앞의 이 인간은 그런 원리를 말끔히 무시하고 있다.

박살내도 박살내도 계속 빙검을 생성해 휘두르고 있고,

동시에 얼음송곳을 만들어내고,

그 와중에 공빙까지 시전한다.

세 가지 기술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거기다가, 마력을 모으고 어쩌고 하는 데 소모되는 시전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세력은 잃었어도 마력은 남아 있다 이거지.’

자갈치길드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부산성에서 버텼다고 했다. 한 사람의 성민이라도 더 탈출할 수 있도록.

그 덕에 자갈치길드는 세력과 근거지를 잃었으나 인심은 잃지 않았다.

이번에 계룡성으로 이주한 이들 중에는 그때 부산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도 상당했다. 성을 잃고 패주한 길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갈치길드와 그 길드장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곤 했다.

썩 나쁘지 않은 인간이다.

우군으로 두어도 괜찮…

“용용아! 나 이렇게 신나기는 진짜 오랜만이야!”

…근데 아까부터 왜 계속 용용이 타령이냐고.

***

고함 소리와 환호성으로 들끓는 관중석과 달리 VIP석은 고요했다.

“…호각이군, 호각이야.”

두꺼운 침묵을 뚫고, 해룡의선이 감탄 섞인 문장을 내뱉었다.

“저 검룡이, 각성한지 고작 육 년이라고요?”

그 말을 받는 무등좌협의 목소리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계룡문이 요청한다면, 길드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헛소리 작작하시오! 고작 한 명 강하다고 길드 승격이라니.”

무적권왕이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무대를 내려다보던 해동검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검제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지남천의 말과 함께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염화검제에게 향했다.

길드 연합이지만 사실 그 연합을 만들고 유지한 이는 염화검제였다.

개인의 무력과 조직의 세력 모두 염화검제를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

“…검제님?”

염화검제는 자신을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시선도 깨닫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아들의 우승에 대한 생각도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눈앞의 존재.

‘…저건 무엇인가.’

속성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수의 존재.

염화검제는 그 불분명함이 마땅치 않았으나 다급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직접 보면 속속들이 파헤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까지 검룡의 비무 상대는 모두 나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떨어져 검룡의 진짜 모습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빙화신녀와 검룡의 비무는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비무는 그의 기대대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는 비무가 시작되자 길드장들에게 몇 마디 대꾸를 해주고는 비무대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곧 신음을 흘렸다.

‘대체 뭐란 말이냐. 저 존재는……!’

염화검제는 누구보다 정보의 힘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1차 블랙데이 직후 설립된 대한길드의 연구소는 전국,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심도 깊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연구 결과를 자신의 머리에 저장했다.

각성자의 기술. 능력. 속성. 속성별 약점과 강점. 한계…….

그런 염화검제도 들어보지도 못한 능력들이다.

알 수 없는 기술.

알 수 없는 힘.

흙속성, 불속성, 물속성, 어둠속성. 그 무엇도 아닌 능력.

‘저게, 격을 초월한 존재인가.’

그의 눈앞에서 스파크가 튄 것은 그가 홀로 집무실의 마호가니 의자에 앉아 있을 때였다. 3차 블랙데이의 한중간이었다.

염화검제는 서울성벽으로 밀려드는 괴물과 밤새 전투를 벌이다가 잠시 쉬러 돌아온 참이었다.

파직. 파지직.

주변의 마력이 소용돌이처럼 한 점을 향해 몰려들었다.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공간을 우그러뜨리고, 곧 형태가 있는 어둠이 되었다.

어둠이 입을 벌렸다.

[염화검제 이정용아]

-…누구냐?

어둠이 높은 소리로 웃었다.

[나는 주시하는 예언자. 다들 간단히 예언자라고 부르지.]

그건 존재이자 존재가 아니며,

입이자 입이 아니었다.

염화검제는 그것이 인간 외의 존재임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것으로부터 줄곧,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므로.

‘그것’, 즉 예언자는 줄곧 염화검제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했다.

-이 계약으로 당신은 무엇을 얻지?

[내 계약자의 이름이 ■■■■에게 ■■될수록 내 ■도 ■■지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입이 날카로운 소리로 웃었다.

[너희 세계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그 말대로야.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들리는 법이지.]

염화검제는 그 짧은 대화로부터 예언자가 털어놓지 않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 말고도 이미 ‘계약’을 맺은 각성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존재가 정말로 ‘신’이라면, 신은 눈앞의 존재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신’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강하고, 더 좋은 신이.

수많은 ‘…일 지도 모른다’의 속에서, 염화검제는 결정했다.

사업가는 결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결정에는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

-계약하겠다.

균열 속의 입이 킬킬거리며, 혹은 클클거리며 웃었다.

그 계약의 대가로 서울성은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염화검제는 그렇게 보존한 전력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자신의 명성을 널리 퍼뜨리는 데 집중했다.

그게, 그 신의 목적이자 자신의 목적이었으므로.

-당신은 신인가?

[■■■ 입장에서는 비슷해.]

-당신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질문에, 입이 소리 높여 웃었다. 귀가 째질 듯한 웃음 끝에 입이 대답했다.

[간단해. 아주 간단해. ■■■ ■■, ■■의 ■을 ■■하면 되거든.]

그때는 들리지 않았던 문장.

그 후로 줄곧 파고들었으나 끝내 들리지 않은 문장.

‘들렸다.’

그 문장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모자이크가 벗겨진 것은 빙화신녀의 빙환과 검룡의 주먹에서 튕겨져 나온 흰 빛덩어리가 부딪친 순간이었다.

염화검제는 검룡의 힘이 자신이 아는 어떤 속성과도 다른, 완전히 새로운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문장이 머릿속을 둥 둥 울렸다. 모자이크가 벗겨진 완전한 문장이.

[오롯이 홀로, 존재의 격을 초월하면 되거든.]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쥔 염화검제의 손등에 핏줄이 불툭하게 튀어 올라 있었다.

‘…저 매끈하게 생긴 애송이가 신에 가까운 존재라는 말인가.’

염화검제는 신음을 삼키며 비무대를 응시했다.

검룡은 빙화신녀에게 무서운 기세로 쇄도하며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본 적 없는 눈부신 광채가 그의 검날에서 뻗어 나와, 염화검제는 질끈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