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걸어온 길 (2)
콰아아!!!
검기를 잔뜩 실은 월영검이 금이 간 빙검을 세 번째로 박살냈다.
박살난 얼음 조각은 곽예린의 오른손으로 단번에 모여들었다.
아주 짧은 틈.
‘하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곽예린이 그 틈을 메꾸는 방법은, 몰아치는 공격.
공기가 일렁이고, 내 몸 주위로 다섯 개 얼음송곳이 생성되었다.
피부의 표면에 닿을 듯 가까이에서 생성된 얼음송곳이 로켓포처럼 내 몸으로 발사되는 순간.
응축했던 호신강기가 피부의 표면에서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적(積)을 이용한 기공.
얼음송곳과 강기의 격돌에 공기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고,
곽예린의 손에 모여들던 얼음 조각들이 폭발에 휘말려 흩어졌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스파앗!
월영검이 그의 무릎을 지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야! 누나 아프잖… 야, 야!”
곽예린이 다급히 얼음벽을 생성해 월영검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급히 만들어낸 얼음벽은 아까의 그것보다 훨씬 약했고.
콰앙!!!
내지른 내 왼손에 가볍게 박살났다.
그 사이 곽예린은 잘려나간 왼발 대신 얼음으로 만들어진 의족을 딛고 풀썩 뒤로 뛰었다.
거리를 두고 마력을 집중할 생각이겠지만,
“용용아, 너 진짜 끝내준다!”
“네, 많이 들어요.”
…나는 이제 끝낼 생각이거든.
타닷.
바닥을 박찬 내 몸이 그를 향해 쇄도했다.
날아온 얼음창을 월영검으로 쳐내는 것과 동시에,
쇄도하는 내 주변이 쩌적쩌쩍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
내가 잔뜩 젖힌 어깨를 거세게 휘두르자,
월영검의 검끝에 맺혀 있던 강기의 구슬이 빙공(氷空)으로 얼어붙은 공간과 부딪혀 폭발했다.
얼음이 비산하고, 기화한 수증기가 소용돌이치듯 곽예린을 향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월영검의 검끝이 조금 더 빨랐다.
검끝으로 솟아 오른 검기가 곽예린의 오른 어깨를 파고들고 단번에 목줄기를 겨누었다.
“…이야. 용용이 너 진짜 대단하네. 너 나랑 같이 데이트…….”
“항복하실 거죠?”
몰래 마력을 집중하고 있던 왼쪽 어깨를 호조수(虎爪手)로 뒤틀자,
“아파! 아프다고!”
그가 과장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김강산 못지않은 가벼운 주둥아리와 다르게, 아주 끈질긴 인간이다.
“쳇. 그래, 내가 졌다.”
곽예린이 다시 한 번 외쳤다.
“야! 내가 졌다고!”
격렬한 전투를 피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심판놈이 슬금슬금 비무대로 올라와 나와 그를 살폈다.
“계룡검룡, 계룡검룡이 빙화신녀에게 승리해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귀 따가운 함성이 비무대 위로 쏟아졌다.
나는 제 피를 얼려 지혈하고 있는 곽예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데이트 신청은 다음에 받아 드릴게요. 우리 부대표에게 명함 주고 가세요.”
“진짜? 진짜지?”
“한 번 더 진짜냐고 물어보시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곽예린이 하나 남은 멀쩡한 팔로 자신의 입에 지퍼를 채우는 모양을 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아무래도 제정신은 아닌데 말이지.
***
-강산아. 림이는?
-형 수련한다고 방에 들어갔어. 방해하면 죽인대.
-어휴. 밥 먹고 하지.
-지수 형이 가서 불러오든지.
-…하민아? 가서 림이 데려올래?
-부대표님. 저한테 뒈지라는 말씀이시지요?
방문 밖에서 최지수와 김강산과 하하민이 종알거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결국 아무도 내 방문을 두들기지 않았다.
그러라고 엄포를 놓기는 했는데, 진짜로 아무도 안 오니까 묘하게 기분이…….
뭐. 애들 두들기는 일이야 다녀와서 실컷 하면 되고.
나는 창문을 열고 건물의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목적지는 새벽에 봐둔 남지호의 집.
복잡했던 머릿속은 이제 고요해졌다.
생각의 정리가 끝났기 때문.
‘두들겨 패서라도 데려온다. 분근착골을 써서라도 곁에 둔다. 어둠속성을 데리고 있다고 계룡문이 욕을 먹으면 그 욕을 지껄인 아가리들을 모두 박살낸다.’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그 과정이 비록 힘들다 해도…….
불명확한 기대로 쿵쿵거리던 내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은, 기감의 그물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잡힌 순간이었다.
한둘이 아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의 각성자, 그것도 중급 이상의 각성자들의 마력이 느껴졌다.
더불어, 날카로운 살기까지도.
뾰족한 살기가 뻗어 나오는 지점은 내 목적지와 일치했다.
언덕의 중턱.
남지호의 집이 있는.
타닷.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차고, 내 몸이 총알처럼 정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죽었습니다. 스스로 목을 찌른 걸 보니 암시에 당한 것 같습니다.
파천궁의 서울지부장 김영호는 살이 올라 두 겹으로 접힌 자신의 턱을 긁으며 물었다.
-시간은?
-서너 시간 전입니다.
처음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흑암단주 장백이 난데없이 서울에 나타나 계룡검룡에 대한 정보를 내놓으라 닥달하고, 계룡에 내려갔다 올라오면서 계룡검룡에게 걸어 둔 암시를 유지하라 지시했을 때부터 감이 좋지 않았다.
‘좆같은 어둠속성 각성자들.’
김영호는 그들의 유용함은 알았다. 그러나 가끔 참을 수 없는 혐오가 치밀었다. 특히 어둠속성들로만 구성된 흑암단에 대한 혐오는 더욱 극심했다.
장백이 파천궁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오지 않았더라면 김영호는 장백의 요청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백은 북경으로 돌아가며 서울지부에 사혼삼살(死魂三殺)을 남기고 갔다.
‘그 좆같은 새끼들……!’
김영호는 문득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인간의 탈을 쓴 그 세 괴수는 날이면 날마다 술을 가져와라, 여자를 데려와라 해대며 지부를 들쑤셨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서울성 4성민을 납치, 강간, 살해해서 그 뒷수습을 하느라 대한길드에 상당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그나마 4성민이라 다행이지 3성민이나 2성민이었다면…….
덕분에 김영호의 평화로운 일상은 박살 직전이었다.
흑암단에 대한 혐오와 별개로 김영호는 이번 작전이 못마땅했다.
충청의 떠오르는 샛별 계룡문과, 그 눈부신 성장을 이끄는 불가사의한 미남자에 대한 정보는 그의 책상 서랍 속에 차고도 넘쳤다.
아주 매력적인 인간.
불세출의 천재이자 영웅적인 행적을 쌓고 있는 존재.
그런 사람에게는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수명 연장에 유리하다는 것이 김영호의 신념이었다.
높은 압력은 주변을 끌어당긴다.
김영호는 태풍에 휩쓸려 허망하게 사망한 한 마리의 아기 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길고 가늘고 평화롭게 살다가 노환으로 죽고 싶었다.
그는 세계 최대 세력의 구석진 지부의 지부장, 괴물과 맞상대할 필요도 없고 전선의 최일선에 나서지도 않는 이 정도 자리가 딱 만족스러웠다.
이 편안한 자리가 어쩌면 전장의 한복판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어쩌겠냐. 파천궁에서 월급 받는 직장인이, 까라면 까야지.’
그리고
그의 직감은 서서히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혐오스럽고 야심찬 어둠술사 전혜미에게 인수인계 받은 대로라면 ‘동이 트면 남서문으로 오라’는 암시를 검룡에게 걸어 놓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남서문에 검룡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혼일괴(死魂一怪)는 지부 기강이 해이하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정보망을 사방으로 펼쳐 알아낸바, 어렵사리 전혜미의 시체를 발견했고, 어떤 사내가 남서문으로 오던 검룡을 인터셉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김영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사내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리고 겨우, 사내의 집을 알아냈다.
“저항하는데요.”
“아오, 진짜 피곤하게 구네.”
“죽여도 됩니까?”
“사혼삼살한테 그거 있대?”
“시독술 말씀이시죠?”
“그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시체의 기억을 읽어내는 능력인 시독술.
아무튼 어둠속성들의 능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혐오스러운 것들뿐이다.
잠시 후 지부 요원이 돌아와 그에게 필요한 정보를 내놓았다.
“네. 있습니다. 죽일까요?”
“그래. 야!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 아이 씨. 이거 대한길드에서 알면 또 피곤하겠는데.”
김영호가 투덜거리며 턱을 긁었다.
***
살기가 짙어졌다.
혈향이 코를 스치고,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분명 남지호의 집이다.
놀란 채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무리를 뛰어넘자, 남지호의 판잣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그러진 철문 앞.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꽁꽁 싸맨 열댓명의 각성자들이 남지호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뒤가 구린 새끼들이 분명하다.
얼굴을 가린 놈치고 깨끗한 새끼는 본 적이…….
…아. 나도 지금 복면 썼지.
남지호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마력이 떨어졌는지, 세검에 일렁이는 검은 기운은 꽤나 옅어져 있었다.
암독 특유의 검은 기운.
‘진짜 어둠속성으로 전직한 거냐.’
줄곧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광경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인지는 일단 살려놓고 물어보기로 하고.
탓.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남지호를 에워싸고 공격을 퍼붓고 있던 놈들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강철검의 검집이 막 몸을 돌리던 복면인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비틀거린 놈이 목소리를 높였다.
“한패가 있다!”
한패는 아니고.
전전전생의 절친이랄까.
네모난 5리터짜리 플라스틱 물통에서 솟구쳐 오른 물이 얼음 화살로 변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몇 시간 전까지도 빙화신녀의 고급진 물속성 기술들을 보다가 이런 떨거지들을 상대하려니 참…….
…쉽지만은 않네.
내가 검룡임을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놈들이 염화검제가 파견한 대한길드의 처리반이라면 계룡문 대표로서 입장이 좀 곤란해진다.
‘왜 이렇게 고려할 게 많냐고.’
어쨌든 그 덕에 나는 검막이니 적이니 하는, 나를 특정할 수 있는 기공들을 최대한 봉인한 채 싸우고 있는 중이다.
캉! 카앙! 캉!
강철검에 부딪힌 얼음화살이 조각조각 부스러졌다.
뿌옇게 기화하는 수증기 사이로 두 자루 검이 쇄도했다.
비스듬히 강철검을 세워 한 자루 검을 막고 그대로 팔목을 비틀어 검을 쥔 어깨를 찔렀다.
동시에, 왼쪽 어깨를 비틀어 반대쪽 공격을 회피하고 용조수로 놈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두 복면인이 옅은 비명과 함께 제 어깨와 팔꿈치를 움켜쥐는 찰나.
타앗.
나는 바닥을 걷어차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내 오금을 향해 내뻗은 창대를 걷어차고 한 놈의 대가리를 밟아 놈들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았다.
이번에도 완벽한 착지.
그 사이 팔 하나가 잘려나간 남지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벽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와 모자가 없으니 영락없는 나이 든 남지호였다.
그날. 최초의 균열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을 때도 남지호는 이런 표정을 했었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어떻게 각성했을까.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어쩌다 어둠술사 따위가 되었을까.
그리고 내 엄마는…….
놈들이 지껄이는 대화가 복잡한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합니까, 지부장님!”
“야! 그렇게 부르면 어떻게 해!”
“죄, 죄송합니다!”
“에이 씨... 둘 다 죽여!”
지부장이라. 그렇다면 복면놈들은 파천궁의 서울지부 놈들일 터.
파천궁 흑암단이 나에게 걸어놓은 암시를 놈들이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남지호가 가로챘고…….
‘덜떨어진 놈들이네.’
스파앗!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이 귀를 때렸다.
단번에 공간을 좁혀든 복면인이 남지호의 정수리를 향해 거대도끼를 휘둘렀다.
남지호가 다급하게 몸을 굴러 도끼를 피했다.
바닥을 구르는 남지호를 향해 얼음창이 내리꽂혔다.
그리고.
내 검에 부딪혀 떨어졌다.
“…누구신지.”
“이럴 땐 감사하다는 말이 먼저 아니냐?”
남지호는 대꾸하지 않은 채 재빨리 세검을 들어 정면으로 파고들던 복면인을 찔러 들어갔다.
애새끼가 못 본 30년 사이 참 팍팍하게 늙었다.
“일단 빠져나가자.”
남지호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검에 일렁이던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그리고 단번에,
물풍선이 터지듯 주변으로 흩어졌다.
“…암독무다!”
‘그래, 암독무네. 제기랄.’
네가 어둠속성이라는 걸 굳이 이렇게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나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오는 암독을 태워 없애며 검을 뽑아들고 휘둘렀다.
“길을 틀 테니까 따라와.”
남지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암독에 중독된 앞쪽 놈들이 뒤로 빠지고 뒤에 있던 놈들이 그 자리를 메꾸려 움직이는 순간.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바닥을 훑듯 수평으로 휘두른 검이 한 놈의 발목을 베어냈다.
놈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찰나, 다음 놈이 그 빈자리를 메꾸며 단창을 내질렀다.
상체를 낮춘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던 창날이 오른쪽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놈이 다급하게 창대를 회수했으나.
오른발을 크게 내딛으며 놈의 품으로 파고든 내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강철검의 검끝이 놈의 어깨를 관통했다.
놈의 가슴을 걷어차며 단번에 검을 뽑아내기가 무섭게,
파바밧!
백염을 휘감은 채찍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내 허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왼발을 축으로 크게 회전하며 검을 좌하향으로 내리그었다.
희게 빛나는 강철검의 검날이 채찍놈의 손목을 지났다.
피분수가 솟구치고,
길이 열렸다.
“가자고.”
“…고맙네.”
등 뒤에서 가느다란 파공성이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