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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43화 (43/122)

43화. 걸어온 길 (3)

수십 개의 암기가 총알처럼 날아왔다.

그것은 가볍게 몸에 부딪히자마자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암독침(暗毒針).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암독이다.

오우거 가죽으로 만든 옷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렸다.

가죽을 녹인 암독은 호신강기를 뚫고 기맥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남지호는?’

남지호의 얼굴이 검다.

옷 아래 드러난 팔목과 손도 모두 검다.

전형적인 중독 증상.

나는 재빨리 남지호의 마혈을 짚었다.

마혈은 기맥을 도는 기운을 멈춰 몸을 마비시키지만 대신 독이 퍼지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은 남지호의 옆구리를 끌어안으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허공을 가르며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챙!

내 검과 부딪힌 암독송곳이 박살나며 짙은 암독무를 흩뿌렸다. 내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독무가 주변을 에워쌌다.

나를 포위하고 있던 파천궁 지부 놈들이 암독에 당해 허수아비처럼 스러지는 모습이 어둠 속으로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이제 서 있는 놈들은 다섯뿐.

아군이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손속.

지금까지 상대하던 놈들과는 결이 다르다. 마치…….

‘그때 그 새끼들 같은데.’

남지호를 옆구리에 끼우고 허공에 몸을 띄운 채 나는 기운을 끌어올렸다.

의지의 부름에 따라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강철검의 검날을 희게 빛냈다.

젖혔던 어깨를 거세게 휘두르자,

희게 빛나는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휘어졌다.

검은 독무가 반으로 갈라진 틈새로 내가 쇄도했다.

“어디로 그러케 그파게 가.”

어설픈 한국어와 함께 단창이 날아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창은 정신을 잃고 늘어진 남지호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내가 남지호를 지키리라는 사실을 파악한 공격.

속도와 힘, 단창에 실린 마력이 모두 상당하다.

나는 다급히 검을 회수해 전력으로 휘둘렀다.

챙! 챙! 채앵!

수십 번 찌른 단창의 날카로운 창날이 희게 빛나는 검막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피곤하게 됐네.’

암독무가 사라진 곳에 서 있는 이들은 다섯.

지부장이라고 불린 놈과, 아까부터 그 옆에 있던 놈.

그리고, 새로 나타난… 복면도 쓰지 않은 세 놈.

거진 3미터에 달하는 거구. 인간보다 오크에 가까운 듯한 덩치들이다.

철사처럼 거친 수염으로 얼굴 절반이 덮인 놈은 철퇴를 들고 있고,

미간이 없을 정도로 두 눈썹이 갈매기 모양으로 딱 붙어 있는 놈은 환도를 쥐고 있고,

들창코에 오백 원 동전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콧구멍을 실룩이는 놈은 단창을 들고 있다.

철퇴.

환도.

단창.

진짜 그놈들이다. 지난겨울, 나를 습격한 놈들.

파천궁에서도, 어둠속성으로만 구성된 무력단인 흑암단(黑暗團).

파천궁의 날카로운 창이자, 중국에서도 여러 번 혈겁을 일으킨 더러운 구더기들.

그 중에서도 저런 외모를 한 세 놈이면 정체는 뻔하다.

사혼삼살(死魂三殺).

거악 중의 거악 중의 거악이라던…….

흑암단주를 제외하면, 흑암단의 최고수.

북한을 넘어 이곳까지 놈들의 악명이 들려올 정도니 말 다했다.

아마 나에게 암시를 건 그날, 내 그물을 잡고 있었던 복면인들도 아마 이놈들이었을 터.

근데…….

“四婚三杀. 这里我来收尾,退下吧.”

…이 새끼들이 또 중국어로 지껄이네.

-사혼삼살. 이곳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 물러나게.

사혼삼살은 흑암단 소속이다. 같은 파천궁이지만 일종의 대사관 노릇을 하는 서울지부와는 그 소속이 다르다.

그리고 아무래도 흑암단과 서울지부의 사이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은 모양이다.

사혼삼살이 등장하고부터 지부장놈의 살기가 놈들을 향했으니까.

‘나야 땡큐지.’

얼른 기운을 일으켜 기맥에 스며든 암독을 태워 없애는 데 열중하는 내 귀로 환도놈과 단창놈이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리? 서울에서는 쩔쩔매는 꼴을 처리라고 부르나?

-촌구석의 지부장 따위가 감히 누구더러 물러나라 마라 지랄이야. 처음부터 니들이 제대로 했으면 지금쯤 민아 엉덩이나 주무르고 있을 텐데.

-엉덩이? 가슴이겠지.

지부장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이 철퇴놈이 환도놈과 단창놈의 말을 끊었다.

-지부장이야말로 물러나야지. 이번 일로 검룡의 암시술이 풀렸다면 다음에 서울에 올 때 그 넓적한 낯짝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어. 이 정도 작전도 수행하지 못해서야 어찌…….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검룡, 여기 있거든요.’

콰가강!!!!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의 구슬이 정면에 서 있던 환도놈의 면상으로 날아가, 다급히 들어올린 환도놈의 오른팔에 직격했다.

나머지 네 놈들이 황급하게 병장기를 들어 올렸으나,

내 발이 한 발 더 빨랐다.

나는 당랑각(螳螂脚)으로 창대를 걷어차고, 오른손으로 멸절검(滅絶劍)의 초식을 운용하며, 왼팔로 의식을 잃은 남지호를 끌어안았다. 세 동작은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에 이루어졌다.

열대의 스콜처럼 거센 검기가 흰 빛줄기가 되어 내 주변으로 낙하했다.

놈들이 자신의 무기로 검기를 막고 피하는 잠시의 틈을 이용해 나는 정면으로 쇄도했다.

적(積)에 얻어맞은 놈은 덜렁거리는 오른팔을 포기하고 왼팔로 환도를 움켜쥐었다.

단창과 철퇴가 뒤늦게 내 등 뒤를 갈랐다.

환도놈의 다리가 검의 사정권에 들어오는 순간,

취원보(醉猿步)를 밟으며 단번에 방향을 전환했다.

놈이 휘두른 환도가 허공을 격하고,

검기로 희게 빛나는 강철검이 놈의 가슴팍을 등 뒤에서 꿰뚫었다.

“…검ㄹ……?”

지부장이 신음처럼 중얼거린 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제 인형놀이는 끝났네.’

어쩔 수 없다.

지금 앞뒤 가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남지호의 얼굴은 이제 거의 흙빛이었다.

중독이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증거.

조금이라도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암독은 보통의 독보다 해독이 훨씬 어려우므로.

발로 환도놈을 걷어차 단번에 검을 뽑아내자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힘을 잃은 놈의 손목을 베어내며 나는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

.

.

“남지호, 야, 씨발 남지호 새끼야……!”

내 등에 업힌 남지호에게서는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경공을 최대한으로 전개했다.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려 사혼삼살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에게서 벗어난 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남지호의 상태는 엉망진창 개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계룡문 애들로서는 이놈을 해독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서울에 있는 회복술사는 하하민뿐이다. 하하민의 암독해독 능력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

그러나 이 암독은 암독 중에서도 아주 독하다.

극한으로 진기를 끌어올려 산매진화를 일으켰는데도 아직 내 몸에서 암독을 완전히 태우지 못했을 정도다.

남지호에게 진기를 불어넣어 시간은 조금 벌었으나 아주 약간일 뿐이다.

이 정도 암독을 해독할 수 있는 곳은…….

‘대한길드, 혹은 파천궁 서울지부.’

***

“아이 씨.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김영호는 턱을 긁으며 지부 본부로 들어섰다.

검룡의 암시를 가로챈 남지호라는 놈을 잡으러 갔는데 검룡이 그걸 방해했다. 덕분에 남지호를 놓쳤고 사혼이괴는 큰 부상을 입었다.

사혼삼괴가 검룡을 쫓아갔으나 결국 소득 없이 되돌아왔다.

사혼일괴와 삼괴는 그 복면인, 즉 검룡을 찾기 위해 서울성을 뒤집어엎을 기세였다.

‘…뇌 용량이 꽤 적은가……?’

흑암단은 계룡에서 검룡과 직접 전투를 벌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복면인이 검룡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렇게 검룡의 뒤를 좇아온 자신도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깨달았지만…….

“지부장님.”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김영호는 회복술사의 떨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회복술사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회복술사가 김영호에게 짧은 문장을 속삭이자, 김영호의 얼굴도 곧 파랗게 질렸다.

김영호는 계단을 열 칸씩 뛰어올라 순식간에 3층 창고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한 김영호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황급히 걸어 잠갔다.

“…검룡?! 여기가 어디라고……!”

새끼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쑤시던 미남자가 김영호를 올려다보며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어디긴 어디야. 파천궁 서울지부지. 꼬리 없는지 철저하게 확인했으니 얼굴 좀 푸세요. 앉아, 일단 앉아 봐요. 내가 할 말이 많아.”

김영호는 침을 꼴딱 삼켰다.

‘아이 씨. 저런 인간 가까이 있으면 인생 순식간에 좆되는데……!’

.

.

.

“처음부터 암시에 걸리지 않으셨다고요.”

“이것들이 나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나. 내가 그리 어수룩해 보여요?”

김영호는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쓰며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파천궁이랑 척지고 싶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행동해줬다… 그런 말씀시지요?”

“이해가 빨라서 좋네.”

김영호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검룡을 힐끔거리며 하하, 하고 따라 웃었다.

‘척지기 싫으면 무릎을 꿇고 비는 게 정상 아닌가. 걸린 척 있다가 엿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겠지.’

라는 속마음은 물론 꺼내놓지 않았다.

검룡은 그 실력만큼이나 성질머리로도 유명했다. 그 좌룡의 대가리에 혹이 사라질 날이 없다든가.

“그런데 저…….”

“응, 그래. 말해봐요.”

“어쩌자고 이곳에 오셨습니까. 차라리 대한길드로 가시지요.”

“왜요? 내가 못 올 데를 왔나?”

“…우리 궁주님께서 당신을 좋게 보시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기, 지부장님.”

“네?”

“지부장님은 왜 파천궁에 들어갔어요?”

검룡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확 깨물어도 비린내 하나 안 나게 생긴 고운 얼굴이다.

‘말리면 안 돼. 이런 인간 옆에 있으면 내 평화롭고 안락한 인생은 끝장이다.’

김영호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거야 월급도 많이 주고, 일은 편하고, 괴물과 맞상대할 일도 없으니까요. 하하. 저 같은 사람에게 딱 알맞은 자리이지요.”

검룡이 씩 웃었다.

“거짓말.”

“아닌데요.”

“지부장님, 대한길드에서는 왜 나왔어요? 꽤 유망주였는데.”

“…그건, 제가 겁쟁이라, 괴물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또 거짓말.”

김영호는 꿀꺽, 침을 삼켰다.

검룡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대한길드의 차등주의 정책. 그것에 반대해서 쫓겨난 거잖아요. 지금의 이 좆같은 성벽 쌓는 일에 손들고 반대한 유일한 대한길드 길드원, 김영호 씨.”

다른 성처럼 하나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서울성이 지금처럼 다섯 개의 성벽을 쌓아 올린 것은 20여 년 전, 안산성 전투가 끝난 직후였다.

가장 바깥쪽 성벽인 5성벽 안에는 월 1000돈의 보호세만 지불한다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4성벽 안쪽, 4구역에 살기 위해서는 10만 돈의 거주권을 구입해야 했다.

3성벽 안쪽인 3구역의 거주권은 100만 돈, 더욱 안전하고 전기와 수도 시설까지 갖춰진 2구역의 거주권은 1000만돈.

그리고 1구역의 거주권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오직 대한길드의 직계가족에게만 허용되었으므로.

-명백한 차별입니다! 이건 5구역 거주민을 방패막이로 쓰려는 의도가 아닙니까.

-진정하라고, 김영호. 우리가 강제로 억류했나? 그렇게라도 서울성에 살고 싶어 하는 성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거야. 5구역이라도 다른 성보다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게지.

-하지만 5성벽의 방어 인원은 70키로미터에 달하는 그 길이에 비해 턱없어 부족합니다! 10키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2성벽 방어에 투입되는 인원과 같지 않습니까. 그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쯧, 쯧. 자네는 공정의 의미를 배워야겠어. 1000만돈을 지불한 사람과 공짜로 거주하는 사람을 똑같이 대하면 그게 공정인가? 아니야. 그건 공정이 아니야. 능력이 있는 자는 특별하게 대우해야지. 자네가 아직 결혼을 안 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김영호는 그때 쫓겨나다시피 대한길드를 나왔다.

딱히 비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널리 알려진 일도 아니었다. 검룡도 아니고, 김영호 자신 수준의 각성자야 길가의 자갈처럼 흔한 존재니까.

떠오르는 샛별, 아니, 이미 떠오른 샛별이며 날마다 빛을 더하고 있는 태양인 검룡이, 몇 시간 전에 자갈치길드의 길드장인 빙화신녀와 엄청난 비무를 벌이고 끝내 승리하기까지 한 바로 그 검룡이 자신 따위의 과거사까지 알고 있다니.

‘…나 지금 감동하고 있니?’

“김영호 씨. 나는 지금 김영호 씨에게 손을 잡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파천궁의 지부장이 아닌, 김영호 씨 당신에게.”

김영호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검룡은 자신에게 계룡문의 첩자 노릇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위험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위험해.’

자신이 추구하는 삶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미친 짓이다.

문제는, 그 미친 짓에 스스로가 끌리고 있다는 사실.

검룡의 행적에 대해 조사한 것은 파천궁의 지부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35개 파일, 서랍 세 개를 채우고도 남는 정보량은 확실히 업무의 범위를 넘어섰다.

언젠가부터 김영호는 검룡의 모든 행적을 조사하고, 수집하고, 정리했다.

옛 시대에 걸그룹 블랙핑크 팬질을 했던 것처럼.

악(惡)을 멸하고, 약(弱)을 돕는다.

김영호의 서랍에 쌓인 검룡의 행적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했다. 때때로 그는 그저 제멋대로 구는 폭군처럼 보였으나, 그 결과는 모두 위의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영웅일까.’

김영호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다.

자신이 젊은 시절 꿈꿨던, 모두가 평등한 세계를 이룰지도 모르는 사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을 가진 유일한 사람.

…하지만.

지금의 행동은 과거 검룡의 행적과 어울리지 않는다.

김영호는 창고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침대 위에서 새록새록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있는 남지호를 잠시 응시했다.

남지호는 약(弱)이 아닌, 악(惡)이다. 대다수의 어둠속성이 그렇듯이.

‘검룡 같은 이가, 어둠전사를 구해?’

이유를 들어야 한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서울지부에는 3차 세계대전 중 군의 협박에 못 이겨 반강제로 전직당한 사람이 몇 있었다. 적어도 그 정도 이유는 있어야… 그렇지 않으면…….

“저자는 왜 구하셨습니까?”

“…내 어머니.”

“…네?”

“잃어버린 내 어머니의 소식을 그가, 아는 것 같아서요. 그 이야기를 들으러 그의 집에 가던 중이었거든.”

줄곧 올라가 있던 검룡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와 얼어붙었다.

아주 오래 산 노인의, 삶의 굴곡에 지쳐 무너진 듯한 체념적인 표정.

그 표정은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김영호는 우두커니 눈을 껌벅였다.

“어때요. 이 정도면 설명이 됐을까요.”

검룡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서글픈 얼굴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이 마치 빛을 뿜어내는 듯해서 김영호는 눈을 찌푸렸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옳았다.

평화로운 일상이 거대한 태풍에 휘말려 끝장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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