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45화 (45/122)

45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1)

-지호 오빠는?

-모른다니까! 지호 형 집이 피떡이더라고. 이거, 파천궁한테 걸렸다 싶은데.

-씨발. 이제 어쩌냐?

-어쩌기는. 시전자 죽어도 암시 안 풀리는 거 뻔히 아는  새끼가. 못 먹어도 고다, 시발롬아.

신재운은 동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못 먹어도 고. 그래. 어차피 뒤진다면 염화검제 손가락이라도 날리고 뒤진다.’

비무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신재운은 떨리는 손을 움켜쥐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깝다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이 복수를 위해, 어둠속성으로 전직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이 손으로 거두었던가.

신재운은 숨을 몰아쉬며 동료들을 향해 수신호를 했다. 곧 동료들이 계획된 위치로 흩어졌다.

그때.

짙은 암독에서 회복한 남지호는 자신을 지키고 있던 지부의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파천궁의 서울지부 창고에서 빠져나와 불꽃성의 성벽을 넘고 있었다.

‘검룡이 정말로 암시에 걸렸을까?’

모른다.

그 복면인이 파천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구한 이유도 모른다. 자신이 왜 파천궁 지부에서 깨어났는지도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내 무덤은 어차피 이곳이니까.’

남지호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과거 의대생이었다던 혈귀단의 회복술사는 그가 암에 걸렸을 것이라 했다. 길어도 일 년. 짧으면 한 달.

그 말을 들은 후 남지호는 뜻을 같이하는 흑귀대의 몇몇 동료와 함께 혈귀단의 본거지에서 은밀히 빠져나와 서울성에 잠입했다.

혈왕은 아직 대한길드를 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옳다는 사실은 남지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복술사가 말했던 한 달은 이미 지났다.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지 모르는 몸.

울컥.

남지호가 피를 토했다.

그는 여상스럽게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은신으로 몸을 숨긴 남지호가 불꽃성의 성벽을 조심스레 타고 올랐다.

이내 그의 눈에 비무대의 광경이 들어왔다.

검룡의 검이 참마도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비무의 끝을 알리는 심판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검룡의 검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 흰 빛줄기가 향하는 곳은, VIP석의 염화검제.

‘내 암시가… 통했구나!’

흩어진 동지들이 쏘아낸 암독탄이 관중석 이곳저곳에서 터져나가 흩어졌다.

관객들이 대피하고, 회복술사들이 이곳저곳에서 해독술을 시행하는 혼란 속에서 남지호는 인파를 헤치고 VIP석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다음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질 차례였다.

VIP석 아래에 설치해 둔, 어렵게 구한 옛 시대의 유물.

하지만.

‘…걸렸나.’

어쩔 수 없다. 계획대로 모두 풀리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동지들이 쏘아보낸 암독송곳과 암독탄이 VIP석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남지호는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금니를 악물자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

“…왜, 아버지를……!”

“나중에 아빠한테 가서 물어봐. 애송아.”

이석주는 약간 이마를 일그러뜨렸으나 더 이상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염화검제를 향한 내 공격이 그저 시늉이었다는 건 나와 검을 섞은 녀석도 충분히 알고 있…….

“림이 형! 염화검제랑 한 판 뜨게? 시발, 형 이제 전국최강 되는 거? 시발, 미쳐따리 미쳐따!”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 걸겠습니다! 이거 의리 아닙니다? 믿음이라고요!”

아. 모르는 놈들 여기 있네.

제정신 아닌 두 놈이 이곳저곳 퍼진 암독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비무대 위로 뛰어내려왔다.

최지수가 목줄을 채우고 싶다는 표정으로 두 마리 미친개의 뒤를 따라왔다.

“그래도 잘 수습되고 있구나.”

“그러게. 대한길드도 영 빠릿빠릿하네.”

염화검제와의 사전모의에 대해 아침에 최지수에게 귀띔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염화검제를 공격한 순간 김강산이 염화검제에게 백염탄을 뿌렸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에, 최지수가 의자를 뽑아내서 마력 끌어올리려는 포즈를 잡은 김강산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내 추측이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저자들을 심문하면 흑막이 밝혀지겠구나. 이번에 혈귀단의 본거지를 파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 새끼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데. 그걸 순순히 말하겠냐?”

“림이 너 그거 있잖으냐. 분근착골.”

“가만 보면 형도 참 너무해.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그런 소리를…….”

“…림아. 림아?”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새끼가 왜 저기 있냐고.’

VIP석에서 이십여 미터 뒤.

남지호가 염화검제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타닷.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차고,

최지수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

창고 침대에 누워 뻗어 있어야 할 놈이다. 밤새 의식을 차리지도 못했다.

서울지부 회복술사의 말대로라면 거의 살아있는 송장에 가까운 상태라고 했는데.

…대체 그렇게까지 이정용을 죽이려 하는 이유가 뭐냐.

일렁이는 어둠이 남지호의 세검을 검게 물들였다. 극성으로 끌어올린 암독이 가느다란 검날을 채우고 주변으로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날아든 얼음창이 남지호의 하나 남은 오른팔에 격중했다. 어제 잘려나간 왼팔은 아직 단풍잎 같은 손바닥만 자라났을 뿐이다.

얼음 조각과 함께 피가 튀는 상황에서도 남지호의 손은 검을 놓지 않았다.

세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검에 일렁이는 암독이 주위에 짙게 퍼졌다. 남지호가 입을 열어 크게 외쳤다.

“염화검제!!!! 내 은인의 원수!!!!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염화검제가 검을 들어 올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검은 불길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기와 암독을 한꺼번에 불사르며 남지호를 향해 쏟아져 나갔다.

화염의 마지막 단계라는, 오직 염화검제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흑염(黑炎).

순수한 파괴 그 자체.

나 역시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저건 단순한 검기로는 끊어낼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내력을 쏟아 부어도 소멸시킬 수 없다.

내력의 크기가 아닌, 경지의 문제.

나는 허공에 솟구친 채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단전을 소용돌이치던 기운이 거세게 기맥을 타고 올랐다.

‘할 수 있어. 해야만 해. 저 새끼를 내 눈앞에서 죽게 둘 수는……!’

허공으로 올올이 풀려나간 진기가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자연에서 비롯된 기운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

그리고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에게 이끌리는 것 또한 자연의 순리.

월영검에서 흘러나간 수천 가닥의 실처럼 가느다란 삼재혼원공의 내기(內氣)에, 외기(外氣)가 엉겨 붙기 시작했다.

공기와 대지와 시멘트를 뚫고 솟아난 잡초 속에 깃든 기운.

인간이 내뿜는 날숨 속에 깃든 기운.

부스러진 얼음 조각에 깃든 기운.

이정용이 쏟아낸 흑염, 그 검은 불꽃 속에 깃든 기운까지도.

그 모든 기운이 올올이 모여들고, 모여들어, 수천 가닥의 빛줄기가 되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의 긴 검으로 화했다.

나는 허공에 뜬 채 어깨를 젖혔다가, 거세게 휘둘렀다.

새하얀 빛줄기가 거대한 타원을 그리며 흑염을 향해 날아갔다.

‘늦었어!’

긴 빛줄기가 빈 관중석에 날카로운 상흔을 남겼다. 흑염이 지나간 자리에.

화르르륵!!!!

검은 불덩이가 남지호를 집어삼켰다.

단지 그뿐.

내 발이 남지호가 있던 곳에 내려섰다.

흑염에 격중당한 남지호는 순식간에 완전히 타올랐다.

회색의 재로 변한 남지호가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의 세검도,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엄마의 반지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

“림아. 염화검제가 랭킹전 우승 축하한다고도 전해달라더라. 그리고 고맙다고 하더라. 덕분에 혈귀단의 잔당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서.”

“어.”

“림아. 곧 시상식인데… 어떻게 할래? 네가 가기 껄끄러우면 내가 대신 가서…….”

“아냐. 나가야지. 형, 나 세수 좀.”

눈에서 흘러내린 짭짤한 액체 때문에 얼굴이 축축했다.

최지수도, 김강산도, 하하민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충 보육원에 가기 전에 알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꼭 틀린 말도 아니지.

한지혁의 삶 전체는 보육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그곳에 있던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다.

내가, 염화검제가 쏘아낸 흑염을 소멸시키려 시도하는 모습을.

실패했다.

그 결과 남지호는 죽었다.

남지호는 혈귀단의 테러범이다. 그 남지호를 구하려 검을 휘둘렀으니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찬물로 얼굴을 닦고 세면대 앞에 달린 거울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양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 보였다.

나쁘지 않다.

적어도 십오 년 지기 절친을 눈앞에서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화장실을 나가자 최지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지수 형. 밖에 분위기는 어때?”

“걱정 마라, 림아. 잠시 돌아보니 네가 그자를 살려 심문해서 혈귀단의 뒤를 캐려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더구나. 간혹 염화검제와 진검승부를 하고 싶은 의욕에 그랬다는 이들도 있다.”

“대한길드에서 나랑 혈귀단을 한패로 몰아가려는 기색은 없어?”

“처음에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수습이 되었다. 파천궁 서울지부에서 서둘러 정보원을 푼 게 아닐까 싶구나.”

김영호.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일을 잘 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지수 형.”

“…그래, 림아.”

“형은 절대 죽지 마.”

“알겠다, 림아.”

나는 최지수가 가져다 준 계룡문의 흰색 정복을 입고 옆구리에 월영검을 찼다.

자켓의 소매에 서로의 꼬리를 문 두 마리 용이 검은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 아래에 작게, 월매의 얼굴도 보였다.

“계룡과 검룡이다. 밑은 보다시피 월매고. 네 옷은 지현아 씨가 한땀한땀 직접 만드셨다. 나중에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래.”

긴 통로에서 김강산과 하하민, 정하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강산은 16강에서 철기수(鐵機手) 손범석에게 승리하고 8강에 올랐으나 철기수와 싸우면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허무하게 패배했다.

그래도 8강이다.

각성하고 고작 1년 된 하하민이 16강에 오른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고.

그러고 보니 남지호한테 신경 쓰느라 애들 칭찬 한 마디 안 해줬네.

애들이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김강산, 하하민.”

“응?”

“네?”

“고생했고, 잘했다. 많이 컸더라, 니들.”

굳어 있던 얼굴이 대번에 풀린 두 마리 미친개가 헤벌레하며 내 양팔에 들러붙었다.

“형이 짱이지! 우승했잖아! 그 참마도를 완전 발라버렸잖아, 형아가!”

“대표님. 저 사인해주세요, 사인이요!”

“림이 형, 나도! 나도 사인해주라!”

“이것들이 돌았나, 맨날 보면서 무슨 사인 타령이야. 너네 사인 받아서 밖에다가 팔려고……!”

김강산이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하하민이 굳은 얼굴로 뒤돌아섰다. 오른손과 오른발이 동시에 나간다.

“진짜구나. 이 새끼들이.”

“아, 그거 완전 비싸게 팔릴 걸? 형이 어제 썼던 수건 팔고 1500돈 받았다고!”

“…그거 우리 수건 아니잖아! 미친놈들아!”

퍼버버뻐버벅.

8강에 오른 계룡좌룡과 최연소 16강 진출자는 입을 댓발 내밀고 시상식에 참여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높은 단상 위에 올라섰다.

장내 아나운서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자,

“5회 랭킹전 우승자, 최강의 각성자, 금메달, 계룡문의 서림입니다!!!”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환호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정용이 내 목에 금메달을 걸어주고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다.

“덕분에 많이 배웠네, 검룡.”

“저야말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이정용은 나와 남지호의 접점을 찾기 위해 세상을 이 잡듯 뒤질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 서림은 남지호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아왔으므로.

그러나…….

‘나도 듣고, 나도 봤거든.’

남지호가 외쳤던 소리.

그 소리를 들은 이정용은 곧바로 흑염을 쏟아냈었다.

-염화검제!!!! 내 은인의 원수!!!!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피를 토해내는 듯했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어린 절절함보다 더욱 나를 확신하게 만든 것은…….

여유롭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이정용의 싸늘한 얼굴.

입을 막기 위해서라고 여겨질 정도로 지체 없이 이루어진 촉급한 공격.

‘구린 구석이 있어.’

남지호의 마지막 외침을 떠올리며, 나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회자정리이고, 또 거자필반이라 했지요.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염화검제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