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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46화 (46/122)

46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2)

시상식이 끝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아는 얼굴들이 뛸 듯이 다가왔다.

지남천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 살아생전 대한길드가 준우승에 그치는 모습을 보다니! 검룡 자네 덕에 내 좋은 구경 했네!”

아무래도 그동안 맺힌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응원을 하느라 목소리가 잔뜩 쉰 화공자가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검룡님. 감축드리옵니다. 제가 천하제일인과 비무를 했었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제 좁은 시야를 넓혀주시고 또…….”

“됐고, 옷 잘 입었다고 현아 씨한테 전해줘.”

“예. 그럼요. 오늘 정말로 멋졌습니다.”

“언제는 안 그랬냐?”

보염련 곽선우의 어깨 위에 얹혀 있던 정하영이 폴짝 뛰어내리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표님! 나는 우승할 줄 알았다고!”

“약은 많이 파셨어? 연구소장님?”

“말해 뭐해. 들으면 깜짝 놀라실 걸.”

청주성주 처철수가 반쯤 울먹이며 달려왔고, 보령회장 김선규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 뒤를 따랐고, 보염련 곽선우와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놈들이 축하를 쏟아냈다.

...너무 감동들 하는데. 진짜로 안 믿었구만, 이놈들. 이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시상대의 주변에서 연신 환호가 쏟아졌다. 옛 시대였다면 사진을 천오백 장쯤 찍었을 분위…….

“자. 사진 찍습니다! 여기 보세요!”

와. 카메라가 있네. 세상에. 대한길드 이놈들 진짜 잘해놓고 사네.

눈을 처음 본 개처럼 날뛰는 하하민과 김강산을 후드려 패 진정시켜 겨우 몇 장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열정적으로 흔들고는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검룡님. 혹시 저와 사진 한 장…….”

“그럼요. 뭐 어렵다고.”

최지수가 흥미로운 눈을 빛내며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사진사는 큰 덩치를 곱게 접으며 내 오른쪽에 다소곳이 서서 번쩍이는 플래쉬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나도 타이밍에 맞춰 입꼬리를 올렸다.

“사진에 사인해 줘요?”

“영광, 영광입니다!”

“이름이?”

“불꽃남자 정대민입니다!”

To. 불꽃남자 정대민.

그 아래에 사인을 휘갈겨 정대민에게 내밀자 정대민이 90도, 아니, 130도로 허리를 접었다.

준우승자 이석주를 향해 그가 사라졌다. 최지수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또. 뭐.”

“…아니, 림이 네가 예상외로 친절하다 싶어서.”

“팬 관리는 평소에 해 둬야지. 이런 게 다 나중에 돌아온다고.”

“역시…….”

뭐, 그렇게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얼굴을 할 것까지야.

시상식이 열린 곳은 불꽃성의 옆에 붙어 있는 신전의 안뜰이었다.

국회의사당에서 뽑아온 흰 기둥이 하얀 대리석 건물의 주변을 두르고 있었다. 연한 녹색빛으로 번쩍이는 반구형의 지붕 위로 거대한 입술 모양의 조형물이 올려져 있었다.

주시하는 예언자의 신전이라나 뭐라나.

대한길드의 수호성인 같은 존재라고 듣기는 했는데 내 생각보다 꽤 영향력이 있는 듯했다. 신전의 봉헌당을 향하는 줄이 꽤나 길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소원을 빌기 위해 가져온 과일과 쌀가마니, 동그란 동전이 가득 든 주머니 따위가 긴 줄에 늘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의 손에 소중하게 쥐어져 있었다. 입과 다리가 묶인 돼지 새끼가 바닥에 옆으로 뉘어진 채 간헐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안뜰에서 걸어 나오자, 신전의 바깥에 줄을 서 있던 일반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 사람이 검룡이래요. 저기, 끝내주게 잘생긴 검은 머리.

-우리 공자님을 누르고 우승했다는? 그럼 그 뒤에 오는 빨간 머리 덩치랑 눈썹 두꺼운 덩치가 좌룡과 우룡인가? 저 사람들이 계룡문이야?

-그런가 봐요. 이야. 딱 봐도 엄청 강해 보이네요. 그, 최연소 16강 진출자라는 분은 누구시지?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아마 나만 들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꺄르륵. 꺄륵.”

하하민이 갑자기 끼룩거리며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했으니까.

***

“제 실책입니다, 검룡님. 그자가 벌써 깨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깨어났다 해도 상태가 엉망이었을 텐데 대체 그 몸으로 어찌 불꽃성까지 갔는지…….”

김영호는 황망한 얼굴이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올렸다.

복잡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분노. 당혹. 슬픔.

그 중 가장 큰 감정은…….

후회.

내가 정말로 남지호를 지키고 싶었으면 그를 처음 본 어제 새벽 마혈을 눌러서라도 내 숙소로 데려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남지호가 어둠속성이라는, 그가 혈귀단이라는 거악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꾸만 행동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회복중이라는 핑계로 의식을 잃은 그놈을 파천궁의 서울지부에 두고 결승전을 치르러 간 것도,

남지호를 계룡문 애들과 마주치게 하는 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실책이 있다면 나에게 있고,

잘못이 있다면 나에게 있다.

나는 창틀에 매달려 엿들은 남지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설사 그게 사실이어도, 악인이 되어버린 이의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가치 없는 자기변명.

‘대살육의 흑막이 염화검제라고 했지. 그로 인해 제 소중한 이를 잃었다고…….’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힘이 있는 자는 종종 복수를 선택한다. 얼마 전 내 손에 모가지가 떨어진 가기석처럼.

남지호에게는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 동생이 가기석의 동생과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폭행, 폭력, 그리고… 죽음.

그러나.

남지호가 마지막 순간에 염화검제를 향해 외친 소리는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염화검제!!!! 내 은인의 원수!!!! 어째서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동생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줬다 해도, 동생을 은인이라 칭하는 사람은 없다.

마치 혈육처럼 가까웠던 남지호의 가족과 한지혁의 가족.

남지호의 손에 끼워져 있던 엄마의 반지.

어쩌면 남지호가 칭한 그 은인, 남지호가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은…….

한지혁의 엄마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 해도, 뭐가 달라지는데.’

그 시작이 어떠했든 남지호가 악인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도, 혈귀단이라는 건…….

“혈귀단이라고요?”

“그렇다니까. 혈. 귀. 단.”

나는 오른손을 꽉 움켜쥐며 김영호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파천궁의 서울지부는 무력조직보다는 정보 수집을 위한 조직에 가까웠다. 그들에게 무력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한반도의 어떤 세력도 파천궁을 적으로 삼기를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정보력은 아마 일곱 길드에 비해 떨어지지 않을 터.

시상식이 끝나고 굳이 이곳에 들른 이유도 그래서였다.

파천궁 서울지부라면 한반도 최대의 테러조직 혈귀단에 대한 정보를 한가득 모아두었을 테니까.

힘들게 최지수 시켜서 찾을 필요가 뭐 있어. 이미 한 배 타기로 약조한 정보전문가가 여기 있는데.

근데 왜 이 새끼는…….

“혈귀단이라고요? 진짜?”

“지부장님 귓구멍 막혔습니까? 내가 좀 뚫어 드려?”

계속 되묻고 지랄이야.

스멀스멀 올라가기 시작한 내 오른손을, 최지수가 냉큼 붙들었다.

최지수 이놈은 내가 아무 데서나 대가리 후들겨 패는 사람인 줄…….

“혈귀단이라니. 검룡님, 제대로 들으신… 악! 그러믄요! 당연히 제대로 들으셨겠죠! 아악! 알겠… 악!”

“림아! 그만 해라. 아직 너를 모르시잖니. 이제 막 손을 잡았는데 지부장님께도 림이 네 방식을 알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시지 않겠냐.”

“응. 맞아. 형 말이 맞고, 이게 내 방식이니까 지부장님께 알려드려야지.”

잘 아네.

김영호는 가볍게 내력을 실은 6연타를 얻어맞고서야 겨우 제대로 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전 전국에서 대살육을 벌였던 KKK단에 대해서는 검룡님께서도 들어본 적 있으시겠죠? 암독을 퍼뜨려서 수천만 명을 사망하게 만든 일반인 테러 단체 말입니다. 검룡님께서 태어나셨을 즈음에는 이미 안산성 전투에서 패배해 해체되었…….”

꼭 누구처럼 설명이 길다.

내가 오른손을 들자 최지수가 벌리지도 않은 입을 다물었다.

“저기요, 지부장님. 그렇게 설명이 길면 독자들이 빡친다고요.”

“…네?”

“결론으로 바로 가자고.”

김영호의 말처럼 KKK단은 내가 태어났을 즈음 해체되었다.

놈들이 한참 날뛰던 ‘대살육의 시대’에 나, 서림은 태어나지 않았었다.

하지만.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대한민국의 멸망이라는 그 혼란의 시대에, 나는 박승주라는 이름으로 네 번째 삶을 살고 있었다.

박승주가 죽은 것은 다섯 살.

조각조각 떠오르던 검황의 기억에 따라 단전을 만들어내기도 전이었다.

박승주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오크의 가위팔도, 삼미호의 날카로운 이빨도 아니었다.

KKK단이 마을에 퍼뜨린 암독.

아버지가 암독에 중독되었고, 어머니와 두 언니가 전염되었다.

나는 가족 중 가장 마지막에 죽었다. 작은 손으로 가족의 시체를 화장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가 서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즈음.

그 KKK단은, 해체되어 지상에서 사라졌다.

길드 연합과 KKK단이 정면으로 맞붙은 안산성 전투.

그 전투가 길드 연합의 완승으로 끝났기 때문.

안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자가 바로 염화검제였다.

‘...염화검제가 그 전투 이후로 한반도의 영웅이 되었지.’

김영호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물었다.

“결론이라 하시면...”

“혈귀단 그 새끼들. 본진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모릅니다.”

“지금 분명 멈칫했는데? 지부장님, 우리 한 배 탄 거 아닌가?”

내가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자 김영호가 다급하게 두 팔을 내저었다.

“탔지요, 탔습죠! 왜 같은 편을 협박하십니까, 검룡님!”

“아, 이거? 그냥 습관이에요, 습관.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투덜거리던 김영호는 이내 두꺼운 파일을 내밀었다.

파일의 제목은 ‘혈귀단의 은신처’.

“이 새... 아니, 지부장님. 역시 유능하셔. 알고 있을 줄 알...”

...기는 구울 풀 뜯어먹는 소리.

“이게 다 뭐야? 은신처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 오백스물세 곳? 이걸 다 뒤지라고?”

“파천궁에서도 줄곧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길드 연합을 견제할 세력으로 활용하려는 기색도 있었는데...”

“있었는데?”

“보시다시피 못 찾았습니다. KKK단이 그렇게 망하는 걸 경험해서인지 은신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되물은 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걸 할 새끼들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딱 대기타고 있다가, 한 대 치면 부서질 그 순간에 나타나 그 한 대를 치는 게 그 새끼들 수법입니다.”

“막타?”

“예에! 그거요. 젊은 분이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자갈치 길드가 남(南)의 재앙 주작을 방어하느라 너덜너덜해 졌을 때 혈귀단이 뒤치기를 해서 부산성을 무너뜨렸다.

철원성이 몬스터 웨이브로 고립되었을 때 철원성주를 독살해서 철원성이 괴물에게 합락당했고.

횡성에서도 최강자가 방어전에서 죽은 후 후계자 다툼이 한창일 때 주술로 시체괴물을 일으켰다고 들었으니까.

...모두 몇 만 명씩 사망자가 발생한 혈겁이었지.

김영호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검룡님 어머니 소식을 남지호 그자가 알고 있다 하셨지요. 제가 실수하기도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혈귀단을 조지실 거라면 당연히 돕고 싶은데...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타깝게도 진심 같았다.

...근데 그 말을 왜 여기서 하고 그래.

최지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 있었다.

“림아! 어머니 소식이라니? 보육원 들어오기 직전에 가족 모두가 사망했다고 하지 않...악!”

아무튼 최지수 이놈은 눈치가 없어 큰일이다.

김영호가 가늘게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돌아가셨다니... 어째 말이 다르십니다, 검룡님?”

그 어머니 아니라고. 내가 가족관계가 좀 복잡해서 말야.

“그건 키워주신 어머니고. 이건 낳아주신 어머니.”

“...네?”

“뭐라고, 림아?”

이번에는 두 놈이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요히 중얼거렸다.

‘지혁이 어머니. 림이 어머니. 죄송합니다.’

***

랭킹전 우승, 8강 진출 2명, 참가한 전원 16강 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계룡에 돌아온 우리에게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다.

계룡성 북문에서부터 계룡문 본부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주변으로 발 디딜 데 없이 사람들이 들어찼다.

-검룡님!!!! 여기 봐주세요!!! 끼아악!!!

-좌룡님, 멋있어요!!!

-최연소 16강 진출자!!! 네가 최고다, 하민아!!!

김강산과 하하민은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연신 폭죽 대신 화염탄을 터뜨리고 얼음꽃을 허공에 새겨 넣으며 미쳐 날뛰었다.

“대표님, 왜 이렇게 늦었어! 너무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늦기는 무슨. 시상식 끝나자마자 발바닥 땀나게 뛰어왔는데.”

“알죠, 알죠! 이번에 엄청났다면서요. 세상에, 우승이라니. 저는 솔직히 우리 대표님께서 우승까지 할 줄은... 알았죠! 알았고말고요!”

박명칠과 조은조와 이바름이 펄쩍펄쩍 뛰며 김강산을 끌어안고, 하하민에게 뽀뽀를 날리고, 내 앞에서 춤을 춰대며 난리 부르스를 췄다.

그리고.

거의 퍼레이드가 되어 버린 귀갓길 끝에 계룡문 본부에 들어서자,

녀석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명칠이 형이 성 방어 책임자잖아. 형이 말해.”

“바름이 네가 직접 겪어놓고? 네가 훨씬 정확하지.”

…어쩐지 오바가 심하다 싶었다.

“뭔데. 또 뭐냐고.”

결국 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나서야 조은조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뭐가 어째? 만경상단에서 구매한 곡식을 산적한테 털려?! 내 피!!!! 내 땀!!!!! 내 눈물!!!!!! 내 곡식!!!! 내 도오오오오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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