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3)
“우리가 계룡성을 떠난 다음 날 바로 일이 벌어졌다니, 우리가 자리를 비우기를 노린 듯하구나. 내가 따라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내 실수다, 림아.”
“아니야, 지수야. 내가 대리 노릇을 제대로 못 해서 그래. 내 잘못이야.”
“대표님. 제가 상단 호위를 맡았습니다. 곡식을 잃고 목숨을 건져 돌아온 제 잘못입니다.”
이 새끼들이.
서로 제 잘못이라고 동료를 감싸면 내가 엉? 그만하고 넘어갈 줄 알고?
“그래. 잘못한 줄 알아서 다행이네. 딱 대.”
퍼버버버버벜.
거대한 혹을 쓰다듬으며 박명칠이 그동안 알아본 정보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최지수가 본디 알고 있던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주 맹랑한 놈들이었다.
“사람은 하나도 해치지 않고 곡식만 털어 갔어. 그 활빈당인 것 같아. 부유한 상단을 털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활빈당 말야.”
“지랄이 풍년이네. 지들이 다 처먹는지 진짜 나눠주는지 어떻게 알어.”
“아니다, 림아. 실제로 활빈당이 마을에 곡식을 놓고 갔다고 증언하는 야인들이 상당히 존재한다.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그래.
가난한 사람 돕는 거 좋다 이거지.
근데 도울 거면 지들 재산으로 도와야지, 이 새끼들이 감히 계룡문을 털어?
‘…내 피 땀 눈물 어린 돈으로 구매한 곡식을?’
아무래도 이 새끼들 확 다 잡아다가 각성촉진제 실험 대상으로 삼아야겠다.
여준후가 혼자 실험체 노릇 하느라 고생인데 말야.
“림아. 다행히 성 안에 비축해 둔 식량은 아직 남아 있다. 몇 달만 버티면 보리 수확이 시작될 것… 림아? 표정이 또 왜 그러냐? 설마...”
“설마라니, 형.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 이건 내 계룡문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아니다, 림아. 그건 지나친 생각…….”
“싹 다 잡아서 박살내야지. 초장에 제대로 잡아두지 않으면 또 비슷한 일 생긴다고. 눈 감았다 뜨면 호구 잡혀 있다고.”
이건 순수한 사실이다.
앞으로 계룡상단도 운영할 계획인 만큼, 이번 일에 더욱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최지수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림이 네 말이 맞다 치자. 그렇지만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는 산채를 대체 어떻게 박살내겠다는 거냐.”
이 사람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네.
“찾긴 뭘 찾아. 놈들이 찾으러 오게 해야지.”
***
덜커덩. 덜컹.
네 마리의 은빛갈기늑대가 끄는 수레 스물네 대가 우그러진 고속도로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주변의 풍경을 살피며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이틀 내내 인피면구를 쓰고 지냈더니 얼굴이 조금 답답했다.
갓 구운 일호꼬치의 맛을 보기 위해 만들어 둔 인피면구다.
그래 봐야 계룡문 본부 앞에 나가서 꼬치를 먹고 들어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삼십 분 안팎.
이렇게 오랫동안 인피면구를 쓰고 있기는 700년 만이다.
하지만 그 불편감은 그래도 참아줄 수 있는데 말이지…….
더 큰 문제는 어깨를 덮은 짙은 밤색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가슴팍에 집어넣은 두 개의 헝겊 뭉치.
움직일 때마다 헝겊 뭉치가 묘하게 피부를 스치는 느낌이 거슬려 뒈지겠다.
‘하… 내 팔자야… 이게 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앞에 앉은 김강산이 킬킬거리며 주절거렸다.
“설화야. 왜 아침부터 똥 씹은 표정이냐? 얼굴 좀 펴. 이쁜 미간에 주름이 아주…….”
“저기, 입 좀 닥치실래요?”
“어허. 이게 오.라.버.니. 한테 저기라니! 설화야. 따라해봐. 강.이.오… 하하. 설화야. 오빠 아픈데? 옆구리… 꼬집… 아윽… 아파요, 안 할게요…….”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김강산의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 눈썹도 검은색 염료로 물들여 숯처럼 시커멨다.
시커먼 김강산이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그저 그뿐, 얼굴은 여전히 아주 신나 보였다.
‘젠장. 며칠만 참자, 며칠만…….’
사흘 전.
그러니까, 우리가 계룡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계룡검룡’은 그 급한 성격대로 산적에게 곡식을 털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은영단과 50명의 계룡문 일대제자들을 이끌고 만경상단이 습격을 당한 지점, 완주 외곽으로 떠났다.
검룡의 상징으로 알려진 희고 거대한 매도 그들을 따라 출격했다.
검룡이 이끄는 계룡문의 원정대는 그 근방의 산, 구봉산과 연석산과 운장산 등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아주, 떠들썩하게.
그리고 나는…….
-그래, 좋은 작전이라 치자. 하지만 혼자는 안 된다, 림아.
-맞아, 형. 절대로 안 돼.
요즘 오냐오냐했더니 이놈들이 영 버릇이 없어졌다.
김강산과 최지수는 대가리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얻어맞고도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김강산을 달고 만경상단으로 향했다.
만경상단의 상단주 장만복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김강산과 나를 위아래로 여러 번 훑었다.
-어째 좌룡이나 우룡님께서 오시지 않고… 지난번에 은영단 분께서 계셨는디도 수레가 중간에 가로채였는디… 이거 고작 두 분이서 괜찮을랑가…….
니 눈앞에 있는 애가 그 좌룡이란다, 애송아.
니 눈앞에 있는 나는 검룡이고.
김강산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나는 김강산의 옆구리를 찌르며 장만복에게 대꾸했다.
-이번에 그놈들이 또 습격을 할까요?
-모르제라. 그놈들 맴을 내가 어찌 알것소. 근디 작년 중부지방 농사가 영 흉작이라 굶어 죽는 야인들이 많다데. 활빈당 갸들이 눈에 불을 켜고 곡식 수레를 터는 것도 그래서라고 하는디… 갸들 때문에 오히려 곡식 구입이 딱 끊겼어유. 지난번 계룡문하고 거래 이후 오늘이 첫 거래라우.
-아! 그러면 곡식이 급한 활빈당 놈들이 또 우리 수레를 습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좀… 걱정이 되고만유. 사실 운반 루트를 바꾸고 바꿔도 계속 습격당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쥐새끼가 있는 것 같은데…….
정보원을 심는 것은 작전의 기본 중 기본이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도 활빈당놈들의 정보원이 귀를 쫑긋거리고 있겠지.
그러니까, 잘 들으라고.
제 손으로 농사지을 생각 안 하고 남의 것 탐내는 더러운 산적놈 새끼야.
나는 크게 손뼉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참! 상단주님 걱정도 팔자시네! 이제 활빈당인지 활명수인지 하는 놈들도 끝이라고요!
-…어째서 그런감?
-검룡님께서 은영단 선배님들을 모두 이끌고 산적들 소탕하러… 아얏!
김강산이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설화야. 그걸 떠들고 다니면 어떻게 하냐.
-아. 죄송, 죄송해요. 강 오… 빠.
장만복은 철없는 막내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털레털레 저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
김제에서 출발한 스물네 대의 수레는 익산성의 외곽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익산과 논산 사이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발생한 거대 균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균열 주변으로 형성된 각종 괴물들의 서식지가 즐비했다. 10여 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지는 5급 위험 구역을 열네 대 수레를 끌고 통과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때요. 이제 알겠습니까?”
만경상단의 수송대 5팀 팀장 나홍규가 나를 향해 오른쪽 눈을 찡긋거렸다.
“네에. 그러느라 김제에서 계룡까지 일주일이나 걸리는군요.”
“짧지 않은 일정이지요. 하지만 설화 씨처럼 아름다운 분과 함께하니 일주일이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이건 그냥 성 밖에 죽어 있던 시체의 얼굴인데.
이놈 진짜 내 얼굴을 보면 놀라 나자빠지겠네.
나홍규가 콧구멍을 실룩이며 말을 이었다.
“설화 씨처럼 아름다운 각성자분은 처음 뵙니다. 계룡문 분들이 부럽습니다. 인기가… 아주 많으…….”
“설화 연인 있습니다. 수작 걸지 마십시오.”
김강산의 딱딱한 목소리가 나홍규의 말을 끊었다.
…응? 나 남친 있다는 설정이었냐?
“역시… 그러시겠지요.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짝이 없을 리가 없지요.”
나홍규가 나를 힐끗거리다가 물었다.
“그 운 좋은 연인 분은 누구실까요? 혹시… 검룡님?”
…저기요. 내가 나르시스트는 아니라서. 나랑 사귀는 취미는 없는뎁쇼.
내가 대꾸할 새도 없이 김강산이 냉큼 나홍규의 말을 받았다.
“설화는 좌룡님의 연인입니다.”
“아이쿠야. 그렇군요. 좌룡님도 대단하시지요. 이번 랭킹전에서 활약이 눈부셨다고 들었습니다. 지난 회 준우승자인 철기수를 꺾고…….”
“완벽하게. 박살내고.”
“그, 그래요. 완벽하게 박살내시고 8강까지 오르셨다고요. 듣자하니 벌써 청염을 만들어내셨다고……!”
“크흠. 큭.”
저절로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느라 김강산의 입술이 격렬하게 실룩였다.
그래, 니 좋을 대로 해라. 이놈아.
나는 둘이 지껄이는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넓게 펼쳐놓은 기감의 그물에 신경을 기울였다.
지난번에 습격을 당한 지점은 아까 전에 지났다.
2차선 도로의 주변으로 새싹이 돋기 시작한 나뭇가지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연한 녹색으로 덮인 나뭇가지 틈새로 봄날의 햇살이 가느다랗게 들이쳤다.
오직 그뿐.
아직은 잠잠하다.
‘젠장, 대체 언제 올 건데. 이렇게 게을러 터져서 산적질은 어떻게 해먹냐고.’
***
“저어기 있어, 형.”
서은창은 탐색술을 시전하느라 끌어올렸던 마력을 거두며, 우거진 수풀을 가리켰다.
“호위 숫자는?”
“계룡문에서 파견된 호위대 둘, 만경상단의 수송대 5팀 인원 일곱. 총 아홉.”
“진짜 그게 다라고? 따라붙는 놈들은 없냐?”
“그래. 확실해.”
활빈당의 당주 윤성득이 얼굴을 뒤덮은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거렸다.
“정말로 우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보구나. 하여튼 성에 틀어박힌 놈들의 생각이란 다 그 모양이지!”
검룡이 은영단을 비롯한 주력부대를 이끌고 완주 주변의 산을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 사흘 전이었다.
그동안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던 대로 계룡문의 실력은 꽤나 대단했다. 특히 은영단원들은 하나하나가 산오크를 손쉽게 제거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상대하지 않으면 장땡이지.’
윤성득은 백여 명 활빈당도를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절반에게 계룡문의 소탕 부대를 멀리에서 견제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나머지 절반을 이끌고 산을 내려왔다.
만경상단의 정보원으로부터 또 대량의 곡식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행선지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계룡이었다.
계룡성이 확장되고 성민이 세 배로 늘어났으나, 그들이 심은 보리를 수확하려면 아직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계룡문은 그 성민들에게 낮은 이율로 곡식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겨울과 봄을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곡식의 대부분은 김제평야에서 나왔다.
“대체 계룡문은 얼마나 부자이길래 겨울 내내, 그리고 봄까지 계속 쌀을 사가는 거냐.”
“존나 부자인가보지.”
부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윤성득에게 서은창이 가볍게 대꾸하며 어깨를 추켜올렸다.
활빈당의 부당주 서은창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만경상단의 수송대 5팀은 손쉽게 제압 가능한 수준이다.
계룡문의 두 명도 특별히 마력이 강하지 않다.
퇴로는 완벽히 준비되어 있다.
스물네 대의 수레에 실린 쌀은 지난번의 두 배의 양이다.
‘우리가 산으로 토껴서 숨어버리면, 아무리 성격 드러운 계룡검룡이라 해도 어쩌겠어.’
꿀꺽.
서은창이 침을 삼켰다
저 정도 식량이면 아직도 배 곪고 있는 근방의 야인들의 목숨을 일주일은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들도…….
“갈까, 형?”
“그래. 가자.”
윤성득의 말이 떨어지자, 서은창이 숨어 있는 부하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이내 나뭇가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그래서, 검룡님이 좌룡님을 붙들고 죽지 말라고 소리소리를 지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시는데, 캬아! 내가 그 모습을 보고 진짜 감동 이빠이 받아가지고 말야!”
“듣기로는 맨날 후드려 패신다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검룡님이 좌룡님을 엄청 아끼시나보네.”
“…후드려 팬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었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 좌룡님 머리에 혹이 사라질 겨를이 없다고. 강이 너도 본 적 있냐?”
“하하하. 하하하핳! 그거 그냥 말이 그런 거야. 이거 소문이라는 게 참… 홍규 너 그런 말 믿지 말어라.”
김강산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홍규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둘은 이틀째부터 말을 놓더니 이제 거의 절친 직전에 도달했다.
“그런데 강이 너 이름이 좌룡님과 비슷하네.”
“…아, 그거? 내가 좌룡님께 감명을 받아서 개… 그거 뭐냐, 그래, 개심! 그거 했걸랑.”
…개명이겠지, 멍청아.
나는 나홍규와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는 김강산을 향해 손짓을 했다
김강산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왜, 설화야? 오.빠. 한테 할 말 있어?”
…이 새끼가. 넌 계룡에 돌아가면 뒈졌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렸다.
“강 오… 빠… 으드득…….”
“어? 이상한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오,빠. 귀.좀.”
“어, 그래, 설화야. 왜?”
김강산이 실실 웃으며 무릎을 굽혀 귀를 가져다 댔다.
-왔다고, 이놈아. 근처에 있으니깐 마력 잘 감춰라. 너 흥분하면 마력 튄다고.
김강산이 눈을 찡긋거렸다.
안심하라는 거 같은데. 전혀 안심이 안 된다.
푸쉭. 푸쉬식.
절로 한숨이 샜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꿰어놓은 작은 구슬을 매만지며 정하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림 오빠, 여기 부탁한 거.
-…뭐냐?
-대표님, 말씀하시길래 아까운 마핵 쏟아부어 힘들게 힘들게 만들었는데 이러시면 연구원 기운 빠집니다.
정하영이 이마를 긁으며 내민 것은 새끼손톱만한 투명한 구슬이었다.
랭킹전에 다녀와서 정하영에게 지시한 물건이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대체 이렇게까지 어떻게 숨기십니까, 제 탐색술이 아직 부족한가 봅니다, 같은 말을 서울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아무래도 마력 제로는 너무 수상쩍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각성자들이 마력을 숨기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히려 내가 귀찮아졌다.
-평범한 일대제자 정도의 마력이야. 적당하지?
-그러네. 딱 좋다.
이 구슬과 김강산이 겨우 습득한 마력 억제 기술 덕에 이번 유인 작전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전의 성공은 이제 눈앞에 와 있…….
“습, 습격입니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놈들이 들이닥쳤다.
파바바바밧!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날아온 날카로운 얼음 화살이 단번에 주변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