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48화 (48/122)

48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反) (4)

“모두 제 위치로!”

나홍규가 채찍의 손잡이를 쥐며 외쳤다.

이미 모두 제 위치에 있는데 영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이러니까 멀쩡한 수레를 강탈당하지.

“설화야. 걱정 말고 내 뒤에 서라.”

김강산이 검자루를 움켜쥐며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 오빠. 제발 조심하라고.”

“설마 설화 너 지금 나를 걱정해주는 거냐?”

마력 튀지 않게 조심하라는 소리라고.

그 실룩거리는 입술도 좀 붙잡아 놓고.

파앗!

나는 강철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얼음화살을 쳐냈다.

검룡의 상징으로 덩달아 유명해진 월영검은 엉겁결에 검룡의 대역 노릇을 하게 된 하하민의 손에 들려 있었다.

물론 하하민이 나와 비슷한 건 키와 덩치 정도지만…….

이 멍청한 산적놈들을 속여 넘기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나무 뒤에서 느껴지는 산적들은 어림잡아 오십여 명.

은영단 수준의 마력을 지닌 놈들도 열 명가량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조밥이군.’

놈들은 한참 동안 얼음화살과 바윗덩이만 쏘아댈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쪽의 마력이 다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화염탄이나 화염구를 안 쏘는 건 아마 곡식 수레가 탈까봐 염려했기 때문일 터.

그리고 놈들의 작전은 통했다.

만경상단 수송대원들의 반격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약해진 석벽을 깨뜨린 얼음화살이 나홍규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그걸 시작으로, 수송대원들이 하나 둘 부상을 입고 바닥에 나자빠졌다.

나는 날아드는 얼음 화살을 열심히 쳐냈다. 점점 힘이 빠진 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김강산은 걱정과 달리 허접한 연기를 꽤 잘 수행하는 중이었…….

퍼벅!

얼음 화살 하나가 내 검격에서 벗어나 다리 사이 바닥에 처박혔다.

“설화야!!!!”

김강산이 검을 휘둘러 열세 개 화살을 박살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형! 지금 맞을 뻔……!

-이게 돌았나. 너랑 나 지금 허접이라고. 너무 잘 막지 말라고 내가 말 했냐, 안 했냐.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부상을 입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이 새끼가. 약한 척 한다고 진짜 약해지는 줄 아나 …내 손목 안 놓냐?

-안 되겠다. 내가 막아줄 테니까 내 뒤에 그냥 있으라고.

-이거부터 놓으라고. 이 새끼야. 너 나중에 뒤지게 맞는다?

-…싫어. 또 형 혼자 저놈들 쫓아가려고?

오… 김강산 이놈이 이렇게 눈치가 생기네.

상황은 좀 엄하지만 말이지.

‘산에서 내려왔다.’고,

분명 남지호는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남지호는 죽었다.

아마 한지혁의 엄마도 죽었겠지. 엄마의 반지를 남지호가 끼고 있었던 것에서 이미 엄마의 죽음을 확신했다.

남지호의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 죽음에 염화검제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한지혁의 엄마다. 서림의 엄마가 아니다.

서림에게는 서림의 삶이 있다.

서림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이 있다.

엄마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알려줄 남지호는 이미 죽었고,

혈귀단을 들쑤시는 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묻어두려 생각했었다.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또 기회가 생기더라고.

죽어라 은신하는 혈귀단 새끼들을 단번에 찾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산사람들끼리 또 통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선빵필승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타쌍(一打雙)… 아니,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기회.

그러나.

혈귀단을 쫓는 것은 한지혁의 기억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계룡문과 혈귀단이 악연을 쌓게 될지도 모른다.

겁을 상실하고 계룡문의 곡식을 털어간 미친놈들을 박살내는 건 계룡문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혈귀단의 뒤를 좇는 것은 그저 내 마음이 편해지고자 하는 일.

기왕이면 애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김강산아.’

-내가 뭘 어쩐다고. 너 형 못 믿냐?

-어. 당연하지.

김강산이 내 손목을 억세게 움켜쥐며 작게 대꾸했다.

-안 놓고 가. 걱정도 팔자네. 너 이러다가 이번 작전 다 망친다? 그러면 계룡문 곡식 털린 건…….

-지수 형이 어떻게 해서든 형한테 붙어 있으라고 했어. 형이 순순히 곡식만 찾아서 돌아올 리가 없다고.

하하.

하하하.

보는 눈이 있는데 이걸 후려팰 수도 없…….

“당장 그 손 떼! 두 손 머리 위로 올려! 말 들으면 해치지 않는다! 말 안 들으면… 팍! 씨!”

나무 뒤에 놈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며 외쳤다.

가무잡잡한 멀대놈이다.

뒤이어 나머지 50여 명의 산적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놈은 삼국지의 장비처럼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거한이었다.

느껴지는 마력으로나, 등장 순서로나, 이 산적놈들의 대가리다.

내가 어금니를 꽈악 깨물며 외치려는데, 김강산이 선수를 쳤다.

“이 새끼들, 감히 계룡문을 공격하…….”

“이거, 이거. 그 대단하신 계룡문에서도 내분이 있었고만?”

두목놈이 김강산의 말을 툭 끊으며 클클거렸다.

‘…이놈들 지금 뭐라는 거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면서 김강산을 향해 눈짓을 했다. 김강산이 눈을 끔벅이며 슬그머니 검을 내렸다.

내가 이 수레만 지키고자 이 꼴을 하고 사흘간 호위 노릇을 하며 따라온 게 아니라고.

이제 니들 뒤를 추적하기만 하면 본진 터는 건 순삭…….

“계룡문도 결국 다를 바 없네? 적을 앞에 두고 하는 짓거리가 연약한 여자를 겁박하는 짓거리냐? 아주 잘하는 짓이다. 아주 잘하는 짓이야.”

…이 멀대놈은 또 뭔 헛소리다냐.

설마 방금 김강산이랑 투닥이는 걸 보고?

김강산이 나를 붙잡고, 내가 그걸 뿌리치려 하고, 김강산이 그 큰 덩치로 연약한 여자… 어… 그게 나를 겁박하는 거로 보인건가……?

나는 슬쩍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쥐었다.

“무슨 개소리냐? 산적 새끼들 입 터는 거 봐라. 겁도 없이 감히 계룡문을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김강산의 말은 끝맺지 못하고 잘려나갔다.

내가 가느다…랗고 높…은 비명을 외치며 멀대놈을 향해 뛰어들었기 때문.

김강산의 눈알이 데룩데룩 굴렀다.

버퍼링 중이다.

그리고, 김강산의 버퍼링은 아주 오래 걸리지.

“제 뜻은 처음부터 계룡문에 있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떠날 기회만 찾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의뢰를 수행하는 중에도 좌룡님께서는 저에게 감시자를 붙여 놓으시고… 흑! 흐윽!”

놈들의 오해에 서사를 보태며 나는 슬쩍 눈을 내리깔며 검지로 눈물 없는 눈꼬리를 닦았다.

방금 내가 만들어낸 내 가녀…린 손목의 시퍼런 멍이 아주 잘 보이는 최상의 각도.

-허얼… 아까 좌룡님의 연인이라는 말이 그러면……!

-아까부터 우리 견제하는 거 보셨잖아요. 아주 말도 못 붙이게 하던데요.

-그러게나 말이야. 그 대단한 좌룡님께서도 사랑 앞에서는 쪼잔한 인간일 뿐이군.

-그게 어디 사랑입니까? 그건 스토킹이라고요, 스토킹!

얼음화살에 처맞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홍규와 만경상단의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산적놈들도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더불어, 김강산도.

“다들 무슨 개소리야! 설화는 사실 좌룡의 여친도 아니라고! 좌룡은… 설화는… 어… 그러니까…….”

-어이구. 이제 자기가 한 말도 부정하네.

-이 사실이 좌룡님께 알려지면 강이 씨, 큰일나는 거 아닙니까? 사랑에 눈먼 남자는 물불 안 가리는데.

-아까는 사랑 아니라면서?

-그죠, 그렇죠.

‘이놈들아, 다 들리거든요.’

어차피 뒤를 추적할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썩 마음에 들게 돌아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놈들과 함께 가버리면 탐색술이 없는 김강산은 혼자 터덜터덜 계룡으로 돌아가겠지만.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거든.

“제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 야인 출신입니다. 산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어요! 힘도 세고, 검질도 남부끄럽지 않게 합니다. 제발,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좌룡님의 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이야.

나 배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강산이 입술을 실룩이는 사이 내 눈 앞에 선 멀대놈과 수염놈의 동공은 지진나듯 흔들리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계룡문과 척지면 어째. 그러면 처음 은창이 네 이야기하고 달라진다고. 좌룡이 열 받아서 우리 활빈당을 죽어라 쫓으면? 엉? 어쩔거냐?

-그렇다고 저 여자를 걍 버려? 두목. 그런 사람이었냐?

-버리다니. 좌룡 정도면 아주 훌륭하지. 그 정도 남자가 저 좋다고 난리면 감사하다, 하고 덥석 받아야지.

-와. 형 진짜 인성…….

수염놈과 한참 입씨름을 벌이던 멀대놈이 결단을 내린 듯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길쭉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래, 아가씨. 같이 갑시다. 아가씨 이름이 뭐요?”

김강산은 완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나는 그런 김강산을 향해 작별인사를 했다.

“강이 오빠. 좌룡님께 부디 내 뒤를 쫓지 말라고 전해드려 주세요.”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뒈지지 않으려면 말이야.

***

산은 깊었다.

나는 적당히 힘든 척을 해가며 수염놈과 멀대놈의 뒤에 따라붙었다.

내 예상대로 수염놈이 두목이었다. 활빈당 당주 윤성득.

그리고 멀대놈은 부당주 서은창.

스무 개 넘는 봉우리를 넘고 서른 개 넘는 골짜기를 건너 도착한 장소는 습격을 당한 구봉산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전주성 남쪽의 경각산.

구봉산에서 직선거리로 40킬로미터가 넘는다.

‘이 정도 거리를 두고 본거지를 옮겨 다니면 확실히 찾기 어렵겠네.’

서은창이 나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설화 씨. 고생했수다. 이제 다 왔습니다.”

“저도 이래 봬도 각성자인 걸요. 계룡문의 훈련은 훨씬 더 빡세요.”

나는 입술 끝을 들어 올려 마주 웃어 주었다.

“…제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몸 고생보다 더 힘든 것이 마음고생이라 하더라고요. 언제 뒤질지 모르는 인생인데, 이제 설화 씨 땡기는 대로 살아요. 아. 우리 활빈당에 들어오는 것도 좋고요. 우리가 이래 봬도 저 홍길동의 뜻을 이어가지고…….”

가벼운 척 지껄이는 서은창이 목소리에는 옅은 연민이 배어 있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냐. 이런 순진해 빠진 놈이.’

밤새 걸으면서 주고받는 놈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어 보니 이 활빈당 놈들은 세간의 평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상단의 물건은 빼앗지만 사람을 해치지는 않고,

상단의 물건은 빼앗지만 야인을 약탈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약탈한 재물은 산기슭의 가난한 야인들과 함께 나눈다.

밤새 산을 넘으며 나는 활빈당 놈들의 처분에 대해 어느 정도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계룡문에서 털어간 곡식은 돌려받아야겠지. 그리고 그 뒤에는…….

‘이놈들의 활동 구역에다 아예 루트를 뚫어?’

나름대로 정보원을 갖추고 세력을 형성한 무력 집단이다.

활빈당과 손발을 잘 맞추면 오히려 안전하게 김제 평야의 곡식을 수송할 수 있을 터.

손발을 맞추는 일은 간단하지.

내가 머리가 되고, 이놈들을 내 손발로 만들면 되니까.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는 내 시선을 서은창이 뻗은 팔이 가로막았다.

그가 고개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로 다 왔네요. 저기 고개만 넘으면 우리 활빈당도들이 싹 자리 잡고, 천막 싹 쳐 놓고 있을 거라고요.”

그래. 다 온 거 같네.

서은창이 가리킨 고개 너머에서 마력이 일렁이고 있…….

“부당주님. 나머지 인원이 오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죠? 검룡이 이끄는 은영단 유인하던 당도들이니깐.”

…그렇다면 좀 이상한데.

나는 기운을 끌어올려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그물에 걸리는 기운은 오십이 훨씬 넘었다.

백? 이백?

조금 더 가까워지자, 예민한 청각에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무엇인가가 불타는 냄새에 비릿한 뒤섞인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