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설화 누님 전사(戰史) (1)
“두목. 아무래도 은거지가 공격을 당하고 있는 거 같아.”
“공격? 우리 은거지를? 누가? 왜?”
뒤늦게 탐색술로 상황을 파악한 서은창이 빠른 걸음으로 윤성득에게 다가갔다.
…또 싸움박질이냐.
제기랄. 이게 주인공의 인생이냐고.
어째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는 게 아주 피곤해 뒈지겠다.
“부당주님, 싸움났어요?”
“어어, 별일 아니에요. 여기 잠깐 있으면 우리가 금방 해결해가지고…….”
서은창이 무릎을 굽혀 나와 눈을 맞추며 나를 안심시키려 아무 말을 주절거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화염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서은창! 헛짓거리 때려치우고 일단 가자고!”
“…그래!”
뒤따르던 산적들이 수레에서 탈취한 곡식을 얹은 지게를 내려놓고, 윤성득과 서은창의 뒤를 따라 빠른 속도로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
“내장산채인데?”
“그 악귀들이 왜 여기 나타나!”
“그건 나도 모르지, 두목!”
나는 날아오는 화염탄과 화염구와 얼음창과 바윗덩어리와 얼음화살과 얼음송곳과 화염벽과 검과 도와 철퇴와 이거저거와 저거이거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했다.
‘모르기는 뭘 몰라. 니네가 빈집털이 당한 거네.’
당연히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헐레벌떡 도망쳐 나온 활빈당의 졸개놈이 미리 옮겨 놓은 재물과 곡식을 모두 털렸다고 윤성득에게 보고했으니까.
그리고 뒤이어 내장산채의 두목놈이 3미터가 넘는 장창을 휘두르며 등장했다.
“아하하! 여기는 오늘부로 우리 구역이다! 등가죽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썩 꺼져라, 성득아!”
“이 새끼가……!”
윤성득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단지 그뿐, 윤성득은 별다른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대충 훑어도 알 수 있을 만큼 판세가 명확했다.
보아하니 먼저 도착해 있다던 활빈당놈들은 임시 거처를 만들던 중에 기습을 당한 모양새였다.
와이번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 다듬다 만 나무 사이 이곳저곳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이미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진 놈들도 열 명이 넘었다.
느긋하게 주위를 훑는 나를 향해 서은창이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지금까지의 가벼운 태도를 버린 서은창이 꽤나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화 씨. 당장 이곳을 떠나요. 나도 산적질로 먹고 살기는 하지만, 저놈들은 아주 질이 나쁘다고요. 설화 씨를 발견하면…….”
“발견하면?”
“…입에 담지 못할 일을 당하게 될 수도 있어요.”
“입에 담지 못할 일? 그게 뭘까나?”
서은창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바싹 낮췄다.
“좌룡이 설화 씨에게 감정을 강요했다고 했죠?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하지만 저 새끼들한테 잡혔다가는 완전 좆되는 겁니다. 좌룡 옆에 붙어 있을 걸 괜히 나댔다고, 평생 후회할 걸요.”
그래, 그렇겠지.
이 내장산채 놈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나름 착…하게 산적질을 하는 활빈당과는 결이 다르다.
놈들의 악명은 나도 알고 있었다.
김영호가 가져온 523곳의 ‘혈귀단의 은신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곳’ 중 하나에 내장산채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아주 악독한 새끼들입니다. 물론 알려진 내장산채의 세력은 혈귀단에 비해 발톱의 때 수준이만요. 활동 범위도, 혈귀단은 전국적인데 내장산채는 말 그대로 내장산 주변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혈귀단이 내장산채로 위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명단에 포함시켰습니다.
김영호가 그 이유로 제시한 혈귀단과 내장산채의 단 하나의 공통점은 오직 ‘악랄함’ 하나였다.
그러니까, 김영호가 수집한 정보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내장산채 놈들이 혈귀단일 가능성은 523 분의 1.
그리고,
거악일 가능성은…….
100퍼센트.
“설화 씨. 제 말이 말 같지 않아요? 당장 여기를 떠나라고요. 지금 상황이 급합니다. 나도 설화 씨를 지켜 준다고 장담 못 해요. 제가 인근의 괴물 서식지를 표시한 상세 지도를 드릴 테니…….”
서은창의 말이 꽤나 빨랐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자빠졌냐고.
아주 멍청한 새끼들이다.
그리고…….
‘아주 재밌는 놈이야.’
나는 입술 끝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서은창을 불렀다.
“야.”
“…네?”
“너 이 새끼,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네에?”
서은창이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굳이 대꾸할 필요는 없겠지.
타닷.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총알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설화 씨이이이이-----!!!!”
여기도 최지수 같은 놈이 있네.
그래, 마치 소화 같은…….
다급하게 내 뒤를 쫓는 서은창의 발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뒤이어, 욕설과 함께 화염탄과 바윗덩이와 얼음 화살이 연달아 나를 향해 날아왔다.
기운을 끌어올리자, 의지에 따라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강철검의 검날을 희게 빛냈다.
나는 허공에 몸을 띄운 채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좌하향으로 내리그은 검날이 날아오는 화염탄을 가볍게 튕겨냈다.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쿠웅, 쿠웅, 바닥으로 떨어지고,
파바바바밧.
희뿌연한 검막에 가로막힌 얼음 화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기화했다.
“저 새끼 뭐야! 활빈당에 저런 새끼가 있었어?!”
“…모, 모릅니다!”
“씨발, 공격해! 저 새끼부터 잡아!”
정점을 찍은 내 몸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음창과 거창, 묵직한 철퇴가 차례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직!
검끝으로 솟은 검기가 얼음창의 창끝을 정확히 가격했다.
어깨를 비틀어 거창을 흘리고 동시에 왼손으로 탄지공(彈指攻)을 시전하자,
손가락에서 작은 돌 세 개가 튕겨져 나갔다.
내력을 품은 돌조각이 내가 착지할 지점에 버티고 선 놈들의 허벅지를 관통하고, 뱃가죽을 관통하고, 어깨를 관통했다.
“크아아악!!”
“내 팔! 내 다리!!!”
놈들이 피를 뿌리며 병장기를 떨어뜨리는 사이,
나는 얼음창을 박살낸, 수평을 찔렀던 검을 그대로 우상향으로 휘둘렀다.
카앙!
내 어깨를 노리고 휘두른 철퇴가 검에 가로막혔다.
마력으로 강화된 철퇴는 한 번에 박살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가가가가가가가강!
정확히 같은 점을 서른세 번 올려치는 연격을 버틸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다.
지름 10센치짜리 시커먼 철퇴가 마치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무슨 힘이 이렇게……!”
서른네 번째 우상향으로 휘두른 강철검의 검날이 철퇴놈의 팔꿈치를 지났다.
흰 직선을 따라 붉은 피가 튀고,
뒤이어 내 발이 바닥을 디뎠다.
발바닥 아래에서 무엇6쪽 ‘인가가 물컹거렸다.
방금 전까지 철퇴놈의 팔이었던 덩어리였다.
“서, 설화 씨, 아니, 설화 누님……?!”
서은창이 허겁지겁 내 뒤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바싹 얼은 내장산채의 산적놈들이 나를 동그랗게 포위했…….
…니들이 포위해놓고 니들이 물러서면 어쩌자는 건데.
내가 고수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서은창이 눈치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기세를 올렸다.
휘익. 휘익.
검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놈들이 움찔거렸다.
“별것도 아닌 새끼들이! 감히 우리 활빈당 뒤치기를 해?! 산사람의 상도의도 없는 악랄한 새끼들!”
서은창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딱딱하게 쫄아 있던 방금 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낯짝 두껍기가 김강산에 하하민을 더하고 거기다가 설표를 보탠 수준…….
…최악인데?
내가 오른발을 떼자 놈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왼발을 떼자 놈들이 우르르 또 반대쪽으로 물러섰다.
“그래 봐야 계집애 하나한테 바싹 얼어 있냐! 그년 손모가지 잘라 온 새끼는 오늘부터 부채주로 임명한다!”
멀리, 50여 미터 뒤에서 내장산채의 두목놈이 바락바락 소리를 쳤다.
“어절씨구? 시대가 어느 땐데 저런 성차별적인 소리를 지껄이냐. 사실 지가 가장 쫄아 있으면서.”
“그렇…죠……?”
서은창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맞장구를 쳤다.
그래, 이제 너도 내가 검룡인 걸 알았…….
“와. 근데요. 설화 누님. 엄청 강하시네요. 이야, 계룡문은 지나가는 개새끼도 강하다더니. 진짜 지리네요. 힘숨찐이신 줄 몰라뵈고 제가 나댔었네요. 아까 드린 말씀 잊어주세요. 와. 존나 쪽팔리네, 나.”
…이놈은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주변에서는 여전히 활빈당과 내장산채가 엉켜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내장산채의 놈들은 일백 명가량.
멀쩡한 활빈당의 놈들은 육십 명가량.
‘일단 내장산채 대가리부터 조지고 생각할까.’
내가, 아무리 거악이라도 일백 개 대가리를 다 잘라내는 살인귀는 아니니까 말이지.
나는 검을 흔들며 나를 포위한 내장산채 놈들을 향해 친절하게 물었다.
“맞고 비킬래? 비키고 맞을래?”
한 놈이 불쑥 대꾸했다.
“…비키고 안 맞는 선택지는 없습니까?”
“알면서 뭘 물어.”
악인한테 그런 선택지가 있겠냐고.
“씨발, ㅊ…….”
콰직!
내가 걷어찬 덩어리, 철퇴놈의 뭉그러진 팔뚝이 놈의 아가리에 틀어박혔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때는 피범벅이 된 으깨진 덩어리일 뿐이지만.
기를 불어넣으면 니들이 휘두르는 철퇴 따위보다 훨씬 단단하거든.
놈의 아가리에서 탈출한 이빨 여섯 개가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름이, 믈 흐그 읐는드!”
이빨 빠진 놈이 피를 튀기며 지껄였다.
“안 오냐? 그러면 내가 간다?”
나를 에워싼 놈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닥을 걷어찼다.
동시에, 사방에서 거센 파공성이 울렸다.
머리를 향해 철퇴가 날아들었다.
가슴팍을 향해 먼저 창이 뻗어왔고, 꼬리를 물듯 검이 뒤따랐다.
거대한 도가 막 돋아나기 시작한 봄의 새싹을 잘라내며 허벅지를 노렸다.
하나하나가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강맹한 공격이다.
…만약 내가 맞는다면 말이지.
“지나가던 모기가 검에 앉겠다, 새끼들아.”
나는 머리를 기울여 철퇴를 회피하고 동시에 검을 뻗었다.
강철검의 검날이 철퇴놈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챙!
저들끼리 내뻗은 창과 검이 뒤엉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이미 떠난 자리, 등 뒤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어깨로 철퇴놈의 가슴팍을 들이받으며 한 번에 검을 잡아뺐다.
허공에다 있는 힘껏 거도를 휘두른 놈의 다리가 바로 눈앞이었다.
놈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으나,
스파앗!
내 검이 세 발쯤 더 빨랐다.
땅에 닿을 듯 수평으로 휘두른 검이 놈의 두 발목을 동시에 잘라내자,
놈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곧이어 그 어깨가 바닥과 격렬하게 키스를 했다.
내가 지나온 등 뒤로 붉은 길이 그려졌다.
“…귀, 귀신, 검귀다!!!!”
저기. 이쯤이면 검룡이란 걸 눈치 챌 때가 되지 않았니.
‘뭐, 이것도 나쁘지 않지.’
녀석들은 내 정체는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내 실력과 자신들의 실력의 차이는 충분히 파악한 듯했다.
항복하라면 당장 항복하고, 무릎을 꿇으라면 당장 꿇겠지.
…근데 난 그럴 생각이 없는 걸?
그 목숨들을 당장 거두지는 않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고통을 충분히 맛보여줄 필요가 있다.
약한 이들의 재물을 빼앗고, 겁탈하고, 베고, 죽인 악인들이다.
자신의 피로 치러야 할 대가가 산처럼 높게 쌓인.
이놈들은 그 악행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오직 그것을 위해…….
‘하하. 웃기는 소리군.’
아니지.
아니고말고.
‘나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자고.’
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울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우상향으로 휘두른 검날이 한 놈의 무릎을 지났다.
그대로 내려벤 검이 한 놈의 어깨를 지났다.
정면을 찔러 들어간 검이 한 놈의 뱃가죽을 관통하고,
피분수와 함께 빠져나온 검이 다음 놈의 팔목을 베어냈다.
발이 아주 가볍다.
팔이 검처럼 움직인다.
아주, 아주 흥겨운 기분.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람을 가른 내 검이 경쾌하게 허벅지를 하나를 잘라냈다.
최지수 걱정도, 김강산 걱정도, 계룡문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
남지호가 왜 어둠술사가 되었는지도, 혈귀단이 뭐 하는 새끼들인지도, 남지호가 염화검제에게 갚으려던 원수는 대체 어떤 연유인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저 피 속에서 피를 만들며 베고, 찌르고, 휘두르면 그만이다.
‘이놈들은 악인이니까. 모두 죽어 마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