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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50화 (50/122)

50화. 설화 누님 전사(戰史) (2)

아주 흥겨운 기분으로, 나는 연신 검을 휘둘렀다.

김강산과 최지수와 함께 갓 구운 꼬치를 뜯으며 맥주를 마실 때처럼.

달그림자가 비추는 월영호를 내려다보며 소화와 표와 술을 나눌 때처럼.

흥겹고, 또 흥겹다.

내가 가진 힘.

상대의 생사를 한 손에 쥔 이 느낌.

‘힘을 가진 이들 중 제 힘에 취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호조수(虎爪手)가 한 놈의 팔꿈치를 박살내고,

선풍각(旋風脚)이 한 놈의 두 무릎을 동시에 아작냈다.

취원보(取猿步)를 운용하여 한 놈의 뒤통수를 잡아 바닥으로 메다꽂고,

뒤이어, 태청풍뢰검(太淸風雷劍)의 백청강기(白淸剛氣)가 허공을 수놓았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인다.

의지를 발(發)하는 것만으로도 검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

“…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아가씨… 제발, 살려주십시오…….”

놈들이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피의 바다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

-사형. 혈향이 짙습니다.

-…냄새 나냐? 씻는다고 씻었는데.

-얼마나 많은 이의 목숨을 거두신 겁니까.

-뭐, 그냥, 한 이백 개? 오백 개?

-…사형.

-소화야. 그놈들이 얼마나 거악인데. 사부께서도…….

-검(檢)은 즉 협(俠)이며, 협은 곧 악(惡)을 멸(滅)하는 것이라 하셨지요.

소화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반듯한 이마가 조금쯤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주름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뻗었다가, 가까스로 움켜쥐었다.

-저는 그저…….

소화가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봄바람이 소화의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지나갔다.

-…피가 피를 부를까 두렵습니다. 악인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언제나처럼, 소화의 염려는 옳았다.

내가 박살낸 마적의 잔당들이 복수를 위해 월악문을 공격했다. 월악의 제자 일곱 명이 마적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내가 중원나들이를 떠나 월악문을 비운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내 당장 그 새끼들을……!

-사형!

표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뒤이어 소화가 고개를 저었다.

-월악을 공격한 이들의 목숨은 저희가 거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아이들이 돌아오나요. 죽은 아이들이…….

깊은 후회와 슬픔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소화가 염려는, 복수도 아니고 원한도 아니고 피가 피를 부르는 상황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소화는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나를, 내가…….

협(協)이라는 이름으로 악(惡)을 멸(滅)한다는 미명 아래,

부모를 죽인 마적들에게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를 덧붙여가며.

내 검 아래에서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그 팔목을 부수고.

손가락을 자르고.

마지막으로 그 더러운 목을 기름기 흐르는 몸뚱아리에서 잘라내고.

‘내가, 이렇게, 피의 무게에 무감해질까봐…….’

처음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순간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는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무감했을까.

떨어져 나간 모가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을까.

내가,

나조차도…….

“살, 살려주십시오!”

악인 한 놈이 검을 내던지며 무릎을 꿇었다.

그놈을 시작으로, 물결처럼 놈들의 무릎이 땅과 맞부딪쳤다.

또옥.

또옥.

내 손에 쥔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악인들의 피가 바닥을 붉게 적셨다.

소화의 말이 옳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그러나…….

악인이 제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악인은 거악이 되고, 거악은 더욱 몸체를 키운다.

멸하는 검보다 지키는 검이 무겁지만,

지키기 위해서는 멸하는 검을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허나 소화야. 염려하지 말거라. 네 사형은 이제, 검에 혼을 빼앗기지는 않을 테니까.

땅을 흥건하게 젖힌 피와 주변을 가득 메운 팔다리와 별개로,

죽은 놈은 없었다.

이제 나는 그런 식으로 악인을 벌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철퍽.

철퍽.

내 발이 피로 축축해진 땅을 밟았다.

나는 모세의 홍해처럼 갈라진 붉은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서은창이 냉큼 내 뒤에 따라붙었다.

얼빠진 얼굴로 멍청하게 서 있던 윤성득이 서은창의 날랜 손짓에 주춤주춤 다가와 서은창 옆에 나란히 섰다.

짧은 레드카펫은 금방 끝났다.

그 끝에는 곧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뜬 내장산채 두목놈이 핏줄 선 팔을 부들거리며 서 있었다.

“윤성득 이 새끼! 산 아래에서 용병을 고용해? 산사람의 명예는 똥구녕으로 처박았구나! 이 비겁한 새끼! 네 부하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으냐!”

놈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윤성득 이놈은 이걸 또 듣고 앉았네.

계룡문이 이런 놈한테 곡식을 털렸다니. 부끄러워서 어디다 얘기도 못 하겠네.

“설화 씨는 용병이 아니다. 그저 계…….”

윤성득이 옆구리를 움켜잡으며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기껏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그걸 왜 말하고 앉았냐고.

나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혓바닥이 긴 거 보니까 너도 악인이구나?”

“…이 어린 계집이! 어디서 검 좀 배웠나 본데…….”

“너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돼?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기를 세우네? 그래도 안 귀여워, 이 새끼야.”

아직까지 병장기를 들고 선 내장산채 놈들은 셋뿐이었다.

눈앞의 두목놈, 그 뒤에 안절부절못하고 선 눈썹에 칼자국 있는 놈, 그 옆에 어금니 악물고 있는 어깨에 용문신 새긴 놈.

나머지 내장산채 놈들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야, 두목놈아.”

“공명주입니다. 설화 누님.”

서은창이 내 귀에 가만히 속삭였다.

…이놈도 뭘 모르네.

“은창아. 엑스트라한테 이름이 왜 필요하냐.”

“…네?”

“쟤는 이번 장면 끝나면 다시는 안 나올 거라고.”

그냥 두목놈으로도 충분하지.

두목놈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다음 순간, 놈을 향해 마력이 일렁이며 모여들었다.

기다란 장창의 날카로운 창날에 맺힌 검은 기운이 선명했다.

‘암독… 어둠속성이군.’

어둠속성이라고 다 혈귀단인 것은 아니다.

혈귀단이라고 모두 어둠속성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장산채는 혈귀단이 아니다.

523분의 1의 가능성은 진작 날아갔다.

아무리 비겁한 술수를 썼다지만, 혈귀단은 자갈치 길드를 망하게 만든 놈들이다. 적어도 계룡문 일대제자 수준은 될 터.

남지호의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김강산과 최지수 사이… 정도였을까.

…정확한 실력을 확인하기에는 그와의 재회는 너무 짧았다.

‘이놈들은 혈귀단이라 하기에는 너무 약해.’

그래도 사파일맥상통(邪派一脈相通)이니, 일단 물어나 볼까.

“씹새끼야! 이거나 받아라!”

“거절할래.”

사람이 기껏 생각하고 있는데 끼어들고 지랄이니.

두목놈이 거절을 거절하는 고함을 지르며 거세게 장창을 뻗었다.

동시에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놈들이 장창의 양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있는 힘을 다 쏟은 맹렬한 공세.

장창을 피한 나를 검으로 찌르고,

그 틈을 타 암독을 퍼뜨리고 혼란을 틈타 탈출할 생각…….

이겠지만.

“암독입니다! 조심하십……!”

서은창의 외침을 귓등으로 들으며 나는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검이 지나간 길, 그 뒤에 남은 검기가 순식간에 희뿌연 막을 만들어냈다.

넓은 면적의 자잘한 공격을 방어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검막(劍幕).

‘이걸 이렇게 구부리면…….’

나는 검을 쥔 오른손목을 조금씩 비틀었다.

내 가슴팍에서 평평한 원을 그리던 검의 궤도가 둥그렇게 휘어지고, 이내 반구(半球)형의 오목한 모양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두목놈이 내뻗은 창날의 뾰족한 끝이 그 기의 그물에 닿았다.

콰아아!

격렬한 타격음이 귀를 때렸다.

다음 순서는, 창날에 맺혀 있던 검은 기운이 암독무가 되어 흩어지는 것.

나는 손목을 더욱 비틀었다.

스파앗!

강철검의 검날이 두목놈의 창대를 잘라냈다.

그리고 검이 지나간 길에 남은 희뿌연한 검기가 열려 있던 검막의 나머지 절반을 채웠다.

반구형의 검막이 곧 완전한 구(球)의 형태로 바뀐 것.

동그란 검막, 아니, 검망(劍網) 안에 갇힌 암독무가 짙은 검은 빛으로 일렁였다.

“어디서 같잖은 손장난을……!”

두목놈이 눈을 까뒤집으며 동강난 창대를 마구 휘둘렀다.

…보는 눈이 없으면 얌전히라도 있어야지.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검날을 희게 빛냈다.

단전에서 출발한 기운은 순식간에 검망에 도달했다.

대가리만한 검망이 주먹 크기로 줄어들고,

주먹만한 검망이 탁구공 크기로 줄어들었다.

크기만 줄었을 뿐, 검망이 지닌 진기의 양은 여전했다.

즉, 그물의 벽이 점차 두꺼워지는 것.

밀도 높은 암독이 두터운 벽에 갇혀 격렬하게 요동쳤다.

나는 연달아 검을 휘두르며 진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일순간.

사람 대가리만한 검망이 태양 그 자체처럼 빛을 발했다.

눈이 아플 만큼 환한 빛을 내뿜은 검망이,

파앗.

작은 소리를 내며 소멸했다.

그 안의 암독과 함께.

‘…뭐. 암독무를 막는 방책으로는 나쁘지 않다만.’

하지만 역시, 이것도 삼반공의 3절은 아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을 내뿜었다는 김강산의 이야기와는 일치하지만, 닮은 점이라고는 오직 그뿐이다.

…대체 언제 떠오를 거냐고, 이 기억 새끼야.

내가 약간의 허탈감을 털어버리는 동안 두목놈은 제 모든 마력을 쏟아 부은 암독이 허무하게 소멸하는 광경을 보고 얼이 빠져 있었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장창은 하나도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나는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오른발을 크게 내디뎠다.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창대가 깊이 숙인 내 등줄기 위 허공을 꿰뚫는 순간.

스파앗!

강철검의 검날이 놈의 어깨를 지났다.

장대를 쥔 두목놈의 오른쪽 팔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팔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팟. 파앗.

나머지 두 놈의 팔도 그 몸통과 작별인사를 고했다.

세 개의 팔이 거의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검날은 이미 두목놈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내가? 살려줄 거 같냐?”

나는 단번에 놈의 등 뒤로 돌아가 마혈을 짚었다.

세 놈의 몸뚱이가 그 팔 옆으로 덜그렁 덜그렁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성득아, 은창아.”

“예, 누님! 말씀만 하십시오!”

“…으, 응, 설화 씨, 아니, 누님, 아니, 설화님, 아니…….”

“됐고, 나 얘들하고 할 얘기가 좀 있으니까 그동안 내장산채 애들 튀지 못하게 잘 모아 놓고 있으라고.”

***

-아, 아가씨… 정말로 아닙니다… 혈귀단이라니요… 저는 그저 소소하게… 악! 으아악!!! 아악!!!

-나도 알아. 너네 혈귀단 아닌 거. 설마 걔네가 이 정도로 허접쓰레기는 아니겠지. 아니라는 소리만 지껄이지 말고 아는 걸 불라고, 새끼야.

-아악!!! 으…으으…악… 차라리 죽여, 죽여라!!! 나도 아는 게 있었다면, 악!! 주, 죽여, 주세요!!! 으…으으…….

-당연히 소원은 들어 드리지. 근데 그 죽음이 일 분 후일지 다섯 시간 후일지 오 년 후일지는 네가 뭘 털어놓느냐에 달려 있지. 뭐, 그 고통 속에서 오십 년 살아 보든지.

-…으…아… 이, 악마, 악마님…….

서은창은 바위 너머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손톱을 깨물었다.

설화 누님께서 세 몸뚱이를 가볍게 들고 바위 뒤로 사라진 지 십오 분.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는지 내장산채의 채주 공명주의 목은 완전히 쉬어 있었다. 나머지 두 부채주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사람이냐고. 그리고 혈귀단을 왜 찾는 거지. 역시 복수일까?’

지금으로서는 서은창도 혈귀단의 본거지를 알 길이 없다.

설사 알고 있더라도, 결코 설화 누님에게 알리지 않았을 터.

아무리 설화 누님의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그저 산적 떼를 상대했을 뿐이다.

저 정도 힘으로 그 악마의 소굴에 발을 디디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서은창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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