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설화 누님 전사(戰史) (3)
그날. 눈 덮인 태백산은 혈향으로 자욱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 위로 암독탄이 터지고, 암독화살이 날아들었다.
암시에 걸린 이들이 동료의 팔을 베고, 스스로의 심장을 찔렀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제발, 어머니…….
폭음과 암독무가 뒤섞인 깊은 산중.
서은창은 어머니를 업고 눈 덮인 산을 달리고 또 달렸다.
아주 추운 날이었는데도 등허리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아니, 땀이 아니다. 이 끈적한 감촉은…….
-…은창아…….
어머니의 목소리는 곧 꺼질 듯 가느다랬다.
-어머니!!! 금방 회복술사를, 회복술사를 찾기만 하면…….
-은창아.
가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서은창의 다리를 멈춰 세웠다.
서은창은 넓적한 바위의 눈을 재빨리 쓸어내고 옷을 벗어 바위 위에 깔았다.
옷은 서은창이 흘린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 옷은 곧 더 짙은 피로 뒤덮였다.
어머니의 옆구리에 난 주먹만한 구멍.
장창이 뚫고 지나간 자리를 통해 스며든 짙은 암독이 어머니의 몸을 잠식했다.
건강한 구릿빛이던 그녀의 얼굴은 암독으로 인해 거멓게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서은창은 어머니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이 산을 살아서 내려간다 해도 이 짙은 암독을 해독할 해독술사가 근방에 있을 리는 없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일반인. 해독이 각성자에 비해 훨씬 어렵다.
‘하지만……!’
어머니의 두껍고 강인한, 주름진 손이 서은창의 움켜쥔 손등 위를 덮었다.
-은창아… 복수는 절대로… 하지…마… 피는… 결국… 피… 내 뜻을… 내… 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은창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혈귀단의 강경파가 온건파를 급습한 날, 어머니는 눈 덮인 태백산의 중턱에서 목숨을 잃었다.
서은창은 그날 밤 어머니의 시체를 업고 혈귀단의 본거지가 있던 태백산에서 탈출했다.
한동안 혈귀단의 추적이 이어졌다.
서은창은 자신을 뒤쫓는 혈귀단의 암살자가 나타날 때마다 남몰래 기뻐했다.
‘이건 복수가 아니라고요, 어머니. 제가 살려면 이 새끼들을 죽여야 하니까. 그렇지요, 어머니?’
몇 년이 지나자 그 혈귀단의 추적마저 사라졌다.
윤성득을 만난 서은창이 방랑을 그만두고 활빈당을 만든 것이 그즈음이었다.
윤성득의 중얼거림이, 생각에 잠긴 서은창을 잡아 끌어내 현재로 끌다 놓았다.
“설화님께서 사실 계룡좌룡을 사랑하셨던 걸까……?”
윤성득은 허무한 표정이었다.
아니, 이 형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쳤길래…….
“어째서 결론이 그렇게 나?”
“저 실력에, 저 성격에, 참으며 사셨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렇지.”
“계룡문이라는 말이 사실인가부터 의심하는 게 순서 아냐? 계룡문이 왜 혈귀단을 찾아?”
“그건 뻔하지. 세상에 혈귀단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가 구울만큼 많을 텐데.”
“구울은 좀 오바고, 고블린으로 하자, 형.”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위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윤성득은 이내 서은창의 어깨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읏쌰. 설화님께서 내장산채의 산사람들을 어떻게 처분하실지 모르겠네. 설마 다 죽이시지는 않겠지?”
“모르지. 손쓰는 게 아주 잔혹하던데.”
“그런 것치고는 죽은 새끼는 하나도 없잖아.”
서은창은 벌벌 떨고 있는 내장산의 졸개들을 한 바퀴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 생각해봐야, 알 수가 있나.”
“그렇네. 하나 분명한 건, 설화님께서 오늘 우리 목숨을 구해주셨다는 거지.”
“뭐. 그렇지.”
서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근의 마을을 털 때마다 임산부와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여버리는 내장산채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표어를 내세운 활빈당과는 평소부터 껄끄러운 사이였다.
몇 번 자잘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는 했으나 최근에는 큰 갈등 없이 잠잠했는데.
방심한 사이에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그걸 잊다니. 그 혈귀단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도…….’
서은창은 재생 버튼을 누른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지우고자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의 기억이 가라앉은 자리에, 정체 모를 미모의 여인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어딘가 모르게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검을 쥔 자세라든지,
양발의 넓이,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처리하는 효율적인 검로 같은…….
‘그저 우연일까.’
돌이켜 보면 첫 만남부터 의심스러웠다.
혈귀단이었다는 과거를 알고 일부러 자신을 찾아왔을 리는…….
‘그럴 가능성은 없어.’
몇 년에 걸친 혈귀단의 추적이 끊긴 지도 어언 10년.
자신조차 스스로가 혈귀단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어쨌든, 숨기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마치 서은창 자신처럼.
계룡좌룡이 자신을 겁박하고 어쩌고 했던 소리부터가 완전히 구라. 구라 중에도 상구라다.
저런 실력에, 저런 성격으로 자신의 뜻을 억누르며 참고 지낸다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다.
차라리 계룡좌룡을 사랑한다는 윤성득의 헛소리가 더 사실처럼 들릴 정도다.
그 헛소리에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건 그 누구도 아닌, 서은창 자신이었다.
‘이게 다 어머니 때문… 아니, 덕분입니다요.’
행협멸악(行俠滅惡) 구약보세(救弱保世).
협을 행하여 악을 멸하며, 약자를 구하고 세상을 지킨다.
어머니께서 입술이 닿도록 이야기하시던 그 구절이 자신의 뇌리에 박혀 있는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좌룡에게 겁박을 당하고 있다는 설화 누님의 헛소리에 홀랑 넘어가? 아이고, 이 띨빡아.’
자신의 머리를 콩 콩 두들기던 서은창은 문득, 주위가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위 뒤에서 끊임없이 들리던 비명 소리가 끊겨 있었다.
‘…죽이셨나?’
서은창이 마력을 돋워 탐색술을 시전하려는 순간, 설화 누님이 바위 뒤에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야. 얘네들 잘 보이게 높은 데다 올려놓고, 애들 집합시켜.”
“넵!”
“그리고…….”
기기묘묘한 검술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서은창은 많은 질문을 눌러 참은 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
‘아이 씨. 진짜로 모르나 보네.’
내장산채 놈들은 끝까지 혈귀단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다.
하급 분근착골, 중급 분근착골, 상급 분근착골까지 다 시전했다. 이런 사파 새끼들이 자신의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비밀을 지킬 리는 없으니 진짜로 모른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이거 완전 헛고생…….
은 아니지.
‘그래도 이놈들이 모아 놓은 재물이 꽤 되겠지. 원래 악인일수록 재물이 많은 법이니깐. 히힛!’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야. 당연한 말을 씨부리고 지랄이야. 니가 드리는 게 아니고 내가 가져가는 거거든?
-그러믄입죠! 뭐든지, 뭐든지 가져가십시오!
-그래서, 너네 산채 위치가 어딘데?
이제 돌아가는 길에 내장산채에 들러 이놈들이 쌓아 놓은 재물을 쓱싹하면 이번 일은 거의 끝이다.
그리고.
…서은창 저놈도 뭔가 있단 말이지.
놈들을 열과 성을 다해 주무르며 심문할 때, 바위 뒤에서 순간적으로 꽤나 큰 마력이 일렁였다.
아주 잠깐이었고, 이내 이전처럼 줄어들었지만.
바위 뒤에 앉아 있던 놈은 서은창 하나였다.
제 마력을 굳이, 힘들게 숨기고 있는 놈.
‘하나씩 하자고. 하나씩.’
김강산과 헤어진 지 벌써 24시간이 가까워졌다.
최지수가 오른 눈썹을 들썩이면서,
‘림아, 너한테 나는 대체 뭐냐. 내가 아직도 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그래, 내가 짐 덩이지. 내가…….’
하고 중얼거리는 걸 지켜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좀 마음이 무겁…….
…기는 구울 풀 뜯어먹는 소리.
내가, 계룡문 곡식 털어간 애들 잡자고 여장까지 해가며 이 고생을 했는데. 그 와중에 사파 새끼들 하나 때려잡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악은 가능할 때마다 박살내야 하니까.
“설화 누님. 말씀하신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서은창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
마혈과 아혈을 짚인 내장산채의 두목과 두 부두목이 커다란 바위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그 앞에 무릎 꿇은 내장산채 애새끼들의 등허리가 눈에 보이도록 떨리고 있었다.
“어어. 고생했다.”
내가 바닥을 걷어차 바위 위로 올라서자 시선이 한꺼번에 모였다.
내장산채와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활빈당 애들도 부축을 받아가며 모두 모여 있었다.
겁에 질린 내장산채 애새끼들을 내려다보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내가 말이야, 다른 사람들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 근데 말이야, 그런 나한테도 니들 내장산채가 거악이라는 얘기가 들릴 정도면 니들이 진짜 거악이라는 소리거든. 그래서 그냥 싹 다 죽여버릴까…….”
애새끼들 낯빛이 창백해졌다.
몇몇이 살려달라며 소리를 치고, 몇몇이 살려달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했는데, 지금 내가 컴퓨터를 놓고 와서 너네 한 놈 한 놈 악행이 얼마인지가 계산이 안 되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특별히 살려주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애새끼들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몇몇이 감사하다며 소리를 치고, 몇몇이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니깐… 자, 잘 봐.”
나는 널브러져 있는 두목놈의 목덜미를 쥐고 일으켰다.
아혈과 마혈을 차례로 풀자 두목놈이 이마를 땅에 처박고는 백 번도 넘게 주절거린 그 말을 다시 읊조리기 시작했다.
“살려주십시오… 아가씨, 누님… 살려… 악! 아으악! 아악! 주, 죽여, 차라리, 아아아악!!!!”
분근착골의 고통에 놈이 몸을 비틀었다.
아까도 한참 싸제꼈는데 또 나올 게 있었는지 윗구멍과 아랫구멍에서 물이 질질 흘렀다.
바위 아래에 무릎 꿇고 앉은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구야. 그렇게 겁이 많아서 강간은 어떻게 하고 살인은 어떻게 저질렀대냐.
나는 겁에 질린 놈들을 한 바퀴 둘러보며 주머니에서 검은 환약…처럼 생긴 흙덩이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한테 이걸 하나씩 선물로 줄 거거든. 자, 지금 성득이랑 은창이가 주는 거 있지? 그래, 그거. 하나씩 받아먹어. 성득아, 은창아! 입 벌려서 꼼꼼하게 확인해라!”
“넵!”
“알겠습니다.”
잔뜩 쫄아 붙은 내장산채 놈들은 순순히 흙덩이를 받아 꿀떡꿀떡 삼켰다.
곧 백여 명이 흙덩이의 복용을 마쳤다.
“지금 니들이 먹은 건 내가 만든 아주 특별한 독환이거든. 회복술사도 해독 못 하는, 아주 특별한 녀석이지. 그리고 이게 일 년 후에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말이야…….”
나는 느릿느릿 말을 이으며 반대쪽 손바닥을 두목놈의 등짝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꾸에엑, 꾸엑! 꿱! 꿰엑!”
놈이 돼지 멱 따는 소리를 지르며 사지를 뒤틀었다.
입과 귀, 코와 눈, 몸의 모든 구멍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격렬한 발작은 길지 않았다.
나는 숨이 끊긴 두목놈의 몸뚱아리를 바위 아래로 내던졌다.
“히에엑!”
“…주, 죽었어……!”
죽었지, 그럼.
내가 기운을 불어넣어 그놈 마단전을 역류시켰으니까.
“이게 일 년 후 니들 모습이야.”
꼴깍. 꿀꺽. 딸꾹.
침 삼키는 소리와 딸꾹질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그중 몇 놈은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토하려는 놈은 없네. 본보기로 뒤지게 패주려고 했더니.’
왼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꽤 너그러운 사람이거든. 일 년이 되기 전에 내장산채에 찾아갈게. 니들이 착하게 지내고 있었다면 해독약을 줄 거야. 물론 지금까지처럼 계속 악행을 저지른다면 그때는 니들 입으로 들어가는 건 독환이 아니라 내 검이 될 거야. 이렇게 말이지.”
나는 가볍게 강철검을 휘둘렀다.
검날을 에워싼 날카로운 검기가 두 부두목놈의 목줄기를 지났다.
두 개 모가지가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겠지?”
휘앵앵 바람이 불었다.
“왜 대답이 없냐. 아가리 막혔으면 구멍 뚫어줄까?”
검을 치켜들어 흔들자 그제야 얼빠져 있던 놈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알, 알겠습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아가씨!”
나는 강철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뒈지겠네.’
마음 같아서는 싸그리 죽여버리면 딱 좋겠다.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윗물 흐린데 아랫물 맑을 데가 없는 법.
소악이고 거악이고 따질 필요가 있냐고.
그러나…….
‘그랬다가 저승에서 소화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무슨 소리를 듣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