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뒈지면 뒈진다 (1)
뚜욱. 뚝. 뚜우욱.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등줄기는 완전히 젖은 지 오래였다.
서은창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은창아. 힘 좋은 애들 서른 명 뽑아와.
순식간에 내장산채의 세 우두머리의 목숨을 취하고 뒤이어 악명 높은 내장산적들이 ‘착하게 살겠습니다!’를 300번 복창하게 만든 설화 누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곧 그 ‘힘 좋은 애들 서른 명’은 짐꾼이 되어 각각 1톤 가까운 무게를 짊어지고 밤새 산길을 걸었다.
활빈당이 지난번에 탈취한 계룡문의 곡식과 이번에 탈취한 계룡문의 곡식, 그리고 중간에 들른 내장산채의 본거지에서 털어 온 온갖 귀중품이 그 지게 위에 얹혀 있었다.
금괴, 은덩이, 옛 시대의 총기, 폭약, 가끔 아버지가 아쉬운 어조로 추억하던 옛 시대의 술과 상당한 양의 각성자용 약물, 또 이러저러하고 저러이러한 짐들이 곡식 위에 얹혔다.
“…이걸 다 가지고 어디로 가시려고요.”
이 정도 재물이라면 새로 산채를 차릴 수 있을 정도다.
그 값비싼 서울성의 2급 시민권, 안전할 뿐만 아니라 안락하기까지 하다는 서울 2성벽 안쪽 구역에 살 수 있는 권리를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퍼버버버버벅.
대가리를 후리는 연타뿐.
설화 누님은 오른손을 휘저으며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산적 주제에 궁금한 것도 많다.”
“누님. 그렇게 산적이라고 다 싸잡아서 보시면 저희 활빈당 입장에서는 솔직히 속상합니다. 저희처럼 착한 산적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저희가 상단 물건은 좀 털었지만 야인들은 한 번도 건든 적이 없다고요. 오히려 상단 털어서 야인들에게…….”
퍼버버버벜.
“야. 내가 그걸 아니깐 너네를 살려줬지. 안 그랬으면 국물도 없었어.”
“눼, 눼. 그러시겠죠.”
서은창은 흘러내린 지게를 끌어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대체 뭐 하는 인간이지?’
서은창은 아슬아슬한 낭떠러지를 평지처럼 걷고 있는 설화 누님을 힐끔 쳐다보았다.
각성한 여자 치고는 그저 보통의 체격이다. 그 몸으로 서은창과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지고 밤새 걸었는데도 지치는 기색 하나 없다.
“저기, 누님.”
“쓰잘데기 없는 거 물어보면 손모가지 부러질 각오해라.”
“…저희 활빈당은 왜 도와주셨습니까?”
만난 지 아직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호위하는 상단을 털었고, 설화 누님은 자신들을 속였다.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설화 누님의 목적이 무엇이었던지 간에 굳이 자신들을 도울 필요는 없었다는 말이다.
“네가 나를 돕는다고 나대는 꼴이 귀여워서 그랬다, 이놈아.”
“…네?”
키 220센티. 몸무게 118키로. 3미터짜리 대도를 주무기로 쓰는 서은창은 일곱 살 이후로 귀엽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심지어 그 어머니에게도 귀엽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누님, 혹시 제가 취향이시면 그렇다고 얘기하시죠. 저는 아주 좋…….”
퍼버버버버버버버뻐버버뻐버버뻐벜!
“좆같으니까 그만하고, 계룡으로 가는 길이 어디야?”
눈앞에 나타난 갈래길을 가리키며 설화 누님이 물었다.
“누님. 설마 정말로 계룡문이셨어요? 진짜 좌룡을 사랑해서… 악! 손, 그 손 좀… 그럼 뭐냐고요! 왜 싫다면서 붙어 계시는 거예요!”
설화 누님이 손짓으로 서은창을 불렀다.
서은창은 짐을 내려놓고 쫄래쫄래 설화 누님의 뒤를 따라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머, 누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악!”
“닥치고. 여기 두목은 윤성득이지만 사실 머리는 너지?”
“…뭐, 그렇지요.”
설화 누님이 팔짱을 끼고 서은창을 위아래로 훑었다.
알 수 없는 오한에 서은창이 제 양팔을 감싸쥐었다.
“활빈당, 너네들 말이야. 계룡문이랑 같이 사업 좀 해볼까?”
“…누님이 뭐라도 됩니까. 고작 문도가 무슨 사업을…….”
서은창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떡 벌렸다.
설화 누님이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을 손에 들고 있었다. 뒤이어 그녀, 아니, 그가 얼굴을, 아니, 얼굴을 덮은 가죽 가면을 조심스럽게 벗었다.
가죽가면 밑에 감춰져 있던 얼굴은...
미친 미남이었다.
“아이 씨. 오래 썼더니 감촉 되게 구리네. 이거 어떤 새끼가 만들… 아, 내가 만들었지.”
뭐라 중얼거린 그가 아주, 아주 상큼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안녕? 나 계룡검룡이야.”
“…어…으…어……?”
“말하는 방법 모르냐? 내가 가나다라부터 가르쳐 줘?”
서은창이 다급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어쩐지 검술이 남다르다 했는데. 그 계룡검룡이라니! 이번 랭킹전 우승자잖아!’
그리고…….
물불 안 가리고 막 나가는 성격이야말로, 얼굴과 검술 이상이라고 했는데!
“은창아.”
“넵.”
서은창은 안간힘을 다해 양쪽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검룡이 서은창의 어깨를 짚었다. 가볍게 누르는 듯한 손길이었는데, 맞붙은 손바닥을 통해 엄청난 힘이 밀려들었다. 서은창은 자신도 모르게 숨기고 있던 마력을 끌어내 그 힘에 맞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밀려들던 힘이 사라졌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끝내 바닥에 엎어진 서은창을 내려다보며 검룡이 팔짱을 꼈다.
“은창아. 역시 마력을 숨기고 있었네.”
“…그게, 사람이 살다 보면 숨기고 싶은 일이 있고, 그게 제가 개인적으로 사정이 좀 있어서… 하하. 하하하.”
검룡이 입술 끝을 비스듬히 올리며 웃었다.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서은창은 참 잘 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올라간 입술을 비틀며, 검룡이 말했다.
“너, 혈귀단 알지?”
***
붉은 옷의 복면인이 계룡성의 서쪽 성벽을 타고 올랐다.
단번에 성벽에 올라선 그가 몸을 낮춘 채 수신호를 보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십 명의 복면인이 연달아 성벽 위로 올라섰다.
같은 시각.
계룡성의 동쪽 성벽에서도, 남쪽 성벽에서도, 북쪽 성벽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적귀대주 이경하는 서른 명의 적귀대원을 이끌고 남쪽 성벽을 넘었다.
어둠에 잠긴 성벽 안 작은 마을의 나무문 사이로 옅은 등불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경하는 은신술을 펼치며 잘 정리된 논둑길을 빠르게 통과해 마을로 진입했다.
혈왕이 그를 부른 것은 이틀 전.
두 달 전 흑귀대를 탈주한 뒤 흔적을 감췄던 다섯 명 흑귀대원이 염화검제와의 성전(聖戰)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염화검제를 죽이려는 의거(義擧).
혈귀단의 모든 단원들이 흑귀단의 탈주범, 아니, 이제 순교자가 된 이들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래. 그 의거로 단원들의 열기가 드높다고?
-예. 혈왕께서 지령만 내리시면 당장이라도 모든 적귀대원이 성전을 위한 깃발을 들어올릴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성전이라… 흑귀대주는 서울성으로 진격하자 하더군. 적귀대주는 어떻게 생각하나.
혈왕이 붉은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물었다.
적귀대주 이경하가 그 물음 속에 숨겨진 답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았다.
-서울성 공격은 섣부른 판단입니다.
-오호. 왜 그렇지?
-염화검제는 1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객관적인 우리 혈귀단의 전력으로는 4성벽의 방어까지는 뚫을 수 있으나 3성과 2성, 나아가 1성의 촘촘한 방어를 뚫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적귀대주의 생각은 무엇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을 느끼며 이경하가 입을 열었다.
-…속하는 계룡문의 위선자들에게 성전을 경험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계룡문? 어째서 계룡문이지?
혈왕의 눈빛이 번쩍이는 게 느껴졌다.
‘시험받고 있다. 내가 혈왕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이경하는 조금 전 자신의 참모인 전재원과 나눈 대화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찬찬히 대답했다.
-계룡문이야말로 현재 가장 큰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변수라…….
-프롤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계룡검룡은 그 버러지 같은 프롤들의 환호와 입에 발린 감사에 잔뜩 취해 있습니다. 아마 자신이 영웅이라 생각하겠지요.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게 해 주어야겠군. 착각에 취한 어린 영웅에게도, 그리고 프롤들에게도.
-예. 속하도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자의 실력은 진짜다. 우리 동지들이 아까운 피를 흘리게 되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검룡이 성을 비웠다는군요. 계룡문 문도들이 검룡을 은밀히 찾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애송이군.
혈왕이 눈을 내리감았다.
이경하는 고개를 수그린 채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적귀대주. 성전을 준비하라. 목적지는 계룡성. 준비가 되는 대로 즉시 적귀대를 이끌고 출발하라.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이경하는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혈왕의 앞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37시간의 강행군 끝에 계룡성에 도착했다.
항상 하던 일이다.
성벽 안 마을에 침입해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는 것.
항상 하던 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뿐인데, 이경하는 새삼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무리 해도 질리지가 않아.’
울부짖으며 제 발을 붙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프롤들의 연약한 팔을 자르고 가냘픈 다리를 자르고 부드러운 피부를 찔러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게 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루해지지가 않았다.
이경하는 흥분으로 들뜬 마음을 굳이 억누르지 않은 채 눈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혈귀단 적귀대의 상징인 붉은 복면을 한 적귀대원들이 마을의 좁은 골목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오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들이 무너져 내렸다.
수백 번 보았던 광경이다. 산에서 내려와 계룡까지 진격하는 동안에도 야인들의 마을 여섯 개를 초토화했다.
‘프롤 새끼들. 땅 파는 것이 전부인 열등하고 하등한 종족.’
이경하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 광경을 응시하다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을을 가득 채워야 하는, 그의 피를 더욱 끓게 만드는 프롤들의 비명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경하를 향해 대원 하나가 달려왔다.
“적귀대주님. 마을이 비어 있습니다.”
“…프롤이 한 마리도 없다고?”
“예, 그렇습니다.”
이경하가 도를 움켜쥐었다.
…정보가 샜구나. 대체 어디에서?
‘아니다. 쥐구멍은 단에 돌아가서 찾아내면 될 일.’
10만 마리의 프롤을 소리소문없이 성밖으로 빼내는 건 염화검제라도, 심지어 혈왕이라도 불가능하다.
어차피 이 성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경하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싸늘하게 지시했다.
“신속하게 다음 마을로 이동한다.”
“존명.”
***
최지수가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람들이 힘들게 지어 올린 집이 불타고, 논밭이 짓밟히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어둠을 불살랐다.
‘저 구울만도 못한……!’
혈귀단이 계룡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최지수에게 전해졌을 때.
최지수는 막 계룡성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잔뜩 볼이 부은 김강산이 완산 인근의 산을 헤집고 있던 최지수에게 툴툴거리며 찾아온 게 이틀 전의 일이었다.
-림이는?
-놓쳤지, 뭐. 림이 형이 마음먹고 떼내려 하는데 내가 어쩌겠어.
-산적은? 찾았고?
-그럼. 당연… 아, 진짜!!! 아오!!
서림과 함께 있으라 당부하기는 했지만 최지수도 그게 가능하리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림이 너는, 또 홀로…….’
어찌 되었든 활빈당을 찾아낸다는 최초의 작전은 성공이었다.
서림이 그 활빈당과 함께 어디로 갔는지를 몰라서 문제일 뿐.
최지수는 1대 제자 몇몇에게 은밀히 서림을 찾아보라고 지시하고 계룡성으로 귀환했다.
대표실 책상에 앉아 그새 또 잔뜩 밀린 서류 작업에 열중해 있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대표실 문을 열었다.
E&G의 상단주 이용미였다.
랭킹전이 끝나고 파천궁의 서울지부에 방문했을 때 이용미가 평범한 상단주가 아니라 파천궁의 서울지부 요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더불어, 전쟁 중 상부의 명령으로 반강제로 전직한 어둠술사라는 설명도.
그래도 최지수는 어둠속성 각성자들이 내키지 않았다.
강제든 반강제든 어차피 제 손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였으므로.
미세하게 눈썹을 찡그리는 최지수를 향해 이용미가 다급하게 내뱉었다.
-검룡님은 어디 계십니까?
최지수는 잠시 갈등했다.
서림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은 자신과 은영단만 아는 극비였으니까.
-저에게 얘기하시죠.
이용미는 아주 잠시 갈등하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혈귀단이 계룡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