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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53화 (53/122)

53화. 뒈지면 뒈진다 (2)

이용미가 빠른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파천궁의 정보원이 강원의 홍천성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무력대의 이동을 포착했다는 이야기였다.

-산길로 이동하고,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살해하고, 마을을 초토화하며 매우 빠르게 남하하고 있습니다. 혈귀단의 방식이지요. 그 방향을 볼 때, 중간에 수많은 성이 있지만, 지부장님께서는 계룡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판단하셨습니다.

‘혈귀단이 왜 계룡을?’

최지수는 서림의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아마, 미친놈들 생각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하겠지.

-놈들이 계룡을 공격한다면, 언제쯤일까요.

-…바로 지금일지도 모릅니다. 꽤 가까이 왔을 거예요. 정보가 전달되는 게 늦어서…….

‘림이라면 어떻게 할까. 림이라면, 아마…….’

일반인을 대전성으로 피난시키다가는 그 중간에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최지수는 곧바로 움직였다.

일반인들을 피신시키고, 유성길드에 도움을 요청하고, 계룡문의 제자들을 성벽 안팎에 배치하는 과정은 조용히, 하지만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금.

어둠 속에서 피처럼 붉은 옷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검을 움켜쥔 채 어둠을 응시하는 최지수의 등 뒤로 계룡문 1대 제자 십여 명이 결의를 불태우며 서 있었다.

다급하게 세운 방어 작전은 놈들이 들이닥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완료되었다.

일반인들은 모두 성의 가장 안쪽에 대피해 있다.

신호탄을 올리면 내성 잠복조가 공격을 시작할 터.

외성 잠복조가 바깥에서 공격해 들어가면 혈귀단은 앞뒤에서 포위당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리고 최지수는 그 질문의 답도 역시 알고 있었다.

모든 전투에서, 모든 순간에서 앞장서 싸우던 등이 눈앞에 없기 때문.

‘내가 절대로 림이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최지수는 검을 움켜쥐며 심호흡을 했다. 뒤이어 그의 지시가 떨어졌다.

“신호탄을 올려라.”

백색 신호탄이 어두운 하늘을 갈랐다.

동시에, 잠복했던 이들이 일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최지수가 암독용 해독약을 삼키며 바닥을 걷어찼다.

“자, 선빵필승이다!!!!”

최지수가 외치며 당황한 혈귀단을 향해 바위를 내던졌다.

집채만한 바위가 총알처럼 날아갔다.

다급하게 바위를 피한 혈귀단원들의 머리 위로 화공자가 쏘아낸 화염탄이 날아들었다.

“산개해!”

이경하가 목소리 높여 외치며 재빨리 몸을 돌렸다.

최지수는 그가 이곳에 있는 혈귀단의 ‘대가리’임을 알아차렸다.

-무조건 대가리부터 잡아야 해.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까.

-안전하다니. 그런 걸 바로 위험하다고 하는 거다, 림아.

-쯧, 쯧. 계룡문도 큰일이다. 부대표가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서림의 말을 떠올리며 최지수는 사라지는 이경하의 뒤를 쫓아 속도를 높였다.

이경하가 향하는 방향은 성벽 바깥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성벽 안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다 죽어! 다 죽으라고!”

대도를 휘두르는 기세가 흉흉했다.

도가 지나가는 곳마다 검은 암독이 뿌옇게 흩어졌다.

두 명의 계룡문 2대 제자가 이경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검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들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느껴지는 마력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자신 역시도…….

“피해……!”

최지수가 외치며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경하의 도가 두 제자의 어깨를 동시에 베어내기 직전,

콰아아!

불쑥 솟아난 강철 벽이 도를 가로막았다.

“이 씨부럴 새끼가?”

이경하가 욕설을 뱉으며 멈춰섰다.

“아하? 니가 우룡이구나? 검룡 첫 번째 따까리? 이거, 이거, 검룡은 진짜로 없나 보네?”

“…내가 상대해주마.”

“네깟 놈이?”

이경하가 비릿하게 웃으며 대도를 들어올렸다.

캉!

검과 대도가 부딪히는 순간,

짙은 암독무가 주위를 검게 물들였다.

‘어디로 사라진 거냐?!’

최지수가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탐색술을 시전했다.

이경하는 이미 10여 미터가 넘게 멀어져 있었다.

“비겁한 놈! 어디로 도망치는 거냐!”

“크하하하하! 비겁이라니? 나 혈귀단이라고!”

이경하가 성 안을 향해 쇄도하며 연신 대도를 휘둘렀다.

최지수가 쏘아 보낸 바윗덩이들이 마력을 머금은 도날에 박살나 검은 암독무 위로 흩어졌다.

최지수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하지만.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혈귀단을 얕본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혈귀단이 창단된 것이 20년 전.

최소 각성한지 20년이 된, 1세대 혹은 2세대 각성자들이다.

뜻이 있는 1세대 각성자들이 균열을 없애겠다며 균열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고, 또 용기 있는 1세대 각성자들은 앞장서 괴물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제 1세대 각성자는 많지 않았다.

아무리 혈귀단이 괴물보다 인간을 죽이는 일에 몰두했다 할지라도, 그 긴 시간 동안 쌓아 온 마력은 실로 엄청날 터.

4세대 각성자인 자신으로서는, 마핵을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맞서 싸우기는커녕 일검에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림이는 너는 항상 이런 이들을 상대했지.’

그동안 앞장서는 사람은 항상 서림이었다.

자신이 상대한 이들은 서림이 지나간 길에 남은 조무래기들뿐.

계룡문을 운영하고 계룡성을 관리하느라 훈련에 시간을 쏟지 못했다.

김강산이 훌쩍 성장하고, 각성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하하민의 실력이 날마다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부럽기보다는 그저 뿌듯했다.

‘…모두, 핑계일 뿐.’

-지수 형. 요즘 수련장에서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일이 너무 많구나. 나도 나가보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

-형은 지키고 싶은 게 많잖아. 그렇게 해서 형 목숨이라도 지키겠냐? 멸하는 검은 가볍지만, 지키는 검은 무겁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림아.

-뭔 소리긴. 수련을 하라는 소리지.

대표실 문을 벌컥 들어온 서림은 몇 마디 말을 늘어놓고는 이내 들어올 때처럼 불쑥 사라졌다.

언제나처럼, 서림의 말은 옳았다.

혈귀단의 목적은 단순한 파괴.

놈의 말대로, 자신과 상대할 필요조차 없다.

강자를 피해 약자를 죽이면 되는 일이다.

집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잘라 목숨을 빼앗기는 너무도 쉽다.

그에 반해 그들을 막아 집을 지키고, 사람들을 지키는 일은 몇 배, 몇 십 배는 어렵다.

어렵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지 서림이 너무도 손쉽게 해내는 것 같아 보여 순간순간 잊었을 뿐.

‘나 역시 계룡문. 림이 네가 없다 해도……!’

최지수는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적귀대주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잠복해 있던 유성길드의 길드원들과 계룡문 2대 제자들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그가 휘두른 맹렬한 도격에 순식간에 팔과 다리를 잃었다.

“내가 막을 테니, 회복부터 해라!”

최지수가 마력증폭제를 깨물었다.

약을 감싸고 있던 동그란 막이 터지고, 시큼한 향을 띈 미끄덩한 액체가 입 안의 점막으로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온몸의 마력이 일순간 폭발하듯 끓어올랐다.

있는 힘껏 바닥을 걷어차자, 그제야 적귀대주와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사정거리에 들어온 등을 향해 최지수가 검을 내질렀다.

-무게중심은 아래. 상체는 숙이고. 상단보다는 하단이 수월하다고.

최지수의 검이 이경하의 무릎 뒤축을 찔러 들어갔다.

카강!

도날과 검날이 맞부딪쳤다.

검을 쥔 오른팔 전체가 징징 울릴 정도로 엄청난 힘.

‘하지만 붙잡는 데 성공했다.’

놈이 더 이상 성내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일반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 짙은 암독이 퍼졌다가는 몇 명 죽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터. 아마 수백, 수천 단위의 사망자가 나올 것이다.

지남천이나 김강산이 맡은 구역을 모두 처리하고 도우러 올 때까지 놈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애송이가 끈질기군!”

이경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연달아 대도를 휘둘렀다.

실로 강맹한 기세.

최지수는 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려 어깨를 내리치는 도를 흘리고, 왼발을 내디뎌 허리를 노린 도를 회피하고, 어깨를 비틀어 정수리를 겨냥한 도를 피해냈다.

모두 간발의 차이였다.

최지수의 검술은 서림에게 배운 그대로였다.

물론 최지수의 검은 서림만큼 날카롭지도, 서림만큼 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근접 거리를 유지하며 작은 빈틈마다 검을 찔러 넣는 전투 방식은 서림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리고.

“존만한 새끼가!”

욕설과 함께 연격이 쏟아졌다.

조금 전보다 한층 빠르고 더욱 강맹해진 공격.

허리를 깊숙이 숙여 수평으로 휘둘러진 도날을 회피한 최지수가 눈앞의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풀썩 뛰어 검을 회피한 이경하를 향해 마력이 일렁이며 모여들었다.

‘암독이다……!’

최지수가 다급하게 전진하며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카앙!

도와 검이 이경하의 머리 위에서 맞부딪쳤다.

도에 들어찬 마력과, 검에 들어찬 마력의 격돌.

그 차이는 명백했다.

반으로 동강난 최지수의 검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잘려나간 검의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짙은 암독을 머금은 검은 도날이 최지수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절반 남은 검으로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아니, 힘이 부족하다.

방금 전 확실히 확인했다. 자신의 힘으로는 막지 못한다는 것을.

공기가 터져나갈 듯한 파공성 속에서 최지수는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한 달에 한 개. 그 이상은 안 돼.

정하영의 당부는 물론 타당했다.

-까딱하다가는 폭주할 수 있다고. 괴물화되면 돌이킬 수 없는 거 오빠도 알지?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팟.

최지수는 아까부터 어금니 사이에 머금고 있던 두 번째 마력증폭제를 깨물었다.

얇은 막이 터지고, 비릿한 액체가 스며들었다.

폭발하듯 증폭하는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

상급 괴물에게 정신계 공격을 당한 듯한,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괴물화의 전조 증상.’

완전히 괴물화가 진행되면,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푸욱!

검을 역으로 잡고 스스로 허벅지를 꿰뚫었다.

아릿한 고통에 머리를 옥죄는 목소리가 흩어지고,

온몸을 채운 마력이, 단번에 왼손으로 모여들었다.

최지수가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콰가가가가!!!!

바닥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솟아올랐다.

이경하가 딛고 서 있던 땅이, 흙이, 그 아래 깔려 있던 자갈과 바위와 지반이 거대한 모래 폭풍이 되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까마득히 높은, 토네이도.

대도를 쥔 적귀대주의 몸은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흙과 자갈과 박살난 바위에 휩쓸려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격통이 몰아쳤다.

그 고통을 견디며 마력을 집중하자,

쩌저저적!

거대한 모래 폭풍이 하늘로 솟아오르던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반투명한 기둥 속에 눈을 부릅뜬 갇힌 적귀대주가 보였다.

최지수가 기존에 만들어내던 강철보다 몇 십 배는 더 단단한,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오직 마력으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강도와 경도를 가진 금속.

진강(眞剛).

그 진강으로 형성한 진강주(眞剛柱).

대지술사의 마지막 단계라 여겨지는 진강을, 최지수 역시 들어보기만 했을 뿐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그 강도만큼,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마력이 어마어마했다. 일 초, 일 초마다 마력이 소모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얼마 동안 이 진강주를 유지할 수 있을지.

저놈이 이 안에서 숨을 쉬지 못한 채 얼마 동안 견딜 수 있을지.

‘오 분? 십 분?’

이제는 마력 대결이다.

만약 저놈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자신의 마력이 다 떨어지면. 혹은, 자신이 이성을 잃으면.

‘안 돼.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을 참으며 최지수가 마력을 쏟아 부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진강주에 갇힌 놈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이 여전했으므로.

아니, 그저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다.

진강주에 갇힌 이경하가 쥔 대도에서 스며 나온 검은 기운이 반투명한 기둥 사이로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자신이다.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

마력증폭제의 부작용.

잠시 잦아들었던 그 목소리가.

마력을 끌어올리는 만큼, 그리고 그 마력이 소모되는 만큼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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