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뒈지면 뒈진다 (3)
최지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놈과 병장기를 맞대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 괴물화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은 당연한 결과.
그렇다고 이대로 자신의 마력이 소모되기 전에 놈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
‘단번에 승부를 본다. 그리고, 혹시 내가 괴물화될 것 같으면……!’
결정을 내린 최지수가 반토막난 검으로 상처 난 허벅지를 다시 한 번 찔렀다.
파헤친 살점 사이로 붉은 피가 번졌다.
뼈가 드러나 보이는 커다란 상처 덕에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가 일순간 흩어졌다.
와르르!
쏟아 붓던 마력이 사라지자 진강주가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원래의 형태인 흙과 자갈, 시멘트 조각으로 돌아간 진강주의 잔해 속에서 이경하가 머리를 꺾으며 걸어 나왔다.
“숨겨둔 수가 있었군? 진강주라니. 나도 오랜만에 보네.”
“…나를 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렇게 뒤지고 싶…….”
채앵!
이경하의 무릎을 노리고 휘두른 검이 이경하의 도에 가로막혔다.
선빵필승이라는 서림의 당부를 그대로 이행한 일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최지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할 수 있어.’
아주 간발의 차이였을 뿐이다. 상대방이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던 아까와는 다르다.
두 번째 마력증폭제는 그 부작용의 위험성만큼 효과도 엄청났다.
최지수는 이를 악물며 있는 대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스파앗!
재빠르게 내지른 검날이 이경하의 허벅지를 스쳤다.
“씨발, 이 새끼가……!”
최지수는 단번에 검을 회수하고 그대로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거센 파공성과 함께,
최지수의 검이 짙은 암독을 반으로 가르며 이경하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더없이 강맹한 기세.
이경하는 검격을 방어하기 위해 다급히 대도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검날은 도에도, 이경하의 머리에도 닿지 않았다.
아까의 전투에서 부러지지 않은 온전한 검이었다면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최지수의 손에 쥔 것은, 평소의 절반 남짓으로 줄어든, 동강난 검이었다.
“으하하! 그까짓 부러진 검으로!!!”
최지수를 비웃으며 이경하가 머리 위로 들어 올렸던 대도를 그대로 내리그었다.
아니, 그으려고 했다.
스파앗!
최지수의 왼손에 들린 검이, 이경하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모든 마력을 쏟아 부어 생성한, 날카롭고 단단한, 진강검(眞剛劍).
“…이게, 무슨……!”
검자루도, 검받이도 없는 오직 검날만 존재하는 날카로운 검이 파고든 곳은 명치와 배꼽의 중간.
-여기 마단전이 있다고. 여기를 박살내면 끝. 디엔드. 쉽지?
-하지만 림아. 마력이 높은 각성자의 복부는 강철보다 단단해서 뚫어내기가…….
-강철은 뭐, 박살 안 나냐?
서림이 마단전이 있다고 이야기한 그곳이다.
분명히 느낌이 있었다.
분명히 느낌이 있었는데,
‘…힘이 부족했나?’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부여잡은 이경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 놈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경하가 거도를 쥔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까에 비하면 아주 느릿하고, 아주 힘없는 공격.
하지만.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최지수는 자신의 마력이 불규칙하게 날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지나친 지는 오래였다.
검자루를 쥔 자신의 팔이 눈에 보이게 떨리고 있었다.
진강검을 꽂아 넣은 왼손도 마찬가지.
피가 흐르는 허벅지와, 멀쩡한 왼쪽 다리와, 가슴과 어깨가 온통 거세게 진동했다.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혹은,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강처럼 반투명한 시야 속으로, 이경하가 들어올린 대도가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림아. 이제, 우리 계룡은 어떻게…….’
최지수는 눈을 부릅뜬 채 다가오는 죽음을 주시했다.
“최지이이수우우!!! 뒈지며어언 뒈진다아아아!!!!”
익숙한 목소리가 최지수의 귀를 때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림이가, 림이가 왔구나……!’
시야가 핑글 돌았다.
혹은, 정신이 돌았다.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눈부시게 빛나는 빛줄기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시발!!! 최지수!!! 뒈지면 뒈진다!!!!”
타닷.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걷어찼다.
몸이 바닥을 스치며 총알처럼 쏘아져 나갔다.
더 이상 빠를 수 없도록 빠른 속도.
그러나 한없이 느리게 느껴진다.
-검룡님, 얘가 검룡님을 찾는다는데요?
산을 헤매다가 활빈당의 당원에게 잡힌 계룡문의 일대제자는 그러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녀석은 산을 헤매다가 다섯 번 더 활빈당에게 사로잡혔고, 활빈당의 졸개는 서은창에게 연락을 넣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 왔다.
그리고 그 말이 서은창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 것이 한 시간 전.
-부대표님께서 대표님께 당장 돌아오라고, 계룡이 위험하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계룡이 위험하다.’
그 말을 들은 곳은 완주 근처의 운장산 인근이었다.
그때부터 최고 속도로 경공을 전개했다.
‘김강산은 돌아갔겠지? 유성길드가 제때 도우러 왔을까?’
계룡성벽 안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무엇인가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자욱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또, 내가 실수를 했다.
내가, 계룡을 두고, 제멋대로 자리를 비우지 않았더라면…….
계룡성벽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박살난 집과 부서진 도로, 불에 타버린 보리밭.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 중에 우리 애들은 없었다는 것.
나자빠진 시신은 모두 붉은 복면을 하고 있었다.
혈귀단(血歸團)의 적귀대(赤鬼隊).
내가 찾던 놈들.
제 발로 굴러들어온 놈들.
‘올 때는 네놈들 마음대로 왔겠지만, 나갈 때는 다를 거다.’
나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에 계룡성벽을 확장하며 새로 계룡성으로 편입된 능소리 부근에서 우리 애들과 유성길드 애들 30여 명이 4명의 적귀대 놈들을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애들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아마 암독에 중독된 모양.
-비켜!!!
내 외치는 소리에 애들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나는 진기로 희게 빛나는 강철검을 연달아 휘둘렀다.
수직으로 내려벤 검날이 한 놈을 세로로 갈랐다.
정면으로 내지른 검끝이 한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수평으로 휘두른 검이 한 놈의 허리를 동강냈다.
좌상단으로 휘두른 검이 마지막 놈의 상체를 대각선으로 나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네 구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애들이 눈을 껌벅이며 입을 멍청이처럼 헤 벌렸다.
-야. 뭘 멍하니 있고 지랄이야. 너네 암독에 당했지? 당장 회복팀한테 가서 해독부터 하고, 야. 너 3팀 팀장이지. 너는 남아서 상황 보고 하고.
-어, 저기, 감사한데, 누구신지요?
아. 인피면구 안 벗었지.
내가 거칠게 인피면구를 잡아 뜯어내자 애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표님?!!! 대체 어디에 계셨어요!!!
-이놈들이. 아무리 인피면구를 썼다지만 제 대표님도 못 알아…….
3팀 팀장이 내 말을 잘라내며 다급하게 상황을 뱉어냈다.
-부대표님께서 혈귀단 하나를 쫓아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적귀대주라고 부르는 거 같던데, 솔직히 버거운 상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바닥을 걷어찼다.
띄엄띄엄 남아 있는 전투의 흔적이 향하는 곳은 성의 안쪽.
적귀대주라는 새끼가 튀고, 최지수가 뒤를 따르는 형국이다.
계룡문과 굳이 싸우려 할 놈들이 아니다.
놈들이 해온 짓이라면, 피신해 있는 일반인들을 테러하는 게 목적일 터.
-혈왕은 1세대 각성자입죠. 그를 따르는 4명의 혈귀는 모두 2세대 각성자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어둠속성이라 동급의 마력으로는 상대하기 쉽지 않지요. 아마 혈왕이 함께 죽자고 마음을 먹었다면 혈귀단 하나가 길드 셋 정도는 저승길 길동무로 삼을 수 있을 걸요.
-그 정도 힘이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냐? 혈귀단이 대한길드를 공격한 건 이십 년 전 한 번뿐이라고. 이번 건은 서은창 네 말대로라면, 남지호 패거리의 단독 행동인 거고.
-혈왕의 목표는 길드 연합의 깃발을 내리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서은창은 말을 멈추고는 더 적절한 단어를 찾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공포, 절망… 그런 거요. 체념하고, 포기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아무리 후회해도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깊은 절망에 빠지는, 그런… 길드 연합이나 각성자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모든 사람들이요.
어떻게 보아도 계룡문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놈들이다.
최지수와는 더욱.
비무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건 정정당당한 결투도 아니다.
놈들이 일삼는 것은 그저, 일방적인 살육.
계룡문의 제자를, 혹은 일반인까지도 인질로 삼아 저항하지 말라는 협박을 할 수도 있는 놈들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최지수가 무슨 선택을 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타앗.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 내 몸이 연기가 오르는 골목을 빠르게 지나쳤다.
불타는 논밭과 무너진 건물 너머 저 멀리에 불쑥 솟아오른 반투명한 기둥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거대한 기둥은, 아마 진강주(眞剛柱).
이 성에서 진강주를 형성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사람은 지남천뿐이다.
하지만.
지남천은 북쪽 성벽에 있다고…….
‘…설마, 최지수, 이 새끼가!’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 내 시야에, 이내 최지수와 적귀대주의 옆모습이 잡혔다.
50여 미터 앞.
적귀대주가 제 머리 위로 대도를 들어올렸다.
팔꿈치가 내려가고, 손목이 따라 내려가고, 뒤따라 대도가 휘둘러졌다.
최지수의 마력이, 블규칙하게 튀어오르고 있다.
폭풍우에 휩쓸린 어선처럼…….
마치 마혈을 잡힌 사람 같이 꼼짝하지 못한 채 서 있는 최지수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도날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적(積)을 날렸다가는 최지수까지 휩쓸릴 상황.
나는 있는 힘껏 달려나가며, 쇄도하는 기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스파앗.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놈을 향해 뻗어나갔다.
하지만,
‘…늦어!’
너무, 너무 멀다.
검에서 솟아난 검기의 끝과 놈 사이의 거리는, 아직도 십여 미터.
허공을 찢어발긴 대도는 이제 최지수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놓기 직전이었다.
‘그럴 수는 없어. 다시 내 눈앞에서 소중한 이를 잃을 수는……!’
나는 허공에 몸을 띄운 채 온 정신을 다해 기운을 운용했다.
강철검의 검날을 희게 빛내던 진기(眞氣)가 단번에 수백 조각으로 갈라졌다.
올올이 갈라진 진기가 순식간에 수천 조각이 되고,
다시 수만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실처럼 가느다란 진기가.
먼지처럼 가벼운 진기가.
숨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니,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느껴졌다.
놈의 짓눌린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기의 움직임.
놈의 도날에 의해 양옆으로 밀려난, 공간을 채우고 있던 기운.
내 발밑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그 바람에 비틀거리는 민들레의 노란 꽃잎.
그 민들레가 거친 땅에 내린 뿌리.
뿌리가 뻗어나간 땅.
땅의 곳곳에 스민…….
자연으로 스민 내기(內氣)가 자연의 외기(外氣)와 만났다.
마주치고, 부딪히고, 접촉하고, 뒤엉켜,
끝내,
하나로 합쳐졌다.
자연이 된 내 의지에 따라,
허공을 채운 기운이 놈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
아주 가볍고, 아주 옅은 기운.
놈의 팔꿈치를 멈춰 세울 수 있는 힘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놈에게 닿을 시간을 만들어 내기에는 충분했다.
스파앗.
희게 빛나는 강철검의 검날이 놈의 대가리를 세로로 갈랐다.
날카로운 검기는 놈의 목을 지나, 몸통을 지나, 오금을 통해 놈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반으로 잘린 놈의 몸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허공으로 솟구친 붉은 피가 최지수와 내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졌다.
“지수 형, 최지수!”
나는 두 손으로 최지수의 얼굴을 붙들었다.
눈알에 초점이 없다.
검은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죽여라. 인간을 죽여라. 인간을…….”
어금니를 악문 입술 사이에서 낯선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마력증폭제의 부작용.
최지수의 몸통이, 다리가, 팔이, 검을 쥔 손이, 그 손에 잡힌 동강난 검이, 모두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최지수는 온 정신으로 괴물화에 저항하는 중이었다.
완전히 괴물화되지 않았다.
아직 돌이킬 수 있다.
완전히 괴물화되고 나면 마단전을 파괴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아니,
‘절대 안 돼.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아.’
내 검지가 최지수의 상완혈을 짚었다.
인위적으로 증폭된 거친 마력이 내력을 튕겨냈다.
나는 더한층 기운을 끌어올렸다.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오른손을 하얗게 빛냈다.
내 손은 떨리지 않았다.
심장은 더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톡. 토옥.
내력을 머금은 검지와 중지가 거침없이 상완혈과 하완혈을 짚었다.
다음은 건리혈, 마지막을 중정혈.
마단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통과하는 네 개의 혈도.
비로소 최지수에게서 느껴지던 불규칙한 마력의 흐름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최지수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옆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