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어떤 인연 (1)
“고맙습니다, 길드장님.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네요.”
“계룡문과 유성길드 사이에 당연한 일이네, 검룡. 내가 입으로만 형제라고 떠든 줄 아는가.”
지남천이 손을 내저으며 감사를 사양했다.
“그래도 혈귀단의 습격을 아무 피해도 없이 막은 것은 계룡문이 처음일세.”
“아무 피해가 없기는요. 무너진 집이 수백 채에다가 논밭은 개판이 되었는데요. 팔다리 박살난 애들도 수두룩하다고요.”
“이 사람, 아무튼 욕심도 많아. 사람이 안 죽은 게 어딘가. 우리 유성길드가 십여 년 전 혈귀단의 습격을 받았을 때는 천 명 가까이 사망했었네.”
“…그랬어요?”
처음 듣는 얘기다.
습격을 당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게 많은 이가 죽었는지는 몰랐다.
“뭐 듣기 좋은 소리라고 떠들고 다니겠나. 여지껏 혈귀단이 습격한 곳마다 그 정도의 피해는 입었을 걸세. 자네도 알겠지만, 워낙 비겁한 자들이니까. 그때 사망자 대부분도 일반인이었지.”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혈귀단은 각성자들보다 일반인들에게 그 악명이 더 높은 모양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일반인들은 집과 논밭을 잃었는데도 하나 아쉬운 기색 없이 혈귀단의 습격으로부터 지켜주어 감사하다며 내 손을 붙들고 눈물을 글썽거렸으니까.
‘내가 그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나는.
도망치는 혈귀단을 뒤쫓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최지수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마혈을 눌린 듯 늘어진 최지수를 업고 연구소로 내달리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계룡성민? 계룡문의 제자들?
남지호의 사연? 한지혁의 어머니?
중요하지. 모두 중요하고말고.
하지만 중요한 것들에도 순서가 있다. 나에게 최지수는 아마 길고 긴 줄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존재일 터.
‘나도 몰랐지. 최지수 네가 그렇게 중요했는지…….’
-조금만 더 지체되었으면 진짜 괴물화되었을 거야. 암독 중독 증상도 심각하고… 림이 오빠가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병실에서 나온 정하영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수 형은 괜찮은 거냐?
-…뭐. 일단 암독은 다 해독했고, 마력억제제도 충분히 투여했으니. 그래도 깨어날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어. 괴물화라는 게 그렇거든. 결국 정신력 문제라.
그렇다면 최지수는 괜찮을 거다.
만약 괜찮지 않다면…….
지남천과 헤어진 나는 곧바로 김강산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김강산이 침대에 누운 채 하나 남은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히죽거렸다.
“림이 형! 내가 서쪽 성벽으로 들어온 새끼들 싸그리 박살냈다고! 내가 깬 대가리가 스물일곱…….”
내가 오른손을 들자 김강산이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형. 나 환자라고, 환자. 지금 때리면 나 진짜…….”
황급히 고개를 움츠리는 김강산의 머리 위에 나는 가만히 손바닥을 붙였다.
눈을 질끈 감았던 김강산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는 민망한 듯 씩 웃었다.
이놈도 암독 중독 증상이 꽤 심했다.
다행히 서쪽 성벽에는 적귀대주 같은 고수는 없어서 마력증폭제를 남용하지는 않았지만…….
계룡문 제자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다들 조금씩 암독 중독 증세를 보였으나 미리 섭취한 해독제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기도 해서 대부분 증세가 심하지는 않았다.
가장 심각한 상태는 은영단 멤버들.
최지수는 말할 필요도 없고, 김강산 역시 팔 하나는 완전히 박살나고 두 다리가 덜렁거리는 채로 후퇴하는 놈들의 뒤를 쫓다가 팀원들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왔다.
왼팔은 이미 박살나 있었고 두 다리도 절단 후 회복하는 편이 더 낫다는 판정을 받았다. 김강산에게 남은 것은 지금 오른팔 하나뿐이었다.
하하민은 회복술을 너무 써대다가 마력이 바닥나 업혀왔고,
박명칠과 조은조와 이바름은 각기 발목과 팔목과 두 어깨가 아작나고 둘 다 심각한 암독 흡입으로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실려왔다. 세 놈이 등가죽과 뱃가죽에 입은 창상의 갯수만 해도 60방을 넘었다.
모두, 다른 제자들을 보호하며 앞에 나서서 입은 부상들이다.
일반인을 테러하기 위해 성 안으로 돌입하려는 혈귀단을 막아 세우다가…….
‘이 새끼들이. 약해 빠진 주제에 꼭 이런 것만 배워가지고.’
김강산의 잘려나간 왼쪽 어깨의 단면에서 단풍잎처럼 작은 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기에는 조금 웃길 뿐이지만 자라는 과정에서 고통이 꽤나 심하다고 했지. 팔 하나에 다리 두 개가 모두 그 모양이니 김강산 이 녀석이 얼마나…….
“…아프냐?”
“어. 존나 아파, 형아. 형이 호~ 해주면 안 아플… 형. 나, 환자. 응? 환자입니다요. 하하.”
…이 새끼. 나으면 보자. 나으면.
***
서은창은 계룡문 본부 대표실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낯짝을 들이대고 있어.
나는 손짓으로 녀석을 들어오라고 한 뒤 대표실의 의자에 앉았다. 녀석이 쫄랑쫄랑 걸어 들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곡식은?”
“모두 창고에 옮겨 두었습니다.”
“창고 위치를 네가 어떻게 알고?”
“헤헤. 입은 놔뒀다가 어디다 씁니까. 사람들한테 물어봤지요.”
“근데 왜 안 가고 여기에서 이러고 있냐? 우리 계룡문이 너 따위 산적놈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곳이 아니거든?”
처음부터 이 새끼들이 내 곡식을 훔쳐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게 모두 계략……?
“아닙니다! 저 진짜로 혈귀단에서 나온 지 십 년도 넘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냐?”
…이라면 너는 곱게 뒈지지는 못할 줄 알아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내가 변장을 하고 활빈당을 유인한 것은 은영단밖에 모른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자신도 모르게 정보를 흘리기도 하고, 또…….
새파랗게 질린 서은창이 두 팔을 마구 휘저었다.
나는 들어 올렸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려 팔짱을 꼈다.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말해.”
“제가 오래전에 손 털었지만, 한때 혈귀단이었던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왜? 죽여 달라고?”
“헤헤. 설마요. 악! 진짜, 설화누, 아니, 검룡님, 그 성질 좀 죽이십쇼!”
지금 아주 많이 참고 있다.
맘 같아서는 전국의 산을 싸그리 뒤져 혈귀단 새끼들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
하지만 계룡을 떠날 수는 없다.
은영단 애들이 모두 부상을 입고 나자빠져 있다. 그리고 혈귀단 놈들은 아마…….
“그 새끼들은 다시 올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혈왕의 목적은 공포와 절망을 퍼뜨리는 겁니다. 혈귀단의 이름을 듣는 사람들이 공포에 떨고, 희망을 잃고 절망하기를 바라지요. 이번에 계룡문을 습격한 것도…….”
“내 계룡문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검룡님. 일반인들 사이에 계룡은 파라다이스, 지상낙원이라고 불리더군요. 이번에 혈귀단의 습격을 방어한 첫 번째 성이 되었으니 그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겁니다. 혈왕이 그걸 두고 볼 리는 없겠지요.”
예상한 일이다.
문제는… 그 공격의 시기일 뿐.
“가능한 한 빨리… 겠지.”
“그렇습니다. 이번 습격은 적귀대뿐이었어요. 두 번째 습격은 첫 번째보다 더 준비를 철저히 하겠지요.”
“흑귀대와 녹귀대, 청귀대, 그리고 혈왕 직속 부대인 혈왕대가 있다고 했지?”
“네. 혈왕대는 어지간해서는 직접 움직이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모르지요. 혈왕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하산할 지도요.”
저들이 모두 온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훨씬 위험한 법.
하지만…….
‘현재 계룡문의 전력으로는 놈들을 막을 수 없어.’
놈들의 타겟이 나라면 차라리 쉽다.
4 대 1.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할 수 있다. 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놈들의 타겟은 내가 아니다.
놈들은 미꾸라지처럼 나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일반인들의 목숨을 노릴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짓거리대로.
최지수가 남긴 전투의 흔적을 볼 때 적귀대주는 상당한 경지의 고수였다.
그 정도 수준의 고수가 네 명 더 있다는 의미.
도망치는 놈들을 잡아 박살내려면, 그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자가 필요하다.
내 몸을 넷으로 쪼개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
‘…길드장급이어야 하겠지. 나, 지남천. 최소 둘은 더 있어야 하는데.’
대한길드의 염화검제(炎火劍帝) 이정용.
블랙데이나 랭킹전이 아니고서는 서울성 1성 밖에서 모습도 보기 힘든 놈이다. 더군다나 남지호가 남긴 말도 그렇고, 여러모로 찝찝하다.
서문길드의 무적권왕(無敵拳王) 박민교.
이놈이야말로 계룡문이 망하면 두 팔 벌려 환영하겠지. 랭킹전에서도 얼마나 나를 경계하던지 아주 똥 못 싼 강아지 같았다.
제물포길드의 해룡의선(海龍醫仙) 원찬우.
표면적인 별호는 해룡의선이지만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인천의 미친개라고 불리는 또라이.
종잡기 어려운 자라 의외로 도와주겠다 할 수도 있겠으나 전투 능력이 낮은 회복술사로 경지에 오른 자라, 이번 일에는 부적합하다.
화성길드의 아수라(Asura) 현진현은 이정용의 따까리에 가깝고.
강원길드의 해동검(海東劍) 은아라.
이놈도 속 좁기로 박민교 못지않다. 랭킹전에서 김강산이 철기수를 이기고 나자, 결승전에는 나와 보지도 않았지.
‘남은 건…….’
무등길드의 무등쌍협(無等雙俠) 유재일과 유재이.
그들이라면 계룡문을 돕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랭킹전에서도 이들은 나에게 꽤나 호의적이었을뿐더러, 1대 길드장 때부터 무등길드는 모든 길드 중 가장 협(俠)을 추구하는 길드라는 평가를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겁도 없이 재앙과 맞서 싸우다가 1대 길드장이 전사했지.’
2대 길드장인 무등쌍협도 협(俠)의 뜻을 이어받았다.
1차 블랙데이 직후부터 지금까지, 전라도는 가장 야인이 적은 지역이었다. 이번에 계룡성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도 전라도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문제는, 뜻만 이어받았고 실력은 이어받지 못했다는 점.
‘빙화신녀라면…….’
혈귀단의 습격으로 길드를 잃은 자다. 그가 혈귀단에 이를 갈고 있다는 건 당연하고도 유명한 얘기다.
나에 대해서도 꽤나 호의적이었고.
하지만 그의 소재가 불분명했다.
김영호에게 연락해 빙화신녀를 찾아 그를 데려오기까지 과연 혈귀단 놈들이 기다려 줄지가 문제다.
아니,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있지.
내 눈앞에 있는 수상쩍은 놈.
“은창아.”
“넵. 당장 꺼지겠습니다.”
“아니. 그 말 아냐. 너 이리 따라와라.”
“…네? 아니, 또 왜 그러십니까.”
“맞고 따라올래? 그냥 따라올래?”
“하하. 혹시 꺼진다는 선택지는…….”
“알면서 뭘 물어.”
***
내 정면, 십여 미터 앞에 선 서은창이 울상을 지었다.
계룡문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공터.
평소 김강산의 훈련을 봐주던 곳이다.
공개 훈련장에서 매번 후들겨 맞으니 애들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고 김강산이 징징거려 매번 이곳에서 훈련을 시켰었다.
내가 이곳에 도적놈을 데리고 올 줄은 몰랐지만…….
“검룡님. 진짜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저 말씀하신 대로 별거 없는 산적 나부랭이라고요. 혈귀단 그거, 말씀드린 대로 그때 안산성에 살다가 어쩌다 보니 휩쓸려서 잠시 있긴 했는데…….”
“야. 내가 목숨을 구해줬는데 고작 비무도 요청 못 해?”
“그게… 목숨을 구해주신 건 맞는데…….”
서은창이 버벅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안 구해줬어도 안 죽었다?”
“아뇨! 그런 말은 아니고요…….”
“뭐. 그거야 지금부터 확인하면 되겠지.”
묘하게 이상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마력 억제는 김강산도 꽤 어렵게 익힌 기술이다. 그나마도 서은창에 비하면 아주 서툰 수준이다.
그 말은, 서은창이 김강산보다 훨씬 마력 운용에 능숙하다는 의미.
마력의 양과 운용의 능숙함이 완전히 정비례하지는 않지만 꽤나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마력을 숨기는 일은 그 자체로 꽤나 마력을 소모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산적질을 하느라 숨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 지금도 마력을 억누르고 있다고.’
거기다가.
아무리 수레만 털어간대도 감히 내 계룡문을 건들질 않나, 내장산채 놈들이 그렇게 들이닥치는 와중에도 처음 본 내 걱정을 해주질 않나.
단순히 멍청하면서 착한 놈인가 싶었는데 이틀간 옆에서 보니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애새끼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으니까.
가만 생각하니 살아있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혈귀단에 대한 정보를 술술 풀어내는 애새끼를, 그 은밀한 살인귀들이 끝까지 추적해 죽이지 않고 몇 년 만에 포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경우의 수는 두 가지.
녀석이 숨기고 있는 힘이 내 예상을 뛰어넘거나.
혹은.
혈귀단의 첩자이거나.
‘…첩자가 아니기를 바라다니. 고작 이틀 사이에 꽤 정이 들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