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어떤 인연 (2)
타닷.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차…….
“잠깐, 설, 아니, 검룡님! 진짜로 그 깃발 뺏으면 저 가도 되는 거죠?”
려다가 멈췄다.
거 참 말 많은 놈.
“나는 한입두말 안 해, 새끼야.”
“여기, 서명하시죠.”
서은창이 바위를 평평하게 잘라 그 단면에 검끝으로 짧은 문장을 적어 넣었다.
[계룡검룡은 이 승부에서 패배할 시 서은창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가한다.]
“이 새끼가. 사람을 뭘로 보고.”
“검룡님, 서명이요.”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말이지.
은영단 애들이 그때는 참 개차반이었는데.
서은창은 바위조각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저만치 가져다 놓았다.
잘려나간 단면이 아주 매끄러웠다.
대지속성? 아니다. 이건 그저 검술 실력이다.
그것도, 꽤나 뛰어난.
‘속성 능력은 한 번도 쓰지 않았지.’
처음에 계룡문의 수레를 습격했을 때도 놈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내장산채 놈들을 상대할 때도 대충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어둠속성인가.’
놈은 모든 혈귀단원이 어둠속성은 아니라고, 자신 역시 전직하지 않았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놈이 그 말과 달리, 남지호처럼 어둠속성이라면……?
…젠장. 일단 때려잡고 생각하자고.
“그럼, 갑니다?”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서은창이 검을 움켜쥐었다.
녀석을 향해 일렁이며 모여드는 마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한 큐에 끝내려고 마음먹은 모양.
“그래. 애송아.”
내가 대꾸하는 순간, 녀석의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선빵필승의 묘리를 깨달은 놈이다.
역시 꽤 마음에 들…….
단번에 거리를 좁힌 서은창이 내 인중을 향해 소리 없이 검을 뻗었다.
어깨를 비틀어 공격을 흘려보내려는 찰나, 한 발 먼저 검을 회수한 서은창의 검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두 번째 공격이 향하는 곳은 열려 있는 내 오른쪽 겨드랑이.
팔꿈치를 내려 공격을 막기 직전, 서은창이 다시 검을 거두었다.
두 번의 공격이 모두 허초(虛招).
실로 실초(實招)다운, 제대로 된 허초다.
만약 내가 반응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그 공격들은 실초로 바뀌었을 터.
“이것도 피해보시죠!”
명랑한 외침과 함께 세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머리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던 검날이 공중에서 유연하게 방향을 바꾸어 목줄기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실초다.
그리고 이 실초 다음은…….
카강!
월영검의 검날과 부딪힌 서은창의 검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아니, 그런 듯 보였다.
한껏 젖혀졌던 어깨가, 사냥을 앞두고 활강하는 매의 날개처럼 활짝 벌려졌다.
마치 일부러 어깨를 벌린 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공격.
나는 내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드는, 수평으로 눕힌 가느다란 검날을 바라보며 침음을 삼켰다.
내가 알고 있는 검술이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은영검법 제14절, 낙화난무(落花亂舞).’
바람에 실려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잎처럼 시시각각 허초와 실초가 바뀌는 검술.
-실제로는 하나의 초식이지만 그 안에 여덟 번의 공격이 들어 있지요.
-쾌검이구나.
-쾌검이지요.
소화는 검을 쥔 채 맑게 웃었다.
-사형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좋다. 아주 좋아. 그런데…….
-왜 답지 않게 뒤를 흐리십니까. 역시 마음에 차지 않으신 것이지요?
-아니, 검술이지 않느냐. 무슨 검술에 이리 살초(殺招)가 없어?
제가 창안했다며 소화가 가져온 총 24절의 검결은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검술의 초식이 노리는 곳이 모두 허벅지, 팔꿈치, 무릎, 손목뿐이라서야.
-자. 방금 그거 다시 해 봐라.
-낙화난무요?
-스읍. 전반적으로 초식을 간결하게 가져가고 강맹함을 더해야겠다. 어, 지금. 거기. 검끝 좀 더 위로, 더 위로! 팔꿈치 말고 관자놀이 정도로… 어, 지금 것은 조금 아래로… 조금 더… 소화야, 명치다, 명치. 기왕 찌를 거면 명치를 찔러야지. 어깨 찌른다고 누가 꿈쩍이라도 하겠냐고.
-하지만 사형. 이러면 공격 하나하나가 모두 무시무시한 살초가 되는데요… 마교의 초마검결도 이보단 낫겠습니다.
-…그 정도냐?
-네, 사형.
그렇게 24절을 하나하나 손 본 끝에 탄생한 은영검법(隱影劍法).
내가 창안해 알려준 월영보(月影步)와 함께, 은영검법은 은영신녀(隱影神女) 주소화의 독문 무공이었다.
‘지남천이 대충 흉내내던 월영보와는 달라. 완벽하게 월영보를 운용하고 있다. 제대로 배웠어. 은영검법 역시도…….’
월악의 제자, 황미영.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겠다며 대전을 떠난 그가, 제자를 들인 걸까.
이 녀석이, 월악의 제자…….
쿠웅.
쿠웅.
심장 소리가 컸다.
내 심장 소리였다.
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덩해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나는 삼매진화를 일으켜 손바닥의 땀을 날려 보내며 검을 움켜쥐었다.
카앙!
관자놀이를 찌르던 마지막 공격이 월영검의 검날에 가로막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하지만 그 대단하신 검룡님께서 계속 피하기만 할 건 아니시죠?”
아주 짧은 순간 여섯 번의 공격을 쏟아낸 서은창의 두 발이 드디어 땅에 완전히 붙었다.
“…그래. 어디, 계속해보자고.”
나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내가 제대로 웃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서은창의 검술은 700년 전 소화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
.
.
은영검법 제14절 낙화난무(洛花亂舞) 뒤로 제1절 월하송송(月下松松)이 이어졌다.
소나무의 이파리에 맺힌 달빛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쾌검식.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검격이 온몸의 관절과 혈도를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소화의 그것보다 더욱 날카롭고, 소화의 그것보다 더욱 빠르다.
내력 대신 공격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실려 있다.
근접공격만큼은 지남천 그 이상.
‘이놈… 혹시 모두 신체능력에 싹 다 쏟아 부어서 속성 능력이 제로인 거냐.’
그렇다면 이 엄청난 반응 속도와 대단한 힘이 납득이 간다.
하지만…….
카카카카카카카카캉!
월영검의 검날은 월하송송(月下松松)의 서른여섯 번의 공격을 모두 받아냈다.
“너무하십니다, 검룡님!”
녀석이 외치며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검을 허리 높이에서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은영검법 제22절 유혼무호(幽昏霧湖)의 검세.
어두운 밤, 호수와 그 위를 덮은 안개가 구분되지 않도록 무거운 허초 속에 날카로운 살초를 감춘 검술이다.
한 번 시전되면 회전을 통해 속도를 더하는 통에 막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 파훼하려면 첫 번째로 시전되는 하단 수평베기 속으로 전진하면 간단하지만…….
‘…오랜만에 은영검을 즐기고 싶구나.’
나는 왼발을 뒤로 빼며 가볍게 검을 내질렀다.
내 검은 서은창이 남긴 잔상을 찔렀다.
상체를 깊숙이 숙이며 왼쪽으로 빠르게 돈 서은창이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내 오른팔을 향해 수평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어서 왼팔.
다시 오른 어깨.
이번에는 왼쪽 어깨.
그리고 오른쪽 목줄기.
채앵!
“쳇. 안 넘어오시네.”
“제대로 해보라고.”
왼팔을 길게 뻗어 허리춤에 꽂은 깃발을 노렸다가 허탕을 친 서은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로 펄쩍 뛰었다.
단번에 전진해 거리를 좁히며 날리는 일격필살의 검세.
은영검법 제8절 화간일광(花間一光)이 서은창의 손에서 펼쳐졌다.
뒤이어, 제18절 무영영란(舞影零亂).
뒤이어, 제17절 세우윤윤(細雨潤潤).
다시…….
“이것도 받아 보시지요!”
“…얼마든지!”
잔뜩 흥이 오른 서은창이 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녀석의 검이 잔뜩 주입한 마력으로 인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뒤이어.
파바바바바밧!
거센 검격이 내 주위를 덮으며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아주 빠르고, 강맹한-.
은영검법 제22절 낙우등천(落雨登天).
나는 머리 위로 검을 휘둘러 검막을 형성했다.
검의 잔영에 가로막힌 그의 검격이 챙강 챙강 소리를 내며 튀어올랐다.
하지만.
낙우등천의 살초는 다음 수에 숨겨져 있다.
강맹한 상단 공격으로 적의 시선을 끌고, 그 사이 단전을 직접 타격해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 낙우등천의 검술.
일순간.
서은창의 검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단번에 몸을 낮춘 서은창이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바닥을 스치며 쇄도했다.
타이밍과 속도, 힘 모두 완벽한 전환.
‘소화야. 네 제자가, 네 검술을, 이렇게…….’
자꾸만 치켜 올라가는 입술 끝을 끌어내리며 나는 검자루로 단전을 막았다. 뒤이어 호조수(虎爪手)로 녀석의 팔꿈치를 잡아채면…….
“잡았다!!!!!”
서은창이 포효하며 번쩍, 깃발을 들어 올렸다.
…응? 으응?
젠장. 너무 몰두해서 깃발을 빼앗기면 끝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다.
낙우등천의 마지막 일검에 변초를 활용한 녀석의 판단력도 꽤 쓸 만했지. 아니, 아주 훌륭…….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눈가가 뜨거웠다.
“검룡님, 그런데 어떻게 단전을 막으셨어요? 그거 원래는 단전 공격하는… 헉. 검룡님, 우세요??!!”
“…으느그든.”
“헐… 이번 판 져서 그러세요? 와. 승부욕 진짜 찐이다.”
“…으느르느끈.”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눈물을 꼴딱꼴딱 삼켰다.
울컥울컥 치받치던 감정이 잦아들 무렵, 한참 빙글빙글 웃어대던 서은창의 얼굴에서도 서서히 웃음이 걷혔다.
“검룡님. 원래 알고 계셨던 거죠? 제 검술.”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 놈이다.
그렇다면 말하기 더 쉽지.
…쉬울 리가.
재앙 백호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보다 더욱, 가슴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움켜쥐었다가 펼치며 나는 짐짓 가벼운 척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사부가 혹 월악문의 제자시냐?”
“아뇨.”
서은창은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라고?”
월악이라는 이름을 전하지 않았던 건가. 하지만, 월악의 검술을 이리 제대로 전수해놓고 이름을 전할 시간이 부족했을 리 없는…….
“사부가 아니라, 어머니요.”
껌벅이지도 않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제 어머니께서 월악문의 마지막 남은 제자라고 하셨어요. 자주 말씀하셨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월악의 37대 문주가 되어 월악문의 유지를 이어가야 한다고.”
“…어머니의 성함이, 혹시 황, 미자 영자 쓰시냐?”
대답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가 드러나도록 짧게 자른 머리 아래로 뾰족하게 솟은 두 귀는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껑충하게 큰 키에 단단한 근육이 꽉 들어차 있었다.
‘닮았나…….’
지남천이 이야기한 황미영의 모습.
한 번도 보지 못한, 월악의 제자.
옅은 침묵을 깬 것은 서은창의 작은 목소리였다.
“검룡님은 누구시죠? 제 어머니… 그리고, 월악문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내가 누구냐고?
환생한 월악문 개파시조다, 이 애송이야.
나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문장을 꾹 삼키며 어렵게 입술을 뗐다.
“나는… 나는 말이지…….”
***
억울하게 죽은 가족과 친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이들이 복수심에 불타 안산성에 모여들었을 때, 서은창은 그곳에 있었다.
안산성의 성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불에 타고 얼음창에 꿰어 죽은 시체가 되었다.
서은창의 아버지이자 황미영의 남편도 그날 그곳에서 죽었다.
괴물이 아닌, 사람에 의해서.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그의 어머니 황미영은 불타는 성을 헤매며 무너진 성벽에 깔린 이들을 구하고 다친 이들을 치료했다.
서은창은 어머니 황미영에게 안겨 안산성의 성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안산성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원수를 갚으리라 맹세하며 혈귀단을 창설했다.
혈귀단(血歸團).
그들이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한다. 비록 그 피의 대가가 나에게 되돌아온다 할지라도.
서은창의 어머니, 황미영은 그 혈귀단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수를 그만두라고 설득하기 위해 혈귀단에 들어갔다.
-힘을 모아 괴물에 맞서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들끼리 피를 흘릴 때가 아니라고요.
서은창은 어머니가 한 명 한 명 손을 붙잡고 간절하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하루 종일 들어야만 했다.
때로는 그 목소리가 지루했고, 때로는 그 목소리가 지긋지긋했으며, 때로는 그 목소리의 인내에 감탄했다.
-그런 소리는 저 새끼들에게 가서 하쇼! 저 새끼들이 먼저 시작한 거요!
-미영이 너도 남편을 잃었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별로 사랑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내 아들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인간을 찢어 죽일 때까지 이 증오를 잊을 수 없어.
-차라리 괴물에게 죽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예요. 안타깝고 슬펐겠지만, 이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황미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서은창은 자랄수록 어머니를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어머니. 어머니는 정말로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