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57화 (57/122)

57화. 어떤 인연 (3)

황미영이 슬픈 눈으로 서은창을 응시했다.

-은창이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니. 내가 네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서은창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천신교의 신부였던 그의 아버지. 손가락이 길고 키가 크고 어깨가 좁았던 그의 아버지. 수염이 까슬했던 그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오래전의 일이었고, 서은창은 그때 아주 어렸었다. 유의미하게 떠올릴 기억은 별로 없었다.

-네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린 것을 줄곧 후회하셨어. 그 죄책감 때문에 안산성을 떠나지 못했지. 네 아버지는… 종원 씨는 결코 복수를 바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황미영이 우두커니 선 서은창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 손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서은창은 제 어머니가 나이가 들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각성자인 자신보다 훨씬 빨리 늙고, 훨씬 빨리 약해진 어머니.

어머니가 걸터앉은 침대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서은창은 다가가 어머니의 곁에 앉았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단단하고 넓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그 너른 품에 안기기를 좋아했으나 이제 그럴 만한 나이는 지났다.

-은창아.

-네, 어머니.

-내가 월악문에 대해 얘기했었지?

서은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700년 전 검황께서 월악문을 세우실 때 월악문의 표어는 행협멸악, 즉 ‘협을 행하여 악을 멸한다.’였단다. 그리고 2대 장문인 은영신녀께서 그것에 구약보세, 즉 ‘약자를 구하고 세상을 지킨다.’라는 단어를 덧붙이셨지.

행협멸악(行俠滅惡) 구약보세(救弱保世).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서은창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 아득한 옛날의 이야기를 서은창은 믿지 않았다.

무협(武協).

마력도 없는 일반인이 오직 자신이 가진 힘으로 바위를 잘라내고 절벽을 무너뜨리고 강을 가르는 이야기.

그 가진 힘으로 약자를 구하고 악을 벌하는 이야기.

그런 사람들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은창은 그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악을 멸하기는 어렵단다. 하지만 약자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렵고, 구한 이들을 지키기는 더 어렵단다. 더군다나 세상을 구하기란…….

한숨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무엇인가를 내뱉은 황미영이 가만히 서은창을 응시했다. 서은창은 어머니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서은창은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야겠지요.

서은창이 나지막하게 되뇌이자, 황미영이 활짝 웃었다.

서은창은 어리광을 부리듯 그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댔다. 두껍고 주름진 손이 서은창의 뺨을 어루만졌다.

-…은창아. 알지? 혹시 내가 죽으면…….

-그만. 그만 하세요, 어머니.

서은창이 제 얼굴을 황미영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황미영의 단호한 표정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서은창은 어머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네. 약속할게요. 혹시라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제가 월악문의 뜻을 이을게요.

유언 같은 그 말이 서은창은 언제나 싫었다. 하지만 그날은 아주 나중의 일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각성자가 아니었으나, 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마력과 비슷하면서도 마력과 달랐다.

자신은 끝내 얻지 못한 그 기묘한 힘을 지닌 어머니는 각성한 자신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강했다.

그런 어머니의 설득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귀단의 공격은 연일 이어졌다.

남(南)의 재앙, 주작(朱雀)에게 공격당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인 부산성을 기습했다. 그 여파로 부산성은 무너졌고, 자갈치 길드는 해체되었다.

또 대전성을, 또 광주성을, 또 서울성을 공격했다.

어떤 공격은 성공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대가로 많은 동지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약하던 온건파의 목소리에 그즈음부터 슬슬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어요. 아까운 생명들입니다. 그들 중 악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지요. 우리가 복수를 위해 죄 없는 타인을 해치고 우리 목숨을 던지는 일은 먼저 간 이들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온건파의 수장은 당연히 황미영이었다.

-죽은 동지들은? 그 말이 죽은 동지들을 배신하자는 말과 뭐가 다르요? 우리는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했습니다. KKK단으로 몰려 살해당한 내 두 딸. 그 억울한 죽음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요? 나는 그 꼴은 못 봅니다. 저승에서 우리 가족을 만나서 원망을 듣는다 해도, 나는 그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강경파의 수장인 권노아는 극렬하게 반대했다.

-대체 그 복수를 누구에게 하려고요.

-당연히 망언을 퍼뜨린 염화검제지요! 그리고 그 망언을 믿은 이 세상 전부!

권노아를 따르는 강경파의 공세는 나날이 격렬해졌다.

그들의 타겟은 차츰 염화검제나 길드 연합이 아닌, 공격하기 쉬운 대상으로 바뀌었다.

혈귀단의 강경파가 몬스터 웨이브를 틈타 철원성주를 암살한 여파로 철원성은 그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횡성성 근교에 걸어 둔 주술로 일어난 시체괴물들이 횡성성을 겹겹이 에워쌌고, 그것은 3만 횡성성민 중 절반이 사망하는 횡성혈겁으로 이어졌다.

황미영은 크게 분노했다.

-성민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면 우리가 대살육을 벌인 자들과 다를 게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혈귀단을 무어라고 부르는 줄 아십니까? 피에 굶주린 귀신이랍니다! 우리는 그러자고 모인 게 아니잖습니까! 책임을 져야 하는 이에게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 우리가 흘린 피만큼만, 딱 그만큼만 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모인 거잖습니까!

그리고 권노아도 마찬가지였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이? 부단주는 대살육의 책임이 진정으로 염화검제 하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염화검제는 그저 거짓 정보를 퍼뜨렸을 뿐이지요! 염화검제가 원흉이다? 그래, 원흉이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결백하다? 씨발, 좆같은 소리!

사람들을 KKK단으로 몰아가고, 찌르고 때려죽인 새끼들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모두가 그랬어요, 모두가! 내 딸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맞아 죽었다고!

그리고 그날 밤, 강경파가 온건파를 습격했다.

황미영은 암독창에 허리를 꿰뚫린 채 서은창의 품에서 죽었다.

-어머니, 어…엄마!

-은창아… 복수는 절대로… 하지…마… 피는… 결국… 피… 내 뜻을… 내… 월악문을… 이어…….

서은창은 피눈물을 흘리며 들끓는 분노를 참아냈다. 그것은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므로.

윤성득을 만나 활빈당을 창설한 후로도 혈귀단이 일으키는 혈겁이 종종 서은창의 귀에 들려왔다. 서은창은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채 그 소식들을 듣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가슴 속에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은 서은창을 향했다가, 모든 일의 원흉인 염화검제를 향했다가, 모든 인간을 향해 번져나갔다.

그의 꽉 쥔 주먹 위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서은창은 아프도록 움켜쥔 주먹을 가볍게 펼치며, 자신의 앞에 앉은 미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계룡검룡이라 불리는 자.

랭킹전에서 우승한 최강의 후기지수이며, 빙화신녀에게도 승리를 거둔, 길드장들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녔다 이야기되는 존재.

각성자들의 영웅이며, 일반인들의 희망.

그가 월악문과 관련이 있는 건 확실했다. 어머니와 자신밖에 모른다고 생각했던, 은영검의 검로를 모두 꿰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이 모든 삶을 털어놓기에는…….’

서은창은 혈귀단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알았다.

피에 미친 살인귀들.

그리고 그 평가는 지극히 타당했다.

혈귀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이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기울인 노력과 흘린 핏방울을 이해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머니께서 혈귀단의 창립 멤버 중 하나라는 사실을 털어놓는 일은, 어머니의 명예를 더럽히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이라면……!’

설화 누님은 더없이 잔혹하면서도 또 너그러웠다. 마치 학살처럼 보였던 내장산채와의 전투에서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세 명의 우두머리가 사망자의 전부였다.

그동안 산 아래에서 들려오던 검룡의 행적도 마찬가지.

거침없이 검을 휘둘러 적을 제압하고, 목숨을 빼앗을 때에는 더없이 신중하다.

그 영웅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망설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자신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검룡이 비로소 입술을 뗐다.

“계룡문에는 이름을 붙인 무력단이 딱 하나뿐이야. 나머지는 모두 1팀, 2팀이라고 부르지. 너도 그 이름을 알고 있겠지?”

“…은영단이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검법의 이름과 같은 이름.

1대 장문인 검황과 2대 장문인 은영신녀께서 함께 창안하셨다던 그 검법.

그저 우연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검룡이 자신의 옆구리에 찬 검을 가볍게 쳤다.

“이 검의 이름은 월영이야. 네 어머니께서 유성길드에 남기고 간 녀석이지.”

청백색을 띈 검집에는 月影이라는 두 글자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자신의 보법과 같은 이름.

이것이 모두 우연일 수 있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이 민남에 어떠한 연(然)이 있다면,

‘…이런 게 필연일까.’

서은창은 무협의 시대도, 영웅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가 들려주던 그 시대의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서은창의 흔들리는 시선이,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에게 가 멎었다.

“그리고 나는…….”

검룡이 입을 열었다.

서은창의 시선처럼, 그 목소리도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월악을, 그리워했단다. 줄곧,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말을 마친 검룡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웃음 같은데, 울음 같기도 했다.

그리움, 후회, 슬픔, 환희, 절망, 고통, 반가움…….

매끈하고 흰 뺨과 반짝이는 눈동자 위로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서은창은 한참 동안 말없이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

계룡문 본부는 시끌벅적했다.

얼핏 보아도 200명은 넘어 보이는 각성자들이 광장을 꽉 메우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본부 앞 광장에 모여선 이들을 차례차례 응시했다.

청주성주 처철수.

보령회장 김선규.

보염련 곽선우.

…저건 또 누구야.

‘빙화신녀 곽예린. 찾는 수고를 덜었군.’

계룡문이 혈귀단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달려온 이들이었다.

나는 한쪽 입술 끝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아주 감사하네요. 아주 감사해. 어디, 박살난 계룡 꼴을 보니까 아주 꼬시겠네?”

“…검룡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으나…….”

“달려왔으나? 달려와? 씨발, 날아왔어야지! 내가 니들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내 거친 일갈에 모여 선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죽였다.

“내가 없었으면, 보령회장님, 보염련 회장님. 두 분 다 지금쯤 나가한테 뜯어 먹혀 시체도 안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김선규의 붉게 물든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곽선우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광장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멈춰서서 광장 안쪽을 향해 고개를 길게 뺐다.

미호 꼬치 주인이 가게 문을 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광장을 건너다보았다.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처철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청주성주님. 청주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이제야 오셨습니까. 성주님께서 조금만 빨리 오셨다면, 우리 부대표는 멀쩡했을지도 모르지요.”

처철수의 다문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내렸다.

빙화신녀 곽예린은 흥미로운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내 마지막 시선이 그를 향했다.

“…빙화신녀님. 이렇게 타이밍을 못 맞추시니 자갈치길드가 혈귀단에게 그 꼬라지가 난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아무 말이나 다 뱉으면 말인 줄 아네?”

계룡문 애들 몇몇이 새하얗게 질린 채 나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최지수는 쓰러져 있고, 은영단은 몽땅 병실에 누워 있다.

말하자면 내가 독설을 뱉든 검을 뽑든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씀.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광장을 한 바퀴 훑고, 차갑게 내뱉었다.

“더 하실 말씀들이 남아 있다면, 검으로 이야기하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