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58화 (58/122)

58화. 뫼비우스의 띠 (1)

“용용아. 너 진짜 싸가지 없다.”

거칠게 돌아서는 내 손목을 곽예린이 붙잡았다.

…역시. 내가 아는 빙화신녀가 이 상황에서 알겠다며 터덜터덜 돌아갈 리 없지.

단번에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호조수(虎爪手)로 곽예린의 팔꿈치를 잡아챘다.

퍼버버벅!

곽예린이 형성한 네 대의 얼음화살이 내 팔꿈치와 무릎 관절을 감싼 호신강기 위에서 터져나갔다.

“손님 대접은 여기까집니다. 계속하신다면 저도 검을 뽑겠습니다.”

“하! 이 새끼 봐라?!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지랄이네?”

“도와주러? 성이 다 박살나고 애새끼들이 드러누운 뒤에 도착한 주제에, 도움?”

곽예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검룡. 앞으로 내 도움을 받을 생각 따위는 영영 접는 게 좋을 거야.”

“내 계룡문이, 망한 길드의 전 길드장에게 도움 청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곽예린이 싸늘한 얼굴로 웃었다.

거칠게 땅을 걷어차고 광장을 떠나는 그의 뒤를 따라 보령회와 청주성방, 보염련이 차례로 사라졌다.

-검룡님. 미치셨어요? 기껏 도우러 온 사람들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나를 쫄레쫄레 따라오던 서은창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 맞다. 이놈 줄 마핵 가지러 가던 길이었지.

눈치가 빠른 것과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건 영 다른 모양이다.

‘내 마음 알아주는 놈이 이리 없어서야. 대표 노릇 하기도 참 힘들다, 힘들어.’

***

-죄송합니다. 적의 스파이가 있어요. 구 희망보육원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곽예린의 팔꿈치를 용조수로 붙잡은 짧은 순간.

나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오오케이.

그리고 그 대답대로, 밤에 잠긴 구 희망보육원의 낡은 건물의 어두컴컴한 옛 예전 대표실에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곽예린과 곽선우, 처철수와 김선규를 향해 나는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계룡을 도우러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까는 정말 실례했습니다. 혈귀단 놈들이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지 몰라서…….”

처철수가 황망한 얼굴로 다가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아이고. 검룡님. 이러지 마십시오. 틀린 말 하신 것도 아닌데요.”

“그렇고말고요. 검룡께서 외면하셨다면 저희 보령회는 진즉에 몰살당했습니다.”

“보염련도요.”

김선규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곽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용용이 너 싸가지 없는 거 세상 사람들 어차피 다 알어. 근데 연기도 잘하는지는 몰랐네.”

곽예린이 킬킬거리며 어깨를 추켰다.

“여기가 용용이 네가 어렸을 적 살았던 데라면서? 이야. 너도 고생 많이 했구나?”

하하.

하하하.

내가 지금까지 한 고생을 말로 풀어놓으면 웹소설 50화 정도는 훌쩍 넘을 거다.

젠장… 이러다가 한 500화까지 직살나게 고생하는 건 아니겠지.

곽예린과 곽선우가 알고 보니 먼 친척이었다느니 곽선우의 항렬이 더 높다느니 하는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고 했다.

“세상 참 좁아. 그지? 용용이 너랑 데이트 약속을 지키러 왔다가 그 씹새끼들을 조질 기회를 얻게 되고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다.

빙화신녀 곽예린.

부산성을 잃은 전 자갈치길드의 길드장.

남(南)의 재앙 주작(朱雀)과 괴물 무리에게 연달아 공격받아 자갈치 길드가 약화된 사이, 성 안에 침투한 혈귀단의 주술과 암독에 일반인이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

결국 자갈치 길드는 부산성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30만 부산성민이 창원성과 울산성, 밀양성으로 나누어 이동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무너진 부산성벽의 잔해 위에서 밀려드는 해양 괴물 무리를 꼬박 스물여섯 시간 동안 버텨낸 자갈치 길드의 부산성 전투는 블랙데이 이후 가장 성공적인 후퇴로 회자되었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3/4이 넘는 길드원을 잃은 자갈치 길드는 이후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실력과 동기, 어느 쪽으로 봐도 혈귀단을 막을 고수로는 더 이상의 적임자가 없다는 말씀.

내가 손짓을 하자 그들이 얼굴을 모았다.

“혈귀단은 다시 공격할 겁니다.”

“그 새끼들이 이대로 물러날 리 없지.”

곽예린이 씹어 뱉듯 말했다.

김선규와 곽선우, 처철수의 얼굴에 긴장이 내려앉았다.

적의 대부분은 어둠속성.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어려운 싸움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직의 핵심 전력을 이끌고 달려온 고마운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대로 돌아가셔서, 저에 대한 험담을 퍼뜨리세요. 랭킹전에서 우승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도우러 갔더니 욕만 처먹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이제 계룡과의 인연은 끝이다… 뭐든지 좋겠지요. 아니, 전부 다 퍼뜨리는 편이 좋겠네요.”

“검룡님.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김선규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처철수와 곽선우의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일하게 알아들은 얼굴은 곽예린뿐이었다.

“그 새끼들이, 계룡이 아닌 다른 성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혈귀단이 들어올린 깃발은 KKK단의 복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놈들의 깃발은 피로 뒤덮여 그 형체를 잃었어요. 모두 아시다시피, 계룡문은 KKK단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요.”

“검룡님께서는 그 대살육의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으셨지요?”

“네. 그런데도 놈들이 계룡을 공격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눈에 거슬려서?”

곽예린이 씹어 뱉듯 말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대꾸했다.

“그래요. 그러니까, 당분간 계룡과 관계가 악화된 것처럼 보이는 게 안전합니다. 놈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구 희망보육원의 대표실 바닥에 자욱하게 깔린 먼지 위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곽선우의 불퉁한 목소리였다.

“검룡님. 유성길드에도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갑자기 뭔 개소리?

이 새끼가. 사람이 기껏 생각해서 좋게좋게 얘기해주니까…….

“저희가 약해서 그러시는 거 압니다. 계룡을 돕다가 우리 보염련이 피해를 입을까봐 염려하시는 거요.”

“알면은 좀 가만히…….”

“그렇지요. 검룡님 눈에 보염련이 안 차시겠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검룡님.”

곽선우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를 내려다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목소리에 서린 단단함은 그대로였다.

“약해빠졌다고, 비겁해야 합니까? 약하면, 목숨도 못 겁니까?”

“쓰잘데기 없는 희생이…….”

“제 희생이 쓸모없는지, 있는지를 검룡님이 왜 결정하시죠? 제 죽을 자리는 제가 정합… 악! 아악! 악! 아, 아픕니다, 아파요!”

이놈이. 돌았나.

사람이 말하는데 두 번이나 끊어? 이게, 기껏 회장 취급해줬더니. 이 정도 내력 실린 후려치기에 눈물 질질 짜면서 뭐? 누가 누구를 도와줘? 엉? 약해 빠진 새끼가? 지키는 검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모르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새끼가? 엉? 도와? 제가 책임지고 있는 목숨이 몇 개인데, 그걸 내팽개치고? 씨발, 이 주인공병에 걸린 새끼가…….

‘나처럼 나대다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달으려고?’

내가 그때 중원 무림의 요청을 외면했더라면, 설표를 잃지 않았겠지.

소화가 그 가녀린 어깨에 월악의 운명을 짊어지고 마교를 뒤쫓는 일도 없었을 터.

그런데.

이 덩치만 커다란 물렁살 주제에, 뭐가 어째?

“용용아! 그만, 그만해! 내 삼촌… 아니, 육촌 아저씨? 아무튼 잡겠다!”

빙화신녀가 빙혈(氷血)을 시전해 다급하게 내 팔을 얼렸다.

나는 산매진화를 끌어올려 얼어붙은 팔을 녹이고는, 곽선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거 몇 대 맞았다고 머리 위에 부푼 혹을 매달고 있는 꼴이 나이 든 김강산이다.

…주제 파악 못 하고 날뛰다가 팔다리 다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새끼…….

를 닮은 표정을 지으며, 곽선우가 내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중얼거렸다.

“검룡님께서 왜 이러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보염련도 주사위 굴려서 계룡에 온 것은 아닙니다.”

이 새끼가. 진짜.

“곽선우 니가 지금 하는 짓은 보염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거라고.”

내가 차갑게 내뱉었으나,

“…어째, 주민투표라도 받아 올까요?”

김선규가 조심스럽게 묻고,

“필요하시다면, 청주성민에게 동의 서명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처철수가 결의에 차 외쳤다.

…아놔. 이 새끼들. 왜 다들 지랄이야. 지들이 무슨 웹소설 주인공인 줄 아나.

젠장. 가슴께가 뭉클한 기분이다. 설마…….

‘…나 지금 감동했니?’

***

“대표님! 또 어디 다녀오셨어요! 부대표님이, 부대표님이 깨어나셨어요!”

본부로 돌아온 나를 맞은 것은 하하민의 째질 듯 높은 목소리였다.

나는 계단을 걷어차 뛰어올라, 병실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지수 형!”

“그래, 형이다. 림아.”

“형, 진짜…….”

최지수의 안색이 파리했다.

침대 옆에 가만히 선 내 손을 최지수가 끌어당겼다.

그의 팔이 내 등을 감싸안았다.

“미안하다. 내가 무리해서 림이 너를 걱정시켰구나.”

“…진짜로, 뒈졌으면 뒈졌다고, 진짜…….”

내가 얼굴을 묻은, 최지수의 넓은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 검룡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걸 알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거다.”

“아,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니깐!”

“암독도 막는 호신강기가 먼지는 못 막나 보네.”

“몰랐어? 원래 미세먼지가 암독보다 무서워.”

나는 까글까끌한 눈을 껌벅이며 최지수를 바라보았다.

괴물화의 진행을 견디느라 스스로 만든 허벅지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아직 마력이 불안정하게 일렁였으나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게 안정된 상태였다.

-몸이 아니고 정신이 문제니까. 깨어나기만 하면 괜찮을 거야.

정하영의 말이 맞았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그러다가 진짜 괴물화되면 어쩌려고 그랬냐고.”

“림이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네가 마단전 깨뜨려서 살려줄 텐데.”

“…그러면, 일반인 된다고.”

내 목소리는 내 기분보다 훨씬 딱딱하고 불퉁거리는 듯 들렸다.

그런데도 최지수는 활짝 웃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한 번 간 길인데, 두 번째는 더 쉽겠지.”

이 형이. 진짜 돌았나.

“이러다가 또 처먹겠네? 어? 또 각성하리라는 보장도 없는데 뭔 개소리야?”

“안 한다. 안 해. 각성 못 하면… 부대표직은 내려놔야겠구나. 하영이가 연구소에 자리 하나는 마련해주지 않을까.”

“…웃지 마. 정들어.”

“이미 들었잖느냐. 그런데, 림아.”

“응?”

“저분은 누구시냐. 처음 보는 얼굴인데.”

서은창이 못 볼 것을 봤다는 경악한 표정으로 촉촉하게 젖은 나를 바라보다 흠칫 놀라 시선을 돌렸다.

“아. 형한테 소개해 주려고. 야, 서은창. 일로 와, 일로.”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서은창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띠며 쫄레쫄레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계룡우룡님! 그동안 명성을 귀에 박히게 들었습니다! 저는 어… 음…….”

“형, 얘 내 사제야. 월악문의 제자.”

최지수와 서은창의 놀란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 월악문?”

“…사제요? 어, 그래요, 그렇다 쳐도, 제가 사형 아닙니까? 검룡님 몇 살이세…악! 아악! 네,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사형! 사형님!”

.

.

.

최지수에게 그가 뻗어 있던 동안 일어난 일을 간략히 설명한 뒤 나는 곧바로 수련실로 향했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뿐이다.

계룡이 전국구가 되면, 튀어나온 못을 두들기려는 망치가 나타나리라는 건 예상했다.

하지만 최초의 망치가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몰랐고, 그게 혈귀단일 줄은 더욱 몰랐다.

철없는 보령과 청주의 애송이들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고.

최지수를 비롯한 은영단 애들도 이번 일에서 ‘주제넘게 나대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은 전혀 얻지 못한 눈치다.

오히려 병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계룡성민들의 감사의 인사와 병실에 그득그득 쌓이는 감사의 선물들에 입이 헤벌쭉 벌어져 있다.

‘이러다 까딱하면 뒈지지.’

왜 지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가.

높은 뜻, 굳은 의지를 지닌 자들이 세상을 지키겠다고 주제 파악 못 하고 나섰다가 싸그리 뒈졌기 때문이다.

-협을 행하고, 악을 멸하고, 약자를 구하고, 세상을 지킨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게 월악문의 사명이라고.

서은창은 그렇게 말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열 손가락의 손톱은 모두 살을 파고들 만큼 짧았다.

-협행멸악, 구약보세…….

오래된 기억을 뚫고, 여덟 글자 단어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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