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뫼비우스의 띠 (2)
-말했잖아. 월악을 그리워했다고. 이 사형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거냐?
놀란 듯 크게 뜨인 서은창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어머니께서는 월악문의 사명을 위해 혈귀단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뜻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누가 악인이고, 누가 약자인지,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니까, 더욱 더 알 수가 없어져서…….
월악에 남은 마지막 제자.
서은창이 흐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혈귀단의 악행을 외면하고,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내 손이 서은창의 어깨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가벼운 떨림이 느껴졌다.
-활빈당. 네가 이끄는 그 의적이 해온 일이 월악의 신념과 뭐 그리 다르겠냐.
약자를 지키고 세상을 구한다.
‘소화야. 네 뜻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구나.’
소화는 내가 죽은 뒤 끈질기게 마교를 쫓았다.
아마 단순히 내 원수를 갚기 위해서만은 아니었겠지.
그들이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뜻도 컸을 터.
그리고 소화의 뜻을 이어받은 월악의 제자들은…….
-예.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연구소를 세우고, 진법으로 연구소를 숨기셨다고요.
-야, 선배님이 뭐냐. 대 월악의 제자가.
-…그럼 뭐라고 합니까?
사숙조라는 말은 어따가 갖다 버리고 선배님이 뭐냐고. 내 월악문이 족보 없는 길드도 아니고.
…에휴. 시대가 바뀌었으니 내가 그러려니 해야지.
-됐으니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MM 연구소를 감싸고 있던 오행암행진(五行暗行陳).
그것은 몇 사람의 힘으로 완성할 수 있는 진법이 아니다.
그때까지 월악문은 존재했다. 그 힘이 약해졌다 할지라도, 무공을 지닌 이들이 적어도 수십 명 남아 있었을 터.
-1차 블랙데이에 괴물과 맞서다가 많이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30년 전까지 존재했던 월악문이, 거의 멸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어제까지 프로그래머였던 사람이 키보드와 마우스 대신 검을 쥐고, 짜장면을 만들던 중식당 주인이 식칼이 아닌 도를 휘두르게 되었다.
검이라고는 과일을 깎고 고기를 써는 게 전부였던, 검술이라고는 고블린 이빨만큼도 모르던 이들이 검으로 명성을 떨치는 세상.
내력과 마력의 운용이 조금 다르다지만,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련을 쌓았을 월악문의 제자들이 세력을 떨치면 떨쳤지 쪼그라들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까.
랭킹전에 나간 여러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월악의 제자를 찾을 수 있기를.
월악의 무공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 없으므로.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을 수밖에 없었다.
황미영이 월악의 마지막 제자였으므로.
-어머니께서는, 월악의 그 누구도 각성하지 못하셨다고 하셨어요. 본디 가지고 있던 내력이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건 아닌가, 하고요. 그래서 저에게는 처음부터 내공 수련을 시키지 않으셨다고요.
내력을 쌓은 나 역시 각성하지 못했다.
물론 내력이 없는 이들 중에도 각성할 확률은 1%.
그저 확률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는 추론이다.
그리고…….
-내력이 조금씩 줄어든다 하시더군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나요.
그럴 리가.
근골은 나이의 영향을 받지만, 내력은 노화와 무관하다.
-…그런가요? 어머니께서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는 이미 물어볼 선배…님은 아무도 안 계셨고요.
1차 블랙데이에 살아남은 월악의 제자들은 닫혔던 균열이 다시 열린 2차 블랙데이에, 스스로 균열로 걸어 들어갔다.
균열을 소멸시키겠다는 희망을 품고서.
-어머니께 월악을 이어가라는 유지를 남기셨다 들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 생각대로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내력이 줄어들었다고.’
내가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보육원의 그 누구도 내공을 쌓을 수 없었다. 아무도, 기(氣)를 느끼지 못했다.
내력이 사라진 세상이다.
마력(魔力)이 내력(內力)을 대체하고, 무공이 잊힌 세상.
이 세상에서.
어째서 나만, 나 홀로 내력을 쌓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의문을 지워내며 가부좌를 틀었다.
‘당장 할 일부터 하자고.’
최지수와의 대화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다시 시작하면 된다. 한 번 간 길인데, 두 번째는 더 쉽겠지.
최지수가 말했을 때,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데 너무 매달렸어. 그저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을.’
이것도, 저것도, 이번의 이것 또한, 백호를 소멸시킨 그 무공이 아니라 생각했다.
김강산에게 들은 설명과 달랐기 때문.
채찍처럼 긴 검기.
태양처럼 눈부신 빛.
주변을, 재앙을, 세상을 모두 멈춰 세운 듯한.
그 속에서 홀로 빛나던 한없이 부드럽고 동시에 한없이 강맹한 움직임.
남지호를 향해 이정용의 흑염이 쇄도했을 때.
언뜻 그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했다 느꼈다.
‘하지만 흑염은 멈추지 않았지.’
조금 전 최지수를 향해 떨어지던 도를 막아낸 무공 역시도.
부드러움은 지녔으나 강맹함은 없었다.
‘그’ 삼반공의 3절이 아니라 여겼다.
‘그’ 삼반공의 3절을 기억해내는 데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꼭 그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바깥에서 들리던 소란이 천천히 멀어졌다.
나의 의지에 따라 단전에서 풀려나온 삼재혼원공의 내기(內氣)가 느릿느릿 기맥을 휘돌기 시작했다.
***
“회장님! 북쪽 성벽에서 지원 요청입니다!”
“13방어단은?”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해무단을 보내라.”
“예!”
김선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보령성벽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시선은 아스라이 보이던 바다에 닿지 못했다.
성벽 바깥을 뒤덮은 괴물들 때문.
몬스터 웨이브에 못지않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해변에서 몰려나온 수백 마리의 나가를 시작으로, 세이렌과 금혈어가 바다를 나와 땅을 밟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바다 괴물은 육지 괴물과 달리 서식지가 자주 바뀌었다.
김선규는 침착하게 방어단을 지휘하며 보령성의 서쪽 성벽을 둘러싼 괴물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북쪽 성벽에 미호 떼와 와이번의 습격입니다!
-남쪽에 오크가 나타났습니다!
-동쪽 성벽에…….
괴물들은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비번이던 대원들을 모두 불러들였음에도 상황은 여전히 빡빡했다.
김선규는 연신 들려오는 폭음 속에서 성벽을 뛰어다니며 방어전을 지휘하며 검룡의 말을 떠올렸다.
-혈귀단 그 새끼들이 공격하면 봉화를 올리세요. 내가, 갈 테니까.
그 뒤로 계룡성과 연락하기 위한 봉화대를 정비해 놓았으나 한 달 동안 쓸 일이 없었다.
-아무튼 계속 경계를 늦추지 마시라고요들. 그 새끼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으니.
김선규 역시 검룡과 같은 생각이었다.
검룡이 계룡문과 선을 그으라고 이야기했을 때, 김선규는 사실 깊은 갈등에 빠졌다.
보령성이, 혈귀단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룡문과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혈귀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룡문과의 관계를 탄탄하게 하는 편이 나아.’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이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은 염화검제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규는 그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백호를 잡을 때 목격한, 신에 가까워 보이던 무위.
그걸 목격한 사람은 모두 자신과 같이 생각하리라 김선규는 확신했다.
더군다나 그동안 쌓아 온 검룡의 행적들을 생각하면 혈귀단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험은 감수할 만했다.
보령회의 모든 단원들은 곧 혈귀단이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뭍으로 올라온 나가 무리에게서 성을 방어하고, 유랑하는 오크 떼를 물리쳤다. 오크 떼의 뒤를 따라온 구울 수백 마리를 사냥했다.
그렇게, 오늘이 되었다.
연이은 괴물들의 습격을 간신히 막아내면서도 김선규는 봉화를 올리기를 망설였다.
‘우연의 일치라면 어떻게 하나. 그저 어쩌다가 괴물들이 몰려든 거라면. 혈귀단이 유인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지 않나. 괜히 검룡님을 번거롭게 만들게 되면…….’
-이 회장님 새끼가. 내가 혈귀단한테서 도와준다 했지, 언제 니들 성 지켜준다고 했어요? 엉? 내가 니네 보령회 새끼들 보디가드야? 이 회장놈의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딱 대! 어어? 피했냐? 이게 돌았나?!
꼴딱.
그런 일이 생겼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상상하던 김선규가 침을 삼켰다. 자신의 상상일 뿐인데 묘하게 리얼했다.
아침부터 이어졌던 괴물들의 습격은 해가 기울 때쯤 잦아들었다.
하루 종일 성벽 위를 뛰어다니며 검을 휘두르느라 마력을 꽤나 소모한 김선규가 여장에 기대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성벽 밖에 쌓인 괴물의 시체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구울이나 금혈어는 쓸모가 없었으나 오우거나 와이번 시체는 여러모로 유용했다.
‘이 정도면 우리 보령회도 썩 강해졌군.’
그날 이후 훈련 강도를 높인 보람을 느끼며 김선규가 괴물의 피로 찐득거리는 검을 닦아 검집에 넣었다.
그때.
“…회장님. 저기, 보십시오…….”
좀처럼 떨리지 않는, 해무단 단장 양승미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김선규의 시선이 양승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을 향했다.
흙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던 괴물 시체들이, 한 곳을 향해 꿈틀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뒤이어,
북쪽 성벽에서 위험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랐다.
동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아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
“…암주술입니다. 어둠술사, 혈귀단의 짓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김선규가 신음을 흘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하루 내내 이어진 격전 때문에 모든 단원들이 꽤나 지친 상태. 이 상황에서 저 시체 괴물을 막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 일을 꾸민 혈귀단 놈들이 곧 성으로 들이닥칠 터.
‘검룡이 은영단을 이끌고 보령까지 오는데 최소 세 시간. 그때 보령에 살아남은 인간이 있기는 할까. 역시 그때 검룡의 말대로 계룡문에 등을 돌렸어야…….’
“회장님!”
다그치듯 자신을 부르는 양승미의 목소리에 김선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계룡에 상황을 알리는 봉화를 올릴까요?”
“…그래. 당장. 그리고 일반인을 안전 구역으로 대피시키도록.”
그러는 동안에도 시체들은 꿈틀거리며 모여들고 있었다.
10미터 성벽보다 까마득하게 높아진 시체 괴물이 단단하게 경화하기 시작했다.
-시체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이미 주술이 시전된 거라, 그때 공격해봐야 소용없어요. 주술 끝나서 경화되면, 화염이랑 빙결 번갈아 쏴서 약화시킨 다음에 물리데미지 입히는 게 젤 빨라요.
이런 상황에 대한 대책은 마련되어 있었다.
단지, 처음일 뿐.
김선규는 최지수에게 건네받았던 마력증폭제를 꿀꺽 삼키며 다시금 검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버티면 검룡님께서 우리 보령성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버텨내자!”
김선규가 외치며, 검을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결의에 찬 목소리들이 그 뒤를 이었다.
“화염술사, 공격 준비!”
“예!”
잠시 후.
50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시체 괴물을 향해, 빨갛고 노란 수십 개의 화염구가 연달아 쏟아지기 시작했다.
***
발밑은 온통 암흑이었다.
“야, 주월매야. 더 빨리 가라고. 왜 이리 미적거려.”
뀨욱?
“이 미친 새새끼가… 알았다고, 대환단 반 알. 더 이상은 협상 불가. 협상 끝! 디엔드!”
끼우욱… 뀨욱?
월매가 사뭇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의 새새끼가 돌았나.
나 먹기에도 손이 떨리는 대환단을, 대체, 얼마나 처먹으려고!
“…오케이. 한 알. 온전한 한 알. 더 이상은 진짜 못 줌. 나도, 엉? 내력 더 쌓아야지. 너 나 뒈지는 꼴 보고 싶냐? 엉?”
끼루룩!
상큼한 소리를 내지른 월매가 거대한 두 날개를 거세게 휘저었다.
‘아오!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갑작스러운 가속에 순간적으로 기운이 흐트러졌다.
가벼움을 잃은 내 몸이 본래의 무게를 되찾자, 내 무게를 이기지 못한 월매가 균형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추락하기 직전.
나는 정신을 집중해 다시 기운을 운용했다.
삼반공의 제3절, 결(結).
내기(內氣)를 외기(外氣) 속으로 흘려보내,
내기와 외기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이루는 기공.
내가 검황이던 시절 창안한 삼반공의 3절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이제 상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쓰잘데기 있는 걸 만들어서 잘 쓰면 장땡이지.’
백회를 통해 빠져나간 기운이 갈라지고, 나뉘고, 잘려나가 자연의 기운 속으로 흘러들고 있다.
먼지처럼 작아진 진기.
곧 소멸할 듯 작지만 끝내 소멸하지 않는.
허공을 떠도는 외기가 그 내기와 뒤엉키고 뒤섞이고 있다.
‘나를 지운다. 내 팔과 다리, 몸통과 검을 지우고, 날카롭게 벼린 검을 지운다. 나는 한 그루 나무가 된다. 한 송이 꽃이 된다. 한 줌의 공기가 된다.’
나를 지움으로써 나는 자연이 된다.
그럼으로써, 자연은 곧 내가 된다.
나는 하나의 허공.
한없이 가벼운…….
내 무게가 사라지자 월매가 균형을 되찾았다.
긴 날개가 허공을 유려하게 휘저었다.
발사대에서 쏘아진 로켓처럼, 흰 매가 엄청난 속도로 밤을 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