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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60화 (60/122)

60화. 뫼비우스의 띠 (3)

“회장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방어선 안으로 피하십시오!”

“안 돼! 아직 퇴각하지 못한 방어단이 남아 있다! 나는 마지막에 떠날 테니, 4방어단부터 빨리 퇴각시켜!”

카강!

양승미의 검이 청귀대주의 환도와 격돌했다.

김선규의 명치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가로막힌 환도가 이내 양승미의 어깨를 향해 휘둘러졌다.

양승미는 풀썩 뛰어 환도를 회피하려 했으나 한 발 늦었다.

암독에 휩싸인 환도가 양승미의 팔꿈치를 지났다.

절단면을 타고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대로 두면 암독이 온몸을 잠식할 터.

-바로 해독 못 하면 그냥 잘라. 그게 젤 빨라.

스파앗.

김선규가 재빨리 검을 휘둘러 양승미의 팔을 잘라냈다.

검게 물든 살덩이가 앞서 잘려나간 팔꿈치 옆으로 떨어졌다.

“시발, 존나 눈물겹네. 니들 지금 영화 찍냐?”

혈귀단의 청귀대주가 환도를 흔들며 지껄였다.

양승미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힐링포션을 깨물었다. 배급받은 마지막 힐링포션이었다.

왼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던 피가 멈추었다. 하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오른팔은 멀쩡하잖아. 그거면 충분해.’

양승미는 검을 움켜쥐며 김선규의 옆에 나란히 섰다.

호인이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그동안 양승미는 보령회의 회장 김선규를 썩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우선시 여기는 가치는 자신의 목숨.

그런 김선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양승미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검룡을 만난 뒤부터였지.’

한 달에 한 번 나와 보지도 않던 성벽에 매일같이 얼굴을 비추고, 앞장서 괴물을 잡고, 훈련장에 나와 훈련을 독려했다.

그리고

오늘의 전투.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원들을 지키고, 성민을 지키는 이 모습.

양승미는 비로소 보령회의 회장을 자신의 회장으로 인정했다. 비록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죽음이지 않나.’

혈귀단에 맞서 보령성민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보령성 중앙으로 대피한 보령성민들은 지금쯤 땅굴을 통해 탈출을 거의 완료했을 터.

그 시간을 번 것으로도 양승미는 만족했다.

거대한 팔을 휘저으며 성벽을 무너뜨리려 다가오는 시체괴물을 겨우 소멸시켰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마력이 소모되었다.

검푸른 복면을 쓴 혈귀단의 청귀대가 성벽을 넘어 쇄도하기 시작했을 때, 양승미는 절망을 느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아.’

청귀대주가 자신들을 가지고 놀듯 느긋하게 굴지 않았다면 진작 끝났을 목숨이다. 아무리 검룡이라도, 순간이동이라도 하지 않는 한 보령을 구할 수 없을 터.

“해무단장, 너도 퇴각해! 2선을 지켜야지!”

“회장님이 가십시오.”

양승미는 상처투성이의 다리로 땅을 단단하게 디디며 자세를 낮췄다.

“지랄도 가지가지 하네. 누가 보내 준대냐?”

눈앞의 상대를 향해 어마어마한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탐색술이 없는 자신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마력.

김선규 역시 그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상대를 막을 수 없다는 깊은 좌절감과 함께.

“…대체 왜 보령을 공격한 거냐.”

“아. 네가 회장이라지. 요즘은 참 자격도 없는 새끼들이 장을 단다니깐.”

“어째서 보령을 공격했냐고 물었다. 이곳이 내 무덤이 될 텐데 곧 죽을 사람에게 아량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복면 아래에서, 귀를 째는 듯한 날카로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쇠를 긁는 것 같은 웃음소리에 김선규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량? 아아량? 킬킬… 내 남편에게 단 한 명이라도 아량을 베풀어 줬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안 했지! 씨발! 내 남편이 잘못했다고 그렇게 빌었는데! 갈기갈기 찢어 죽여 놓고! 이제 나한테 아량을 바래?! 씨발! 좆같은 인간! 좆같은 내로남불!”

청귀대주가 발작하듯 몸을 떨며 버럭 욕설을 내뱉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기는 글렀군.’

김선규가 아쉬움을 삼키며 마력을 집중했다.

청귀대주의 발작은 시작되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멈췄다.

검은 복면 아래에서 싸늘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씨발. 존나 짜증나네. 이만 끝내야겠다.”

복면인이 내민 왼손 위로 화염탄처럼 둥근 구슬이 떠올랐다.

적색도, 황색도, 청색도 아닌 짙은 검은색의 구슬.

“암독탄이다, 모두 피해!”

김선규가 외치며 거세게 청귀대주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양승미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양승미는 김선규의 뒤를 따라 청귀대주를 향해 달려들기 위해 검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와이번만큼 커다란,

어두운 밤하늘에서 마치 빛을 발하듯 환하게 빛나는,

‘…새?’

누군가가 질러대는 소리가 문득 양승미의 귀를 파고들었다.

“월매다!!”

‘저게, 계룡의 월매? 하지만 고작 새 아닌가? 왜 빛이 나는 거 같지?’

양승미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주르륵 떠올랐다.

그 의문은 금방 풀렸다.

하늘 한중간에 둥실 뜬 월매의 등 위에서,

검을 쥔 사람 하나가 풀썩 뛰어내렸기 때문.

보령회의 모두가 기억하는 이.

그들을 이미 한 번 구원한 이.

“계룡검룡이다!!!!”

“검룡님께서, 보령을 구하러 오셨다!!!!”

“살았다!!! 우린 이제 살았어!!!!”

새하얀 빛은, 그가 쥔 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귀가 터져나갈 듯한 환호 속에서, 검룡이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파공성도, 기합 소리도 없었다.

밤처럼 고요하게, 검을 채운 새하얀 빛이, 별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가느다란 빛줄기들이 소나기처럼 지상을 뒤덮었다.

그건 불꽃놀이 같았고, 나이 먹은 이들이 기억하는 놀이동산의 레이져 쇼 같았고, 유성우 같았고, 마치 살아있는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땅굴을 통해 보령성에서 막 빠져나온 보령성민들, 땅굴로 머리를 들이밀려던 보령성민들, 청귀대와 맞서 싸우던 보령회의 대원들, 그들을 향해 암독을 쏘아내던 청귀대원들, 그리고 청귀대주까지.

모두 일순간 넋을 잃고 빛으로 수놓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다들 넋이 나갔네, 나갔어.’

내 등장이 썩 인상 깊은 모양이다.

삼반공의 4절, 산(散).

위력은 아직 대단치 않지만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기술이다. 더불어, 시각적 효과가 썩 훌륭하다.

저 봐. 애새끼들 입 쩍 벌리고 선 거.

3반공의 3절, 결(結)의 운용을 중지하자 제 무게를 되찾은 내 몸이 빠른 속도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허공답보로 낙하 속도를 조절하며 연달아 산(散)을 시전했다.

검기를 넓게 펼치는 것은 간단하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 또한 간단하다.

기운을 흩을수록, 그 위력이 떨어지니까.

산(散)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나누되, 위력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수백 가닥의 빛줄기는 사실상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의 다발.

다만, 온전한 내 내력으로만 이루어진 적(積)과는 달리, 산(散)으로 형성한 강기에는 외기(外氣)가 섞여 있다. 삼반공의 3절과 1절을 융합한 것이라고나 할까.

검끝에 희게 맺힌 강기의 구슬.

일견 하나의 구슬처럼 보이지만, 사실 수백 개의 작은 구슬이 각각의 원을 그리며 거세게 회전하고 있다.

뺨을 갈기는 바람이 거셌다.

무서운 속도로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떨어졌다가는 내 몸이 으깨진 묵사발이 되겠지만…….

‘지금 결(結)까지 운용할 여유는 없어.’

가볍게 검을 내리긋자,

수백 가닥의 강기의 구슬이 어둠을 가르며 지상을 향해 흩어졌다.

나는 온 정신을 진기의 운용에 집중했다.

월영검을 떠난 강기의 구슬들이 회전에 더욱 속도를 더했다.

본디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에 끌리는 법.

블랙홀이 별을 끌어당기듯, 주변의 외기가 작은 강기의 구슬을 향해 빨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거센 회전에 휩쓸리고,

엉겨 붙고,

삼켜지고,

하나가 되어,

끝내 수백 가닥의 빛줄기로 화했다.

유성우의 꼬리처럼 긴 흔적을 남기며, 그 빛줄기가 지상에 닿았다.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팟. 파앗. 팟. 파아앗. 파밧.

작고 날카로운 파공성.

폭포처럼, 분수처럼, 불꽃놀이처럼 쏟아지는 백색의 진기가 청귀대 놈들이 뿌려 놓은 암독무를 찢고, 놈들의 어깨를 꿰뚫고, 팔목을 잘라냈다.

피가 튀고, 비명 소리가 지상을 수놓았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허공답보를 운용한 내 발이,

피와 비명의 한가운데에 닿았다.

타앗.

예술점수 10점 만점에 10만 점.

기술점수 10점 만점에 100만 점.

착지한 장소는 김선규와 혈귀단 놈의 딱 중간.

위치점수 10점 만점에 1000만 점.

“회장님. 얘네들이 전부?”

“네! 보령성 습격은 청귀대뿐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나는 입술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네가 청귀대주?”

“네가 그 검룡이구나.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운 좋게 적귀대주의 목을 잘랐다고 기세등등한 모양인데. 나를 그놈과 같은 수준으로 착각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될…….”

“또 말이 많네.”

콰아아!

탄지공(彈指攻)으로 날린 돌조각 두 개가 놈의 환도에 부딪혀 떨어졌다.

기본은 되어 있는 놈이고.

청귀대는 아직 1선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뿐 일반인들이 피신한 2선 방어벽을 뚫지 못했다.

‘아니, 않았겠지.’

계룡성 전투 이후 한 달.

놈들이 고작 이걸 위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성동격서. 보령을 치고 나를 끌어내, 그 사이에 계룡을 친다.’

나름대로 작전이랍시고 세웠겠지만…….

놈의 흔들리는 마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내가 놈들의 계산보다 너무 빨리 도착했겠지.

나도, 내가 정말로 월매에 탑승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니들이 어떻게 예상했겠냐고.

나는 가볍게 어깨를 추키며 기습적으로 물었다.

“혈왕은 어디에 있지?”

“그 더러운 입으로 그분의 존함을 입에 담다니! 내 너를 감히 용서하지 않…….”

“야. 아무리 시간 끌려고 아무 말 한다지만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냐?”

“…시간을 끈다니! 나는……!”

콰아아!!!!!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의 구슬이 놈의 환도와 격돌했다.

안면을 노리고 날아간 강기는 환도에 가로막혔으나,

‘그것도 못 막으면 실망이지.’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허벅지를 수평으로 베어 들어갔다.

다급하게 왼쪽으로 피하는 놈을 향해 오른발을 거세게 내디뎠다.

수직으로 그은 검날이 놈의 팔꿈치를 지났다.

어깨를 젖혀 환도를 회피하며 당랑각(螳螂脚)으로 놈의 대퇴를 걷어찼다.

동시에 올려친 검이 놈의 가슴팍을 세로로 스쳤다.

허리를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월영검을 회피한 놈이 내 목을 노리며 환도를 휘둘렀다.

카앙!

비스듬히 세운 월영검의 검날이 환도를 가로막는 순간.

적(積)으로 형성한 왼손의 강기가 놈의 복부에 직격했다.

아주 잠깐, 놈이 휘청거렸다.

나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왼발을 내딛으며 상단을 찔렀다.

목줄기를 노린 월영검은 놈의 귓볼을 잘라냈다.

붉은 피가 어두운 밤 사이로 스며들었다.

찢어진 파란색 복면이 펄럭이며 바람에 날아가고,

복면에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관자놀이가 튀어나오고, 쌍꺼풀이 짙고, 입술이 두꺼운, 중년의 여자.

피부가 검고 눈이 깊다.

한국인이 아니다.

아주 발음이 유창했는데 말이지.

‘외국인이 많겠지. 혈귀단이 KKK단의 잔당들이니…….’

KKK단에는 유독 외국인이 많았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차별을 당한 경험이 그들을 살인귀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3차 세계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타국에서 파견한 특수조직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서림이 아닌, 박승주가 들은 소문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 미처 한지혁의 어머니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남지호를 마주쳤을 때, 한지혁의 엄마가 KKK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한지혁이었을 때, 나는 엄마가 외국인이라고 놀리는 애들에게 주먹을 휘둘렀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뻣뻣하게 굴 거라면 네 나라로 도로 꺼지라고!

한지혁의 아버지는 엄마에게 주먹을 휘둘렀었다.

엄마도 맞고만 있지는 않았으나, 피가 나고 멍이 드는 쪽은 항상 엄마였다.

아버지의 팔은 엄마의 그것보다 길고 두꺼웠으므로.

한 번은 경찰이 왔다가 엄마와 아버지의 얼굴을 넌지시 살피고는 충고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하고는 돌아갔다.

-쯧. 쯧.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걸 깊은 고민도 없이 훌렁훌렁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쯧, 쯧.

엄마에게 하는 말인지, 아버지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불분명한 문장이었다.

그때 엄마는 새끼손가락이 부러졌고, 이마와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도.

만약 1%의 확률을 뚫고, 엄마가 각성했다면.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물론, 엄마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남지호는? 남지호 역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럴 사람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아닌 것이다.

나는 남지호가 지껄인 말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서은창은 내막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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