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61화 (61/122)

61화. 뫼비우스의 띠 (4)

-그 전쟁 직후에, 서로 빼앗고 뺏기고, 죽고 죽이고, 아주 난리였다면서요. 아, 사형도 대살육의 시기는 잘 모르시죠? 그때… 사형 태어나기 전이죠?

-뭐, 그렇지.

나는 적당히 대꾸했다.

서림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대를 살았다. 박승주라는 이름으로.

3차 세계대전은 승자 없이 끝났다.

전국, 아니, 전 세계를 괴물이 들끓는 잿더미로 만든 채…….

얼마 남지 않은 군인들이 명령에 따라 괴물을 막아섰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와중에, 수도방위사령부를 필두로 한 몇몇 부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성벽 바깥을 향해야 하는 총구를 서울성 안으로 겨누었다.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을 암살한 쿠데타 세력은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고 정권을 손에 넣었다.

그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최초의 길드이자 최대의 길드, 대한길드.

대한길드의 길드장 염화검제 이정용은 21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수방사의 박교진 준장을 끌어내리고, 대한길드가 오백만 서울성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약속했다.

이정용은 서울성의 해방자로 칭송받았다.

그 치솟던 인기가 하루아침에 똥통으로 굴러떨어진 것은, 지독한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면서부터.

-전국에 전염병이 돌았다더라고요. 특히 서울성이 아주 심했대요. 사람들이 하루에 몇 천 명씩 죽어갈 정도였다니까요.

나, 박승주도 전염병으로 죽었었지.

그때는 KKK단이 퍼뜨린 암독인 줄 알았었지만…….

-KKK단의 존재가, 이정용이 퍼뜨린 헛소문이라고?

-완전한 헛소문은 아니고요. 비슷한 조직… 그러니까, 외국인 각성자가 주축이 된 일반인 테러 조직이 있기는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규모는 아주 작았지만요.

-그 시대에 그런 조직이 어디 한둘이었겠냐.

서은창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어깨를 추켰다.

-그 이름. KKK단이라는 이름을 만든 건 확실히 염화검제예요. KKK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외국인으로 구성된 일반인 혐오 범죄조직 KKK단이 암독을 퍼뜨리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려서…….

나는 이정용의 목적을 쉽게 이해했다.

괴물.

기아.

전염병.

만연한 범죄.

극심한 혼란.

이 모든 걸 한큐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적’이 필요하다.

이후 ‘내’가 그 ‘적’을 박살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이야. 사형, 대단하시네요. 역시 생각하는 게 염화검제 못지않게 음흉하…실 리가 없다고요! 우리 월악문의 사형, 계룡의 검룡님께서 그럴 리가! 없고말고요!

KKK단으로 몰려 외국인과 혼혈이 곳곳에서 살해당했다.

어쩌면 대한길드의 뒷공작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혹은 그런 공작조차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어쩌면, 아마, 한지혁의 엄마도 그 과정에 사망했을 터.

남지호는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어둠속성으로 전직하고, 안산성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혈귀단이 되어…….

‘그래서 누명을 씌웠다고 지껄였구나. 이… 멍청한 놈아.’

이정용은 손쉽게 목적을 달성했다.

사람들은 악명 높은 KKK단을 격퇴한 길드 연합을 새로운 세상의 질서로 수용했다. 여덟 길드는 본성과 각 지역을 지키고 관리하는 맹주(盟主)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 아래, 극심한 혼란은 차츰 잦아들었다.

도시가 재정비되기 시작하면서 전염병도 세가 꺾였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내 절친 남지호는 아마 그런 과정을 통해 혈귀단이 되었을 터.

거악 중의 거악, 테러를 일삼고, 혈겁을 일으키는,

세상의 공적(公敵).

‘이정용. 원하는 바를 이루어 썩 즐거웠겠어.’

복면이 벗겨진 청귀대주가 두꺼운 입술을 실룩이며 내뱉었다.

“계룡검룡, 핏덩이 주제에 제법인데? 내가 네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한 번 붙어보고 싶어 근질거렸다니까? 너처럼 영웅심리에 들뜬 어린 애새끼가…….”

스팟.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입을 막았다.

놈은 재빨리 두 걸음 물러서며 거칠게 환도를 휘둘렀다.

어쩌면 놈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이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놈의 전직의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악행을 시작했는지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시점이 있다.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버린 후에는, 중요한 건…….

그 무한한 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느냐.

‘…그게 중요하다고. 이 멍청한… 멍청한, 남지호 놈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눈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그런 기분으로,

나는 연신 검을 휘둘렀다.

팟. 파앗!

검날이 놈의 어깨를 스쳤다.

수평으로 휘둘러진 환도를 허리를 깊숙이 숙여 회피하며, 동시에 내지른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발목을 찔렀다.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으나, 치명타는 아니었다.

실력은 있는 놈이다. 빙화신녀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일까.

혈귀단의 네 대주들의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최지수에게는 확실히 버거운 상대였을 터.

…그 실력으로 하는 짓이 고작 이딴 짓이냐.

‘이건 복수도 뭣도 아니라고.’

눈 깜짝할 만큼의 짧은 순간.

수십 번의 공방이 오갔다.

놈의 환도는 단 한 번도 내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반대로 내 검은 차근차근 놈의 가죽을 파헤치고 살점을 뜯어내는 중이었다.

“씨바알!!!!!”

놈이 욕설을 내뱉으며 팔꿈치가 덜렁거리는 왼팔을 들어올렸다.

거센 소용돌이처럼, 마력이 놈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놈의 왼손 위에 순식간에 검은 구슬이 떠올랐다.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짙은 마력.

‘증폭제를 먹었군. 그래봤자야.’

왼손에는 암독탄.

오른손에 쥔 환도에는 암독무.

암독이 일렁이는 환도를 휘두르며 놈이 암독탄을 내던졌다.

둘 다를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바닥을 걷어차 몸을 날리자, 놈의 환도가 허공을 갈랐다.

이내 내가 서 있던 곳이 짙은 암독무에 휩싸였다.

하지만 내 몸은 이미 그곳을 빠져나온 뒤였다.

내 몸이 향하는 곳은, 암독탄.

맞붙어 싸우고 있는 보령회 녀석들과 청귀대 놈들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가고 있는-.

내 발이, 암독탄의 앞에 정확히 내려섰다.

월영검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고,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희뿌연한 검기가 남았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던 암독탄이 반구형의 구슬 안에 들어오는 순간, 열려 있던 구슬이 완전한 원을 형성하며 닫혔다.

검망(劍鋩).

저 거지 같은 암독을 상대하기에는 이만한 게 없지.

내력이 잔뜩 주입된 검망이 폭발하듯 빛을 발하고,

이내, 소멸했다.

“와우. 대단한데?”

저만치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 기술은 이름이 뭐야, 대단하신 검룡님?”

청귀대주놈의 왼팔이 김선규의 목을 쥐고, 놈의 환도가 그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김선규, 이 띨띨한 놈이.’

나는 검끝을 아래로 내리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검망이라고 할까 그냥 망이라고 할까 고민 중이야.”

“망이 좋겠군. 지금 네 상황에 딱 맞으니까.”

청귀대주 놈이 클클대며 대꾸했다.

띨띨한 놈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검룡님!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이자를 처단하십시오! 어서!”

물론 청귀대주 놈도 나도 김선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청귀대는 동작을 멈춰라!”

청귀대주 놈의 지시와 함께 보령회와 전투를 벌이고 있던 청귀대 놈들이 병장기를 거두고 청귀대주의 주변으로 일사분란하게 모여들었다.

‘귀찮게 됐군.’

차라리 대주놈이 보령회에게 멈추라고 협박하며 성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면 고민의 여지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보령성을 지키기 위해 보령회장을 희생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청귀대주가 인질로 협박하며 청귀대를 뒤로 물린 지금, 김선규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공격하기에는…….

“계룡검룡아. 내가 시간을 끌고 있는 걸 눈치챈 거는 칭찬해주겠지만 말이야. 알면, 뭐, 어쩔 건데? 응?”

“칭찬 고마워. 혈귀단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썩 좆같네.”

놈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급작스럽게 웃음을 멈춘 놈이 김선규의 목에 환도를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날이 김선규의 목줄기를 살짝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김선규의 목젖이 크게 일렁였다.

“허튼짓 하지 마. 마력 끌어올리면 이놈 목은 바로 댕강!”

“…알았으니까 진정하라고.”

“자아. 검은 땅에 내려놓으시고.”

놈의 피로 붉게 물든 월영검의 검끝이 바닥에 꽂혔다.

입술을 비틀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놈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 대에단하신 검룡님이 어쩔 줄 모르는군.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해대니까 진짜 영웅이라도 된 것 같애? 어쩌나.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 우리 혈귀단이 네 사랑하는 계룡문을 시체 구덩이로 만들고 있을 텐데.”

“…우리 계룡문을 얕보고 있는데. 우리 애들은 그리 약하지 않아.”

“너야말로 혈귀단을 얕봤지. 제 성을 버리고 남을 구하러 오다니. 설마설마 했는데 진짜 올 줄이야. 명성에 눈이 멀어서. 쯧쯧. 좌룡이니 우룡이니 해대더니 사실 별로 안 아끼는 건가? 아니면 진짜 믿는 거야? 고작 적귀대주에게 죽었다가 살아난 우룡이 계룡을 지킬 수 있다고?”

말이 많다. 제 생각대로 일이 풀리는 것 같으니 꽤나 신이 난 모양이다.

…하지만 니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거든.

최지수와 김강산을 우룡, 좌룡이라 싸잡아 부르지만, 무력은 김강산이 비교할 수 없도록 높다.

그날 김강산도 꽤 큰 부상을 입었으나, 그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둠속성을 제대로 상대해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팔 하나와 다리 두 개는 암독 증상 때문이었지, 적의 공격에 직접 당한 건 아니었다.

거기다가.

서은창과, 빙화신녀가 있지.

서은창에게 마핵 네 알을 털어 먹였다. 놈들이 한 달이나 기간을 준 덕에 그 마력 흡수도 진작 끝났다.

그리고… 또…….

대주놈은 신이 나서 주절거리기에 바빴다. 나는 적당히 입술을 짓씹으며 대꾸해주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꾸해줬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조용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죽어라 마력 탐색 해 봐라. 내가 탐색술에 걸리겠냐고. 이 등신들아.’

단전을 휘돌던 진기가 열린 명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너른 강처럼 도도한 흐름은 근축과 신도, 대추와 아문을 통과해 백회에 닿았다.

백회를 통해, 내기(內氣)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흘러나온 진기의 일부는 곧 흙으로 스며 작고 단단한 대지 속 외기와 엉켜들고, 또 일부는 바람에 일렁이는 얇은 나뭇가지 속 외기와 엉켜들고, 또 일부는 바람이 지나가는 허공 속 외기와 엉켜들었다.

삼반공의 3절, 결(結).

소리 없이 시전된 기공이 공간을 잠식했다.

내가 가만히 의지를 발(發)하자,

공간이 청귀대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마력이 서린 근육이 꿈틀거리던 팔꿈치가 멈추고, 환도를 쥔 손목이 정지했다.

아주 짧은 틈.

하지만.

내가 파고들기에는 충분한 틈새.

탓.

내 발이 거세게 바닥을 박차고,

내 손이 월영검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어디서, 수작질을……!”

결(結)이 풀리자마자, 청귀대주의 환도가 김선규의 목줄기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카강!

그 날은 김선규의 목을 잘라내지 못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월영검이 놈의 환도를 막아냈기 때문.

하지만 아직 놈의 왼손은 김선규의 목줄기를 쥐고 있는 상황.

‘일단 저거부터 빼내고.’

나는 오른손의 월영검을 역수로 쥐고 그대로 놈의 왼쪽 어깨를 찔렀다.

“어디, 좆대로 해 보시지!”

놈이 재빨리 반 발짝 물러서며 김선규를 들어 제 방패막이로 삼았다.

예상했던 그대로다.

‘등신아, 허초거든.’

나는 월영검을 거두며, 왼발을 크게 내뻗어 놈에게 따라붙었다.

동시에 내뻗은 왼손이 놈의 복부에 닿았다.

퍼어억!!!!

진기로 희게 빛나는 권이 놈의 뱃가죽에 격중했다. 충격을 흡수하려 놈이 뒷걸음질쳤으나,

나는 재빨리 놈에게 따라붙으며 월영검을 휘둘렀다.

스파앗!

검기로 희게 빛나는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팔꿈치를 꿰뚫었다.

손목을 비틀며 단번에 검을 뽑아내자,

상급 괴물만큼 두껍고 단단한 가죽을 뚫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놈의 왼손이 김선규에게서 떨어졌다.

“받아서, 꺼져!”

김선규의 목줄기를 잡아채 양승미에게 내던지자,

양승미가 넋 빠진 김선규를 업고 재빨리 멀어졌다.

‘이제야 좀 편하게 싸울 수 있겠네.’

나는 월영검을 가볍게 흔들며 청귀대주 놈을 응시했다.

그 사이 힐링포션을 먹었는지 손목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고 있다. 회복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다.

“오우거냐? 그래서 그렇게 느려 터졌구나?”

“…이 좆같은 새끼가.”

놈이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두꺼운 입술에서 이를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어깨를 추키며 가볍게 대꾸했다.

“많이 듣는 말이야. 그리고 그 개소리를 지껄인 놈들은 다들 금방 후회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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