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스위트 스위트 홈 (1)
청귀대주 놈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주절거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는군. 대살육의 시대도 겪지 않은 애송이가 무엇을 안다고…….”
“살육은 지금 니들이 벌이는 짓거리거든?”
“…이건 복수다! 씨발, 인간이라는 새끼는 싹 다 죽어야 해! 내 남편을 그렇게 죽이고……!”
더 말을 나눌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적어도 이번에 혈왕놈이 나왔는지는 확인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한 달 전 계룡을 습격했던 적귀대는 1/3 가까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그 와중에 열 몇 놈 졸개들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을 뻔했다.
놈들은 자신에게 달아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제 검으로 제 목을 찔렀다.
-아마 주술에 걸려 있었을 거예요.
서은창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자기편한테도 주술을 건다고?
-혈왕은 그런 인간이니까요. 아무도 믿지 않아요. 아마 자기 자신도 믿지 않을 걸요?
믿음도, 희망도, 기대도 없는 인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친 살인귀.
‘이번에 끝장을 보지 않으면…….’
그 혈왕놈이 무거운 엉덩이를 털고 내려왔는지, 아니면 은거지에 처박힌 채 다음 수를 꾸미고 있는지는 계룡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검룡 너 역시 곧 깨달을 거야. 인간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그렇게 애를 써서 지킬 필요가 없다는…….”
타앗.
나는 바닥을 걷어차며 놈을 향해 쇄도했다.
놈이 기다렸다는 듯 주절거리던 말을 멈추며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까부터 일렁이던 마력이 단숨에 암독탄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같은 패턴을 반복하면 독자들이 지루해 한다고. 이 띨빡아.
끝낼 때가 되었다.
얼른 끝내고, 계룡으로 돌아가야지.
최지수가 있고, 김강산이 있고, 은영단이 있고, 서은창이 있는 내 계룡. 내 집. 내 스위트 스위트 홈.
있는 대로 진기를 끌어올리자,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오른 기운이 월영검을 희게 빛냈다.
나는 한 줄기 빛이 되어 놈을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
적(積)으로 형성한 강기가, 완성되기 직전의 암독탄을 깨뜨렸다.
충분히 짙어지지 않은 암독,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농도의 암독이 주변을 잠식했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호흡을 멈추자마자,
거센 파공성과 함께, 놈의 환도가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어깨를 비틀어 공격을 흘리며 쾌속하게 검을 내뻗었다.
스파앗!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무릎을 스쳤다.
두 번째로 휘두른 검이 놈의 가슴을 스치고,
세 번째로 휘두른 검이 막 회복된 손목을 잘라냈다.
네 번째로 휘두른 검이 놈의 옆구리를 꿰뚫고,
다섯 번째로 휘두른 검이 허벅지에 꽂혔다.
“너는, 인간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
권(拳)에 복부를 격중당한 놈이 피를 울컥 뱉으며 지껄였다.
나는 대답 대신 여섯 번째로 검을 휘둘렀다.
새하얗게 발광하는 검날이 드디어 놈의 목덜미를 지났다.
작은 소리를 내며, 몸에서 분리된 놈의 모가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핏발 선 눈은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잔뜩 부릅뜨고 있었다.
‘너도 인간이야, 새끼야. 인간이 그렇게 싫으면 네 목부터 자르든가.’
나는 가볍게 그 대가리를 걷어차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니네 대가리 뒈졌어! 따라갈 준비는 됐지?”
청귀대 놈들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다.
자신의 목숨은 아까운 놈들.
타인의 목숨은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놈들.
‘소화야. 오늘은 손속에 사정을 둘 수가 없겠구나. 네가 슬퍼한다 해도 말이다.’
보령회가 기세를 올리며 청귀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내 몸이 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분수처럼 튀어오른 핏방울이 내 옷에 방울방울 맺혀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이, 검날이, 손톱이, 붉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여 명 청귀대는 절반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보령회에서 처리할 수 있겠지.’
내가 김선규를 소리쳐 부르자 선두에서 보령회를 지휘하고 있는 김선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제 나머지는 수습할 수 있죠?”
“네! 보령은 걱정 마시고 계룡으로 돌아가십시오!”
“데데하게 굴지 말고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나중을 위해서 좋아요.”
“걱정 마십시오, 검룡님! 저 김선규와 보령은 오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됐고. 살아남기나 하라고.”
“…넵!”
휘파람을 불자, 보령성의 하늘을 휘돌던 월매가 나를 향해 활강하기 시작했다.
***
그 시각. 계룡성.
보령에서 올린 봉화가 계룡에 전달된 직후, 서림은 보란 듯이 우당탕탕 헐레벌떡 계룡성에서 뛰쳐나갔다.
-아이 씨. 안 가고 싶은데.
-보령회 혼자 힘으로는 혈귀단의 무력대 하나도 막을 수 없다. 적귀대주, 그자를 상대하기에는 내 힘으로도 무리였다. 삼만 명의 보령성민…….
-알어. 안다고, 지수 형. 알았으니까, 이번에도 저번 같은 꼴 나면 진짜 뒈진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
-됐다, 됐어. 내가 어쩌겠냐. 후딱 갔다 올게.
그리고,
성 외곽의 숲속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최지수와 헤어져 월매에 올라탔다.
최지수가 우당탕탕 헐레벌떡 계룡성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네 방면에서 혈귀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지난 한 달.
계룡문은 철저히 습격에 대비했다.
적의 첩자를 파악하고, 그들을 통해 적당히 정보를 흘리는 것도 그 대비 중 하나였다.
지난 번 작전과 가장 다른 점은...
-우리도 싸울 거라고. 대표님, 림이 네가 뭐라고 해도 싸울 거다. 다른 애들도 같은 생각이야.
적귀대를 물리치고 며칠 후, 이일삼과 이이사가 대표실에 찾아왔었다. 허리춤에 강철검을 하나씩 찬 그들은 결연한 얼굴이었다.
-내가, 우리가 약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지난번 습격 때처럼 손가락만 쪽쪽 빨면서 계룡문 뒤에 숨어 있을 수는 없어. 림이 네가, 지수 형이 아무리 말려도 이번에는 싸울 거니까…….
최지수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자신 역시 매번 서림의 등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이 미안하고, 또 견딜 수 없이 염려되었으며, 그만큼 자신의 약함을 저주했으므로.
하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각성자를, 그것도 혈귀단과 같은 살인귀를 일반인이 상대한다는 건 무모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보육원 애들이 10년 넘게 검술을 익혔다 해도…….
최지수는 말을 꺼내기 전 언제나 그렇듯, 습관적으로 서림의 표정을 살폈다.
서림은 웃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웃음이지만, 서림은 분명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용기가, 기껍다는 듯이.
‘하지만, 림아. 그러다가 누구 하나 죽기라도 하면 또 얼마나 자책하려고…….’
어렸을 적 보육원에서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서림은 자신을 탓했다. 자신 역시 어리고 연약한 아이면서도.
제 탓이라고, 퉁퉁 부은 눈으로 밤을 새면서 수련을 하다가 쓰러진 서림을, 최지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최지수는 복잡한 마음으로 가만히 입을 닫았다.
이내 서림이 입을 열었다.
-일삼이 형. 이사 형. 일반인은 힐 잘 안 먹히는 거 알지? 팔이라도 잘렸다가는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된다고.
-우리가 그 정도 각오도 안 했겠냐.
-죽을 수도 있다고.
-계룡문이 혈귀단한테 당하면 계룡성민은 어차피 다 죽어. 그 전에, 림이 네가 없었더라면 진작 죽었을 거고. 목숨이 아까웠다면…….
서림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곧이어 그 입술 끝이 비스듬히 들렸다.
만들어낸 웃음이었다.
-목숨 걸고 싸우겠다?
-그래. 당연하지. 지금까지 계룡문이 우리를 지켜왔던 것처럼, 지금까지 네가 그랬던 것처…….
-땡. 오답. 아웃.
-…응? 야, 림아! 대표님! 왜 갑자기 또 버튼 눌렸냐고! 뭐에 눌렸냐! 지수 형, 뭐야. 그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우리 서 대표님 설득 좀 해봐.
-나? 나는 처음부터 반대인데.
-아! 형은 또 왜 지랄인… 악!
서림이 오른손을 들어, 발을 구르며 날뛰기 시작한 이일삼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쳤다.
-계룡문 애들한테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목숨 걸고 싸우지 말라는 거라고. 이 멍청한 형들아. 살려고 싸우는데 목숨을 왜 걸어? 돌았냐? 돌았냐고? 지수 형! 내가 저번에 뭐랬는지 기억하지?
‘…그걸 잊을 리가.’
최지수가 진중한 표정으로 서림에게 대답했다.
-뒈지면 뒈진다.
-…뒈지면 끝이지, 어떻게 또 뒈지… 아니, 림이 네 말이 맞아! 그럼, 뒈지면 절대 안 되지. 절대 안 뒈질 테니까,
-뒈지면 끝? 누구 맘대로 끝이냐? 내가 저승까지 쫓아가서 아작을 낼 거라고. 그런 마음으로 싸우라고. 알겠냐? 엉?
-알겠다, 림아!
-그럼요, 서 대표님!
결국 일반인으로 구성된 잠복조를 작전에 참여시키기로 결정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서림에게 직접 검술을 배운 희망보육원의 원생들과, 각성 페스티벌을 수료하였으나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
이백여 명의 자원자가 스무 팀으로 나뉘어 성벽에 가까운 마을에 잠복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은 아주 효과적이었다.
탐색술로 근처에 각성자가 없음을 확인하고 마을에 돌입한 혈귀단은, 잠복조의 기습적인 공격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실제적인 타격보다, 정신적인 타격이었다.
지금까지 무능력한 버러지, 짓밟으면 개미 새끼처럼 짓밟히던 프롤들이 휘두른 검이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혈귀단원들은 짙은 당혹감을 느꼈다.
-으하하하!!!! 마력 없다고 조밥인 줄 알았지??!!! 이 새끼들, 뒤져!!!! 뒤지라고!!!!!
계룡문의 1차 페스티벌을 1등으로 수료했으나 운이 나빠 각성하지 못했던 이태연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옆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검사를 보고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뭐가 저렇게 빨라? 어떻게 저렇게 정확해?’
물론 혈귀단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은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시간을 끄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곧 작전대로 박명칠이 이끄는 계룡문이 달려와 성 깊숙이 들어온 혈귀단을 포위했다.
암독 흡수를 막기 위해 배급된 방독면을 벗은 검사는, 젊은 청년이었다.
-아니, 대체 그 검술은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헤헤. 제 실력이 좀 끝내주죠?
-네. 정말 대단하십니다.
-림이한테 직접 배웠죠. 림이 훈련이 얼마나 빡셌는지. 10년 전에 배웠던 검세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니까요.
-림이라면… 설마……!
-그럼요. 그 검룡이요. 제가 림이 여덟 살 때부터 같이 지냈걸랑요. 이야.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림이 등쌀에 얼마나 검질을 해댔는지.
-그, 희망보육원 말씀이시군요. 혹시, 성함이?
-헤헤. 이일삼이라고 합니다.
-영광, 영광입니다.
문득 총소리와 함께, 격렬한 외침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간 이태연의 시선에 한 사내가 들어왔다.
-시바알!!!! 다 죽어!!! 다 죽어, 이 씹새끼들아아아아!!!!!
사내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엄청난 기세로 총을 쏴재끼고 있었다.
-혹시 저분도 희망보육원…?
-아뇨, 아뇨. 저 사람은 여준후라고, 음… 림이의 노예랄까요.
-예?
-이번에 공을 세우면 한 턴 쉬게 해 준다고 했다더군요. 그런 게 있어요. …아이고. 눈이 맛탱이가 갔네. 소장님! 정신 차리쇼! 후퇴했잖아! 총알 아깝게 왜 지랄이야!
곳곳에서 그런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 나머지 일반인들은 지하 통로를 통해 대전성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최지수는 전황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흑귀대. 녹기대. 적귀대. 혈왕대까지… 모두 등장했군.’
그들이 바라던 대로였다.
-어설프게 막아봤자, 또 온다고.
-저도 동의합니다. 혈귀단은 존… 아니, 아주 끈질겨요.
서림과 서림의 사제는 그렇게 입을 모았다.
빙화신녀도, 지남천도 마찬가지였다.
-큰 타격을 입히기 전까지는 계속 계룡성을 공격할 걸?
-그렇다고 일반인을 희생시킬 수도 없으니. 결국 전면전뿐이군.
양쪽의 무력은 비슷했다.
녹귀대, 흑귀대, 적귀대의 잔당, 그리고 혈왕대.
이쪽은 계룡문과 유성길드 연합.
서림이 빠진 자리는 서림의 사제 서은창과 빙화신녀가 메꾸기로 했다.
그리고 서림이 돌아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다. 아니,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싸움이야.’
“D구역, 흑귀대가 작전 지역으로 진입했습니다.”
“좋아. 실행해.”
최지수의 지시를 들은 계룡문도가 빠르게 사라져 지시를 전달했다.
곧, 성의 곳곳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렸다.
옛 시대의 폭탄.
서림이 내장산채에서 털어온 재물 중 하나였다.
백염으로 형성한 화염탄에 맞먹는 위력.
채 방어하지 못한 흑귀대원들이 폭발에 휩쓸렸다.
폭발의 잔해 뒤로 복면이 날아가고 옷이 찢어진 흑귀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죽은 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
하지만 일방적인 살육에 익숙해진 흑귀대주에게, 각성자들과의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이 정도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흑귀대주 추세훈이 지시했다.
“멈춰라! 놈들의 준비가 만만치 않다. 탐색술로 놈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간다. 탐색술사들은 지금 즉시…….”
흑귀대가 전진을 멈췄다.
기다리고 있던 순간.
콰아아아아아!!!!
잠복해 있던 계룡문의 술사들이 쏟아낸 수백 개의 화염탄이 캄캄한 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화염탄은 멈춰선 흑귀대를 향해 총알처럼 날아갔다. 그 뒤를 따라, 얼음창과 바윗덩어리가 하늘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