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63화 (63/122)

63화. 스위트 스위트 홈 (2)

뺨을 때리는 바람이 매서웠다.

머리카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어둠으로 휩싸인 발아래 멀리, 화염에 휩싸인 계룡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다가 뭐 해보기도 전에 탈진하겠네.’

나새끼의 일천한 내력.

깨달음의 경지만 따지면 진작 화경(和境)을 넘어 현경(玄境)에 도달했다.

검황이 당시 무림에 유일했던, 현경의 고수였으므로.

하지만 몸 안에 쌓인 내력은 이제 고작 화경의 초입.

그래서 줄곧 내력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나름 애써왔는데.

월매에게 탑승하는 내내 결(結)을 시전해야 하는 건 내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월매가 아무리 영물이라도, 새는 본디 가볍게 태어나는 존재.

내 본래 무게를 태우고 날아갈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내력이 소모되는 속도가 빠르다.

“월매야. 더 빨리 가자고.”

뀨우?

“대환단!!!”

끼우우!

월매가 급속하게 속력을 높였다.

이렇게 잘할 수 있는 놈이, 꼭 잔꾀를 부린다니깐. 이 귀여운 놈을 김강산처럼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순식간에 계룡성이 가까워졌다.

“아래로 내려가. 착지 지점 좀 보게.”

고도를 낮춘 월매가 계룡성 위를 돌기 시작했다.

D구역에서 지남천이 복면이 벗겨진 흑의인을 상대하고 있다. 저게 흑귀대주일 테고.

H구역에서 최지수와 박명칠, 이바름과 조은조와 하하민이 손발을 맞춰 녹색의 복면인을 상대하고 있다. 저게 녹귀대주.

K구역에서 서은창이 붉은 옷에 다시 피가 범벅된 적의인을 박살내고 있다. 저건 신참 적귀대주인 듯하고.

‘…혈왕은? 설마 안 왔나?’

내 눈이 곧 백의인을 발견했다.

기감의 그물에 느껴지는 마력이 대주들보다 확실히 한 수 위.

빙화신녀의 빙환이 기묘한 궤도를 그리며 짙은 암독을 갈랐다.

역시 빙화신녀.

밀리고는 있으나 그래도 제법 잘 버티는 중이다. 당장 당하지는 않을 터.

그런데,

‘…김강산은?’

불길한 예감이 발가락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김강산은 빙화신녀와 함께 있어야 한다.

물과 불로 이루어진, 가장 강한 팀.

그들이 맞붙은 놈을 최대한 신속하게 박살내고 다른 곳을 도우러 간다…….

는 것이 기존의 계획이었는데.

‘부상당했나? 설마 크게 다친 건…….’

그 순간.

기감의 그물에 큼직한 마력이 잡혔다. 하나가 아니다. 하나, 둘…….

“월매, 오른쪽으로!”

내 시야에 비로소 김강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세 명의 고수와 혼자 맞붙고 있는-.

상태가 좋지 않다.

‘설마 저 새끼도 마력증폭제를……!’

무력은 김강산이 최지수보다 훨씬 강하나, 정신력은 정반대다. 김강산이 자칫 증폭제 부작용에 빠지면 최지수처럼 버티기는 어려울 터.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월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결(結)의 운용을 멈추자 본래의 무게를 되찾은 내 몸이 지상으로 자유낙하하기 시작했다.

허공답보로 낙하의 속도를 조절하며 나는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희게 빛나는 강기가 월영검을 빠듯하게 채우고,

단번에 검끝에 세 개의 구슬로 맺혔다.

젖혔던 어깨를 거세게 휘두르자,

“김강산, 비켜!!!!!!”

세 개의 강기가 놈들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

“림이 혀어어어엉!!!!”

바닥을 굴러 폭발을 회피한 김강산이 벌떡 일어났다.

다행히 마력은 정상이다.

“너 증폭제는?”

“하나만 먹었지! 지금 막 하나 더 먹을라고 했는… 악!”

“뒈진다.”

“형 왔으니까 안 먹지.”

김강산이 실실 웃으며 대도를 움켜쥐고 내 옆에 나란히…….

서기는, 개뿔.

상태가 엉망이다.

왼팔 손목은 덜렁거리고, 등과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씩 뚫려 있다. 화염으로 상처를 지져 급한 출혈을 막아 놓았다.

오른쪽 허벅지는 암독에 당했는지 살점을 도려내 뼈가 보일 지경이고.

뒷덜미를 당기자 김강산이 힘없이 끌려왔다.

“남은 힐포 없지?”

“그럼요, 형님.”

“의료팀 가서 회복부터 해.”

“나도 형이랑 같이……!”

“말 안 들으면 마혈 누른다?”

진심이다.

다행히 내 진심이 통한 모양.

김강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도를 집어넣고는 정면에 선 세 놈을 가리켰다.

“이 새끼들이 형을 찾던데. 혈귀단은 아닌 거 같아.”

“알어.”

“…진짜 아는 사이였어?”

썩 좋은 관계는 아니지.

“그렇다니깐. 내가 이놈들 처리하고 은영단 도우러 갈 테니 너는 당장 치료받고 가서 빙화신녀 도와.”

고개를 끄덕인 김강산이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그 등에서 느릿느릿 시선을 떼어내 삼각형 모양으로 선 세 놈을 응시했다.

환도.

단창.

그리고 그 두 놈의 앞에 선 철퇴놈이 지껄였다.

“네가 껌뇽이니?”

“알면서 뭘 물어. 한 번 박살난 새끼들이 꼬리 말고 튀어도 모자랄 판에.”

내 계룡의 위기를 틈타 쳐들어 왔다, 이거지.

환도놈이 비장하게 외쳤다.

“내가 방시만 싸이 비껍하게 공겨켔음서!”

“지금 니들이 하는 짓거리가 훨씬 비겁하다, 새끼들아.”

사혼삼살(死魂三殺).

복면도 쓰지 않았다.

이제 아주 막 나가네, 막 나가.

-사혼삼살이 사혼이괴에게 부상을 입힌 복면인을 계속 찾고 있습니다. 저희 서울지부에서 지금까지는 잘 숨겼지만, 그 복면인이 검룡님이라는 걸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은밀히 계룡을 방문했던 김영호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파천궁은 진한제국이랑 휴전 파토나서 전쟁 준비로 바쁘다면서요. 여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대?

-그게 거기도 상황이 복잡하더라고요. 검룡님께 암시 걸었던 거, 저도 파천궁에 보고하고 알았는데, 그게 궁주님 지시가 아니라 흑암단주 단독 행동이었습니다. 궁에서는 검룡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잘 됐네. 그럼 파천궁은 당분간 신경 꺼도 되는 거죠?

-그게… 군사님을 통해 내려온 지시는 그렇기는 한데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사혼삼살한테 복귀 명령이 안 내려와서 문젭니다. 빨리 돌아가야 속이 편할 텐데요.

빨리 돌아가는 게 속이 편하다고?

아니, 아니지.

박살내는 편이 훨씬 속 편하다.

-지금 사혼삼살 그놈들 끈 떨어진 연 신세라는 거예요?

-뭐, 그렇지요. 그동안 괴물의 짓이라 여겨지던 몇 건의 마을 몰살 사건이 흑암단의 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거든요. 파천궁이 발칵 뒤집혔습죠. 감찰단 뜨고 막…….

-그러면 그놈들 박살내도 파천궁이 쫓아올 일은 없다는 거?

-거 참, 박살 좋아하셔. 쫓아오기는요. 은근히 기뻐할 걸요. 헌데, 그자들이 악인이라 그렇지, 진짜 강한데. 파천궁에서도 손에 꼽히는데…….

강하기는 했다.

그때는 남지호의 상황이 급해 방심한 틈을 타 일격필살로 공격하고 튀었지만, 오래 붙들렸다면 나도 꽤나 피곤했을 터.

딱 그 정도다.

아마 놈들도 랭킹전에서 내가 보여준 무위를 들었겠지. 그리고 이길 자신이 있으니 이렇게 몸소 계룡까지 방문했겠지.

물론 랭킹전에서 자신의 모든 수를 보여주는 사람은 없다.

한 수는 숨겨두기 마련.

하지만.

‘…내가 한 수만 숨겼겠냐고.’

빙화신녀와의 비무에서 드러낸 내 무위는 7할도 되지 않는다. 참마도와의 비무에서는 그조차도 필요하지 않…….

“근데 껌뇽. 그 어둠술사는 와이 도와써? 너한테 인형술을 거렀는데?”

철퇴놈이 급작스럽게 물음표를 던졌다.

“말하면 니들이 알아듣기나 하겠냐.”

“진짜루 궁금해셔 그뤠.”

“말 안했다고 모르는데, 듣는다고 알겠냐.”

그래, 남지호.

남지호는 염화검제의 흑염에 불타 죽었다.

하지만 놈들의 암독에게 중독되지 않았었다면.

나는 원래 남지호의 마혈을 눌러 불꽃성의 숙소로 납치해 올 생각이었다.

그랬었다면, 남지호는 랭킹전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숙소의 침대 아래에 갇혀 있었겠지.

그 뒤로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살아는 있었을 거다.

언젠가 남지호에게 내가 한지혁이라는 사실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르지.

그와 함께했던 옛 시대를 이야기하며, 일호꼬치에서 맥주를 마시며, 한지혁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눈을 붉혔을지도 모르지.

나는 남지호의 어깨를 토닥이며 고생했다고 말하고, 남지호는 내 손을 움켜쥐며 미안하다고 말했을…….

하하.

‘…그럴 리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

그렇다고 놈들의 짓을 넘어갈 생각도 없다.

나는 꼬리를 무는 생각의 꼬리를 잘라내며 놈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넓게 펼쳐놓은 기감의 그물에 이제 김강산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충분히 멀어진 것.

하루에 두 번이나 인질극을 목격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삼각형의 선두에 선 수염놈의 어깨에 피 묻은 철퇴가 걸쳐져 있다.

내 김강산의, 피.

환도놈의 도날도, 단창놈의 창날도 김강산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지혁으로서든, 서림으로서든, 어쨌든 피 값은 비싸게 받아야겠군.’

여전히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선 철퇴놈에게 환도놈이 중국어로 소리를 쳤다.

-형님, 또 호기심이 도졌습니까? 시체한데 물어보자고요!

-시독술은 생각을 읽는 주술이 아니라고.

웃기는 새끼들이다. 지들끼리 아주 김칫국을 거하게 들이키고 있다.

…중국 놈들, 매워서 김칫국을 마실 수나 있으려나.

-씨발! 그거 알아서 뭐합니까?

-궁금하잖아. 죽이면 물어보지도 못한…….

카강!

철퇴놈이 철퇴를 들어 월영검을 가로막았다.

내 공격을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방어.

격돌의 충격에 어깨가 젖혀지고,

훤히 드러난 옆구리를 노리며 단창이 뻗어 나왔다.

거센 파공성과 함께 환도가 목줄기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내가 공격하기를 기다린 듯한 완벽한 합공이다.

하지만.

비등한 경지에서나 작전이 의미가 있는 법.

‘…잘못 생각했어, 니들.’

나는 있는 힘껏 기운을 끌어 올렸다.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오른 진기가 월영검의 검날을 희게 빛내고, 검끝으로 뻗어 나갔다.

스파앗.

1미터 남짓 뻗어 나간 날카로운 검기가 달려들던 단창놈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김강산이 입은 상처와 같은 위치.

검을 비틀어 뽑아내…….

‘검이 안 뽑혀?’

눈앞에 다가온 철퇴놈이 음침하게 웃으며 내 백회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제 마력을 모두 거기다가 쏟아 부었는지, 단창놈의 옆구리에 꽂힌 월영검은 거대한 힘에 붙들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들도 내가 검을 놓으리라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나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태극권(太極拳) 특유의 온유한 기운이 환도의 날카로운 날을 감싸 안았다.

권격을 통과하느라 힘을 잃은 환도를 손등으로 튕겨내고,

뒤이어 철퇴를 같은 수법으로 파훼했다.

순간적으로 떨어져 나간 환도놈과 철퇴놈이 다시 나를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정수리와 무릎.

한 손으로 두 공격을 막을 수는 없다.

나는 방어 대신, 진기의 운용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스스로 운기도 못 하는 각성자 주제에 내력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무림인에게 내력 대결을 청하다니.

주제도 모르는 애송이다.

그리고 그런 애송이에게는…….

월영검을 감싼 검기가 순간적으로 응축했다.

그리고 폭발했다.

적(積). 적(積). 적(積). 적(積). 그리고 또, 적(積).

뱃속에서 일어난 강기의 연쇄적인 폭발에,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老二!”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철퇴놈의 입.

사이좋은 형제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슬프겠지.

“금방 만나게 해줄게.”

단창놈의 가죽과 피와 부스러진 뼛조각이 찢어진 종잇조각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깊숙이 왼발을 내딛으며 상체를  철퇴와 환도가 동시에 허공을 갈랐다.

바로 눈앞에, 철퇴놈의 무릎이 보였다.

무상각(無上脚)을 시전하자 놈이 오른쪽으로 풀썩 뛰어 공격을 회피했다.

그곳에서 놈을 기다리던 것은, 붙들고 있던 마력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월영검.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목줄기를 찔러 들어갔다.

카강!

재빨리 따라붙은 환도가 월영검을 가로막았다.

-이, 이괴의 원수!

똥을 싸라, 아주.

환도놈의 도날이 짙은 암독에 휩싸였다.

동시에, 철퇴놈이 암독탄을 쏘아냈다.

타앙!

월영검에 부딪힌 암독탄이 저 멀리 날아가 암독을 흩뿌리며 폭발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쳐들어오면서 말이야.”

반원을 그리며 휘어진 월영검이 철퇴놈의 목을 지났다.

“지들 죽을 생각은 안 했나 봐?”

피 묻은 월영검의 검날이 눈을 부릅뜬 환도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두 구의 시체와 시체도 남지 않은 한 놈을 뒤로 하고,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