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스위트 스위트 홈 (3)
‘이 늙은 할망구를 여기에서 마주칠 줄은 미처 몰랐군.’
혈왕(血王) 권노아가 대검을 들어올려 거세게 휘둘렀다.
쩌어엉!
대검에 서린 마력이 빙공(氷空)으로 얼어붙은 공간을 갈랐다. 대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검은 암독이 흘러나왔다.
주변은 이미 지독한 암독에 덮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빙화신녀 역시 온전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등했던 전투으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는 혈왕 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이따금 들이쉬는 호흡을 따라 조금씩 스며드는 암독을 모두 막기는 불가능했으므로.
빙화신녀는 극한의 얼음으로 피부를 감싸 최대한 암독의 침투를 막았지만 그 얼음을 유지할 마력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
약해진 얼음 사이로 혈왕의 짙은 암독이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콰아아!!!
혈왕이 몸을 날려 얼음창을 회피했다.
바닥을 헤집으며 박살난 얼음창은 조각조각 부서지는 듯 보였다가 그대로 수십 개의 날카로운 빙검(氷劍)이 되어 솟아올랐다.
빙검 하나가 혈왕의 얼굴을 가린 흰 복면을 찢었다.
“와. 면상 보니까 존나 반갑네! ***이 **가 **해서 **에 **할 **새끼야!”
빙화신녀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얼음송곳을 생성했다.
혈왕의 무릎 바로 앞에서 형성된 얼음송곳들은 피할 겨를도 없이 무릎에 격중했다.
“마력도 다 떨어진 할망구가 입만 살았네.”
“이 얼굴을 보고 할망구라면 누가 믿냐, 이 씹쌔야. 내가 입 다물면 그게 바로 장례식 날이야, 이 씹쌔야. 내가 오래 살 길 잘했다. 니 면상을 다시 보게 되고, 이 씹쌔야.”
파스슥.
빙화신녀에게 순간적으로 마력이 모여들었다.
빙혈(氷血)의 전조.
혈왕이 쇄도하며 대검을 내질렀다.
대검은 빙벽에 가로막혔으나 원하는 목적은 달성했다.
“존나 겁은 많아가지고, 이 씹쌔가.”
투덜거리며 빙화신녀가 빙환을 내던졌다.
그 시선이 잠시 자신의 등 뒤를 향하는 것을 혈왕은 놓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누구? …설마 검룡이?’
랭킹전 우승자, 그리고 적귀대주를 죽인 자다.
하지만 계룡문의 약점은 바로 그, 검룡.
검룡이 없는 계룡문은 그저 적당히 강한 중소성의 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계룡문은 그 역량에 비해 지나친 명성을 얻었다.
검룡이라는 개인의 무위에 기대어.
혈왕은 두 번의 실패를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계룡보다 먼저, 보령을 공격했다.
검룡이 혹여 보령을 구원하러 가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좋았다. 이번 공격의 목적은 계룡문의 몰살도, 검룡의 죽음도 아니었다.
그들의 명성을, 그들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그들에게 걸린 희망을 무너뜨리는 것.
그래서 영원한 절망과 공포를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제대로 새겨 넣는 것.
계룡검룡.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그저 철없이 영웅 놀이에 푹 빠진 어린애라 여겼다.
혈왕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몬스터 웨이브의 괴물들을 몰살시키고 계룡성을 확장했을 때부터.
사람들이 계룡문을, 계룡검룡을 이야기하며 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마다 혈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던 두 구의 시체를 떠올렸다.
‘희망? 파라다이스? 뻔뻔한 종족들.’
적귀대의 전재원이 적귀대주 이경하의 죽음을 전했을 때, 혈왕은 결단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검룡이, 단 일검으로… 대주님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물했다 합니다.
권노아는 꺼끌거리는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가 피맺힌 입술을 잡아 뜯었다.
새로 생긴 상처 사이에서 새 피가 흘렀다.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온 새빨간 혀가 붉은 피를 핥았다.
비릿한 쇠 맛이 났다.
그의 두 딸이 죽은 후로 23년이 흘렀다.
그날은 전 지구를 휩쓸었던 세계 3차 대전이 끝난 지 정확히 1년째가 되던 날이었다.
-아빠. 학교 안 가면 안 돼?
-어허!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도 절대 안 되니까 당장 옷 챙겨입고 나와. 아빠가 아침 준비해 놨다.
-아빠… 나 감기 걸린 거 같애.
-감기는 어제 진작 써먹으셨어요, 공주님들.
1차 블랙데이가 터졌을 때, 권노아는 미국의 대학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그는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미국인 와이프와 결혼을 하면서 미국에 정착했다.
그가 사랑하는 아내는, 1차 블랙데이가 터진 날 죽었다.
옆집 여자가 슬라임을 향해 쏜 총알이 아내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는 그날 아내를 구하려다 각성했으나, 아내를 구하지는 못했다.
권노아는 슬픔을 가슴에 묻고 어렵게 비행기 표를 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마다 혐오 범죄가 들끓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동양인 이민자로서 그가 미국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아내를 잃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지켜야 할 존재가 남아 있었다. 그의 두 딸은 고작 4살과 5살이었다.
그는 아이비리그의 명문 대학에 출강하던 경력으로 어렵지 않게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권노아의 어린 두 딸은 1차 블랙데이와 전쟁, 그리고 그와 이어진 2차 블랙데이라는 세 차례 고비에서 모두 살아남았다.
세상은 뒤집어졌지만, 서울성 안은 평화로웠다.
두 아이는 별문제 없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딸들의 입에서 학교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가기 싫은데… 학교 너무 재미없어요, 아빠.
-공주님. 학교는 재미있으라고 가는 데가 아닙니다. 아빠는 박사까지 했지만 공부는 여전히 재미가 없어요. 하하.
둘째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첫째가 둘째의 손을 꽉 잡으며 동생을 달랬다.
그의 두 딸이 학교에서 ‘잡종’이라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권노아는 까맣게 몰랐다.
입에서 입으로 은밀하게 퍼지던 소문, 악랄한 테러 조직 KKK단이 자신의 가족과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혜야. 지수야.
그가 저녁 강의를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집은 싸늘했다.
벽난로의 불은 꺼져 있었다.
전날 저녁에 두 딸이 가지고 놀던 젠가 조각이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지혜야? 지수야!
그는 허겁지겁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운동장의 구석진 곳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옷이 찢어지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두 딸의 몸은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딸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한참을 오열하다가 대한길드의 지구대로 달려갔다.
-쯧, 쯧… 요즘 이런 범죄가 많아요. KKK단이라고 몰려서 외국인이 살해당한 게 한두 건이 아닙니다.
-외국인이라뇨! 내 딸들은 엄연한 한국인입니다! 각성자도 아니라고요!
-글쎄, 보기에는 외국인으로 보이던데요. 사실 누가 진짜 KKK단인지 어떻게 구분하겠습니까. 놈들이 이마에 KKK단이라고 붙여놓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조사해 보니 따님 분들이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좋다고, 한국은 살 데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던데요.
-우리 애들은 14살, 15살입니다! 이런 어린 애들이 강에 독을 타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악독한 짓을 했다고요?!
-어허. 선생님의 딸들이 그랬다는 얘기가 아니죠.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없지는 않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됐습니다. 가해자들이 누굽니까?
열다섯 명의 가해자 중 하나가 염화검제의 68번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 것은, 두 딸의 죽음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권노아는 서울성 밖으로 나가서 미친 듯이 괴물을 잡았다.
각성은 했으나 미약했던 그의 마력은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면서 순식간에 불어났다.
그리고 서울성으로 돌아와 그날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을 죽였다.
딸에게 손을 댄 사람은 물론이고, 그 광경을 방관한 이들도 모두.
그러나 그의 분노는 전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타올랐다.
그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이기 시작했다.
서울성의 곳곳에 암독무를 퍼뜨리고, 강물에 암독을 탔다.
KKK단이 자행했다고 알려진 짓들.
그의 딸들은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악행을 벌이며 그는 옅은 쾌감과 짙은 절망에 사로잡혔다.
정체가 발각되어 대한길드의 추적을 피해 안산성으로 들어간 뒤, 그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한 천신교의 사제에게 진실을 들었다.
-고해성사에서 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배교 행위입니다만… 사실을 알고서도 입을 다무는 행위야말로 더욱 천신의 뜻에 어긋난다 생각되더군요.
‘KKK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대한길드의 정보국 요원들이, 외국인으로 구성된 일반인 혐오 조직 KKK단이 혈겁을 벌이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다는, 그런 진실.
그는 검으로 자신의 가슴 가죽을 긁어 대한길드라는 네 글자와 이정용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넣었다.
‘하지만 원수는 그뿐만이 아니야.’
두 딸을 죽인 것은 대한길드의 정보국 요원이 아니었다. 염화검제 본인도 아니었다.
머리색이 옅고 눈동자의 색이 푸르다는 이유로 딸들을 괴롭히고, 기다렸다는 듯, 아니, 정말로 기다렸을 헛소문이 돌자마자 그 소문에 기대어 그의 두 딸을 죽인 것은…….
‘더럽고 비겁한 프롤.’
그 모두가, 모든 인간이, 권노아에게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였다.
‘그럼, 그 모두가 원수이고말고. 불구대천의 원수…….’
안산성의 대패 후 권노아는 혈귀단을 창설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둠 속으로 숨어든 사이 길드 연합은 더욱 굳건해졌다.
하지만 권노아는, 분명 빈틈이 생기리라 확신했다.
날카롭게 검을 갈고, 창날을 다듬으며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그는 오래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는 모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반드시 기회는 온다.
5차 블랙데이.
그때가 아니라면, 6차 블랙데이. 7차 블랙데이. 8차, 9차, 10차……!
하지만.
‘행복하다고? 희망을 갖는다고? 인간이 그런 걸 찾고자 한다고? 인간이? 내 아내와 딸들을 죽인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 모습을 눈을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대한길드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나 계룡문은 달랐다.
-혈왕님, 어찌할까요. 북(北)으로 돌아가서 다시 힘을 비축한 후에…….
혈왕 권노아가 감았던 눈을 떴다.
잠시 고요했던 시야가 밝아졌으나 여전히 눈앞은 핏빛이었다.
-모두 성전을 준비하라.
-모두라 하시면…….
-그렇다. 나 역시 함께할 것이다.
성전(聖戰)은 시작되었다.
보령으로 떠난 검룡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계룡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혈왕은 자신의 목적이 최선의 형태로 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검룡은 보령을 포기했고,
곧 계룡을 지키는 데에도 실패할 것이므로.
계룡의 전력은 혈왕의 예상보다 훨씬 탄탄했다.
불패도 지남천의 합류까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빙화신녀까지 합류했을 줄은 혈왕도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 욕설을 퍼부으며 계룡을 떴다 들었는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 여고수까지.
하지만 혈왕에게도 숨겨둔 수가 있었다.
‘사혼삼살을 섭외하지 않았으면 일을 그르칠 뻔했군.’
랭킹전에서 검룡이 흑귀대의 남지호를 구하려 들었다는,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를 파헤쳐 들어가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파천궁의 사냥개, 사혼삼살에게 그 사실을 흘리자 그들은 덥석 공격에 합류했다.
이 정도 전력이면 검룡이 보령을 구원하러 가든 가지 않든 계룡문에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 계산했다.
합리적인 계산이었다.
“검룡을 기다리나? 그는 오지 못할 거야.”
대검을 휘둘러 빙환을 쳐낸 혈왕이 차갑게 말했다.
계룡검룡 특유의 희게 빛나는 빛이 어둔 밤을 밝히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사혼삼살이 있는 곳이었다.
혈왕 자신조차도 그들을 쉽사리 제압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는 수준.
‘…그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아무리 검룡이 천재라도, 고작 스무 살 남짓의 애송이다.
그동안 쌓은 마력의 한계는 분명할 터.
그 순간.
번개처럼 흰빛이 밤을 가르며 번쩍였다.
아까와 다른 곳이다.
녹귀대주가 있는 방향.
‘…사혼삼살이, 검룡에게 당했다고?’
터억!
되돌아온 빙환을 잡아챈 빙화신녀가 빙글빙글 웃었다.
“너, 용용이랑 싸워본 적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