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66화 (66/122)

66화.  ■■■ ■■ ■ 자 (1)

강하다.

강하고, 빠르고, 단단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야.’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와 싸워 본 경험이 없는 몸놀림이다.

어마어마한 힘이 그 빈틈을 모두 메꾸고도 남을 뿐.

혈귀단은 언제나 빈틈을 노렸다.

성의 방어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암살을 행하고, 혈겁을 벌였다.

놈도 역시 그렇게 이길 수 있는 대상만, 죽일 수 있는 상대만 골라 싸웠을 터.

하지만 지키기 위해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와도 싸워야 하고, 결국 승리해야만 한다.

저놈이,

‘…지키는 검의 무게를 알 리 없지.’

스팟!

월영검이 놈의 어깨를 스쳤다.

검끝을 타고 오른 검기가 아까의 상처를 파고들었다.

단지 그뿐.

마력으로 강화된 어깨를 잘라내기에는 턱도 없었다.

놈이 풀썩 뛰어 거리를 벌렸다.

“검룡, 검룡, 떠들어 대더니 고작 이 정도냐.”

“오늘 좀 바빴거든.”

네놈 덕분에 말야.

“인간 따위를 지킨다고 고생이 많군. 인간이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

팟!

월영검의 검날이 다시 한 번 놈의 어깨를 스쳤다.

세 번째로, 완전히 같은 위치.

“야. 너도 인간이거든?”

상체를 깊숙이 숙여 허리를 노린 대검을 회피하고,

숙였던 허리를 단번에 젖히며 수직으로 올려쳤다.

월영검의 검날이 네 번째로 놈의 어깨를 스쳤다.

깊어진 상처에서 피가 튀었다. 그리고.

팟. 파앗. 파밧. 파바바바밧.

‘한 번으로 안 되면, 여러 번 베면 장땡이라고.’

“으악악!”

놈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풀썩 뛰어 거리를 벌렸다.

왼팔의 어깻죽지가 벌어져 뼈가 드러나 보인다.

거추장스럽게 저걸 어떻게 달고 다녀.

세 번만 더 참았으면 내가 깔끔하게 절단해 줬을 텐데.

놈의 검이 순식간에 짙은 암독에 휩싸였다.

공격을 퍼붓고 도망칠 생각이겠지만.

‘그건 네놈 희망이고.’

나는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고 바닥을 거세게 걷어찼다.

대검이 허공을 비스듬히 갈랐다.

검날보다 먼저, 암독이 공기를 잠식했다.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오는 농도 짙은 암독을 산매진화로 태워 없애며 놈의 무릎을 향해 월영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놈의 왼손에 단창이 생성되었다.

새까만 흑색의, 암독창(暗毒槍).

암독창이 내 등줄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동시에, 암독무를 휘감은 대검이 내 정수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실로 온 힘을 다한 한 수……!

처럼 보이지만,

놈의 핏발 선 눈깔이 희번뜩하게 돌고 있다.

몸을 빼낼 틈을 찾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 암독창이 향할 곳은 내가 아니다.

저만치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은영단.

김강산이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내리쳤다. 최지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곧 달려들려는 은영단 애들을 가로막듯 빙화신녀가 서 있었다.

그 반대편으로, 반대편에 엉거주춤 선 서은창이 보였다.

그 옆에 지남천과 정일형도.

‘정신 똑띠 차리라고. 니들도 곧 할 일이 생길 테니까.’

저기 있는 녀석들이 다른 애들이었다면 내가 나서서 암독창을 막았겠지만, 저 녀석들은 염려할 필요 없다. 이제 녀석들은 혈왕놈의 암독창 정도는 막아낼 수 있다.

카캉!

월영검이 대검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콰아아!!!!

거센 파공성과 함께, 암독창이 허공을 가르며 은영단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곧 빙벽과 강철벽과 화염벽에 가로막혀 폭발했다.

짙은 암독 사이로 놈이 쇄도…….

스팟!

하려다가 멈춰 섰다.

내가, 그 앞을 가로막고 월영검을 휘둘렀으므로.

진기로 희게 빛나는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덜렁거리는 어깨를 완전히 잘라냈다.

어깨뼈까지 매끄럽게 잘려나간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단단하고 질긴 가죽이 사라진, 부드럽고 약한 내면.

연이어 내지른 월영검이 그 상처를 헤집었다.

손목을 비틀며 단번에 검을 뽑아내자,

“아프냐?”

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대검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대검의 위력은 여전했으나, 날카로운 검날은 나에게 하나도 닿지 않았다.

이빨로 깨문 놈의 입술에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핏기가 어린 입술로 비릿하게 웃으며 놈이 뇌까렸다.

“인간 따위. 더러운 인간 따위를 대체 왜……!”

너도 인간이라고. 이 새꺄.

혈귀단(血歸團).

피의 값을 돌려받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그 자신이 치러야 하는 피의 값은 생각하지 않은 멍청하고 또 멍청한 놈들.

이제 네가 흘리게 만들었던 피의 대가를 치를 차례다.

그 스스로의 목숨으로.

콰아아!

짙은 암독을 흩뿌리며 대검이 내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깨를 비틀어 대검을 회피하고, 월영검을 비스듬히 들어올려 대검을 쳐내고, 허리를 젖혀 대검을 회피하며,

놈의 잘려나간 단면을 향해 월영검을 내질렀다.

월영검이 마지막으로, 놈의 상처를 꿰뚫려는 순간.

‘뭐야, 이거?’

파직.

파지직.

피가 흐르던 단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것이 검격을 가로막았다.

아니, 흡수했다.

아니, 소멸시켰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

불길하고, 거대하고, 손등에 쭈뼛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때와 같다.

백호의 목을 박살낸 후, 그 몸뚱아리에 현현(顯現)한,

‘…근데 이거, 인간한테도 가능한 거였냐고.’

공간이 찢겨나갈 듯한 무시무시한 마력이 공기를 짓누르고, 주변을 잠식했다.

김강산이, 최지수가 나를 불러대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그들 역시 이 마력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터.

‘제발 거기 있으라고. 가까이 오지 말고.’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재차 월영검을 내질렀다.

새하얗게 빛나는 검기가 놈의 목줄기를 찔렀으나,

파스스-.

놈의 몸뚱아리에 닿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갔다.

그 사이,

놈의 몸은 번쩍이는 스파크에 뒤덮여 있었다.

나는 한 발 물러서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 줄기 진기가 임맥을 타고 오르고, 독맥을 타고 내려온 진기가 단전으로 흘러들었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기운을 더해야 한다.

곧 혈왕놈에게 현현할 존재는,

신(神)에 가까운…….

…젠장.

격 높다고 다 신이면, 나도 내력 높아지면 신으로 진화하는 거냐고!

지난번에도 재앙놈에게 들러붙었고, 이번에 혈왕놈에게 들러붙는 꼴을 보니 혼자서는 생존도 못하고 어딘가에 기생해야 하는 모양인데,

그런 의존적인 존재를 신이라고 불러줄 생각은 없다. 전혀 없다.

기생충(寄生蟲).

이 정도가 놈들에게 적절한 이름이다.

하지만.

‘…마력이 대단하긴 하네.’

어마어마한 격의 기생충이 혈왕놈의 몸에 현현하고 있다.

피뢰침 위에 떨어지는 번개처럼, 놈의 몸이 순간적으로 번쩍였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발에 힘을 주고 물러서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리고 곧.

[계룡검룡 서림이여.]

목소리 하나가 머릿속을 울렸다.

여자의 것도 남자의 것도 아닌, 소리 그 자체의 소리.

놈들과의 두 번째 조우.

첫 번째에는 상황 파악에 급급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또 올 줄 알았다. 이 기생충아.’

…비록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만.

백호에게 현현한 놈도 딱 저렇게 나를 불렀다.

‘계룡검룡 서림’이라고.

놈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를, 내 세계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

단순한 호기심.

혹은 가벼운 유희.

혹은 다른 어떤 목적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나도 좀 알아야겠거든.’

이대로라면 승산이 없다. 놈들은 나를 훤히 알고 있는데 나는 놈들이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르고 있으므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 그저 우연인지, 이 세계를 왜 그리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지, 다섯 번째 문이 열리면 대체 세상이 어떤 꼴이 되는 건지, 네놈들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지.

[생각이 많군. 검룡이라 불리는 자여.]

나는 가볍게 어깨를 추켰다.

“그쪽 분들은 꼭 본인 확인부터 한다 싶어서요.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확인하고 지ㄹ… 지나가셔도 되는데 말이죠. 하하. 하하하.”

[후. 후. 후.]

“기분 좋은가 봐요? 난 별론데. 왜 등장 타이밍이 꼭 이리 극적이래. 그런 컨셉인가? 메인 보스 다 잡은 줄 알았는데 2페이즈로 넘어가는 그런 거? 그거 유행 지난 지 한참 됐는데.”

놈이 우중충한 소리로 웃었다. 기묘하도록 친근하게 들리는 웃음소리.

당장이라도 대검을 휘두르려던 혈왕놈의 기세와 달리, 기생충놈은 바로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맛있는 건 아껴먹는 타입? 아니면……?’

백호놈의 목을 땄을 때, 그 기생충도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었었다.

-네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잊었구나.

마치, 나를 도와주려는 존재처럼.

그럴 리가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다.

질문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대체 기ㅅ… 기세 좋으신 그쪽 분들은 뭐하는 존재랍니까? 신, 뭐, 그런 거예요?”

대답해주면 더 좋고.

아니어도 좋다.

고요히 흐르는 진기가 독맥을 타고 내려와 명문을 통과하고 있다.

단전을 휘돈 기운이 다시 기해를 통해 임맥으로 흘러나가고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조금의 내력이라도 더 회복할 수 있다면……!

그 괭이도마뱀에게 기생하던 놈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때만큼 막막하지는 않다.

반 년 사이에 나는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

더불어,

지난번 놈과 이번 놈의 격(格)에도 차이가 있다.

그날 느낀 기운이 블랙홀이라면.

지금은, 태풍 정도일까.

아주 크고, 아주 격렬한 태풍.

지상의 모든 나무를 뽑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소용돌이.

과연 지금의 내가, 놈을 박살낼 수 있을지는…….

‘…해야지. 박살내고, 나는 살아남아야지.’

해내고 말 거다.

선천진기를 끌어내지 않고, 가진 내력만으로.

수명을 소모해가며 싸우기에는 슬퍼할 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이번 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번 생에, 지키고 싶은 이가 너무 많…….

[신이라. 후. 후. 후. 아주 재미있어. ■■ ■가 이리 말하는 걸 듣다니. 역시 ■ 말대로 ■을 ■■해가며 이 ■■■■ ■과 ■■하기를 잘했어. 아주 잘했어. 후. 후. 후.]

…뭐래는 거야. 이 기생충 새끼가.

협조적인 척 하더니. 죄다 삐 처리냐.

“기왕 비밀을 속삭여 주려면 더 친절해야죠.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립니까? 19금이에요? 죄다 모자이크 처리하게?”

[이해하려면 아직 멀었구나. 계룡검룡이라 불리는 이여.]

“그 이해 말입니다. 좀 도와주면 안 될까요? 제가 아직 어려서 이 좆… 좋은 세상을 이해하기가 좀 힘드네요. 그쪽이 균열 만들었어요?”

[어리다니. 뻔뻔하네, 자기.]

어이쿠야. 하마터면 기혈이 뒤틀릴 뻔했네.

간드러진 콧소리.

심지어 혈왕놈이 팔을 기묘하게 꼬며 허공 뽀뽀를 날렸다.

…기생충 놈들도 역시 제정신은 아니고만.

“보니깐 얘를 숙주로 기생하시는 거 같은데. 내가 마음에 들면 옮겨 타는 게 어때요? 얼굴 끝내주겠다, 무력 끝내주겠다, 평판도 좋고. 거기 계셔도 지금 숙주는 곧 사망할 텐데.”

[너는 ■■■ ■■ ■ 자. 고로 ■■의 ■■이 없다.]

“와. 쪼잔하시네. 못 하면 못 한다고 하지 그걸 또 이렇게 가린다고? 이거 너무 많이 쓰면 독자들이 빡친다고요.”

[이해하는 만큼 들리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지금 은근히 나 디스하네?”

[■■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을 냈군. ■■여, 부디 잊지 말기를 바…….]

됐다.

한 번 기공은 시전할 수 있을 내력이 쌓였다.

기회는 단 한 번.

알아듣지도 못할 개소리는 됐고.

‘선빵필승이다, 이놈아.’

탓.

내 발이 가볍게 바닥을 걷어찼다.

기생충이, 아니, 혈왕놈이, 아니, 기생왕놈이 상큼하게 웃으며 대검을 들어올렸다.

[내가 ■■에 ■■하지 않으면 ■■■가 ■■되거든. 이미 많이 받아서.]

촤라라라라.

기생왕놈이 허공에 가볍게 검을 내리그었다.

검이 지나간 길을 따라 암독무가 흘러나왔다.

마치 검은 커텐을 친 듯한 짙은 암독무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공간을 잠식했다.

아니, 암독이 아니다.

암독의 형체를 취했을 뿐인, 단순한 힘. 마력 그 자체.

그것이 주변을 뒤덮고, 내 몸을 얽어맸다.

그리고.

내 몸이 정지했다. 마혈을 잡힌 것처럼, 정신계 공격을 당한 것처럼.

놈의 복부에 찔러 넣으려던 월영검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왼발을 거세게 내디딘 채로.

하지만 마혈을 잡힌 것은 아니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그저, 순수한 힘.

세포 하나하나가 찢어질 듯한 거센 압력이 사방에서 내 몸을 짓누르고 뭉갰다.

그 힘에 맞서서,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단전을 휘돌던 진기가 기맥을 타고 오르고,

피부 위에 단단한 막을 형성했다.

그러나.

파득.

파드득.

짓이기는 힘을 버티지 못한 호신강기가 얇은 철판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격이 다르다. 어쩌면…….

‘이것이, 초월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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