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 ■■ ■ 자 (2)
보통의 강기로는 버틸 수 없다.
뚫어낼 수도 없다.
아무리 밀도를 높여도, 크기를 키워도 넘어설 수 없는 벽.
그것이 경지.
하지만, 내 몸은 이미 한 번 그 경지를 견뎠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백호의 격은 눈앞의 기생왕놈보다 끔찍하도록 높았다.
비록 그 괭이도마뱀을 어떻게 잡았는지 기억나지는 않으나.
-한 번 간 길인데, 두 번째는 더 쉽겠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헤집으려 굳이 애쓸 필요는 없다.
그저 눈앞의 길을 걸으면 될 뿐.
괭이도마뱀 때와 달리 내 정신은 아주 멀쩡하다.
무의식 따위가 아닌, 나 서림의 이성과 판단, 그리고 의지.
맑은 진기가 단번에 기맥을 타고 올랐다.
내지르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버린 월영검의 검날이, 검기로 희게 빛났다.
“…소용없는 짓이다. 이게 너와 나의 격의 차이.”
나이도 지긋해 보이시는데. 중2병이셨나.
놈의 붉은 입술에서 피처럼 찐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머릿속이 아니라 귀를 통해 들려왔다.
혈왕놈이다. 기생충이 아니다.
기생충의 힘을 빌렸으나, 놈의 껍질은 결국 인간의 그것.
상급 괴물도, 재앙도 아니다.
그렇다면 더욱…….
‘할 수 있다고.’
으득.
나는 이를 악물며 단전의 모든 기운을 끌어올렸다.
검날을 채운 검기가 눈부시게 빛을 발했다.
수만 개의 폭죽이 터지는 듯한 섬광과 함께, 검기가 거세게 폭발했다.
그러나,
실처럼 가느다란 빛줄기들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나를 으깰 듯 내리누르는 거센 마력에 가로막힌 듯…….
“고작 그 정도로, ‘사신의 낫’을 벗어날 성 싶으냐.”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땡큐지.
하지만 보아하니, 네놈도 ‘그 힘’을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것 같네.
대검을 쥔 놈의 양 팔뚝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거칠게 경련하고 있다. 이마와 턱, 목에 성성하게 선 핏줄이 벌떡거리고, 흰자가 시뻘겋게 물들었다.
자신의 경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영단을 욕심껏 처먹었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자들의 모습이 딱 저러했지. 괴물화되기 직전까지 갔던 최지수도…….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기생충놈의 격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그릇이다.
그 작은 그릇은 대검으로 기운을 쏟아내는 데에 집중할 뿐, 다른 공격을 시도하지 못했다.
물론, 보통 상대였다면 그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짓누르는 것으로도 충분하겠으나…….
‘내가 보통이 아니거든.’
진기는 소멸하지 않았다.
내 의지에 따라 흩어졌을 뿐.
먼지처럼 잘려나간 작은 진기(眞氣)의 조각들이 외기(外氣) 속으로 스며들었다.
삼반공의 3절, 결(結).
작은 진기의 덩어리에 외기가 엉켰다.
서늘한 밤바람.
옅은 꽃내음.
짓밟혀 으깨진 민들레 이파리.
땅을 파고든 뿌리.
뿌리가 파고든 땅.
모래 아래 스며든 물방울.
허공으로 증발한 물방울의 기체.
거대한 마력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외기가 나의 내기와 하나가 되어 뒤엉켰다. 뒤엉키다 곧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결(結).’
기(氣)는 결국,
외기(外氣)와 내기(內氣)의 총합.
외기를 받아들여 단전에서 내기로 형성하고, 이를 다시 바깥으로 쏟아내는 것이 모든 무공의 기본.
지금 내 몸은 하나의 단전.
활짝 열어젖힌 백회를 통해 거센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감당하기 벅찬, 엄청난 양이다.
내기라고 할 수도, 외기라고 할 수도 없는 기운.
자칫 삐끗하면 단전과 기혈이 터져나가 끔찍하게 뒈져버릴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기운을 인도했다.
순식간에 기맥을 통과한 기운이 월영검에 맺혔다.
아니,
월영검이 눈부시게 빛나는 진기에 에워싸였다.
“허튼짓 하지…….”
온 몸이 으깨지고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팟.
아주 작은 소리와 함께, 월영검을 에워싼 빛이 폭발했다.
곧고 날카로운 빛줄기들이 나를 으깰 듯 짓누르던 어둠을 꿰뚫었다.
수백 줄기 강기의 다발이 놈의 마력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어떻게, 인간 주제에……!”
피가 번진 놈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곧 죽을 놈.
대꾸할 필요는 없다.
어깨가 가벼웠다.
발도, 팔도, 팔에 들린 검 역시도.
놈의 마력에서 놓여나 가벼워진 검을, 나는 내질렀다.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어깻죽지의 상처를 꿰뚫고, 가슴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검을 뽑지 않은 채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렸다.
등줄기로 떨어지는 대검을 호조수(虎爪手)로 젖히고,
무릎을 노린 대검을 당랑각(螳螂脚)으로 걷어차고,
손목을 찌르는 대검을 항룡장(降龍掌)으로 밀어내며,
오른손에 쥔 월영검에 연신 진기를 흘려보냈다.
아무리 신의 힘을 빌렸더라도, 그 힘을 구현하는 건 결국 놈의 몸뚱아리.
놈의 몸은 인간이고, 인간의 몸의 한계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검날을 통해 흘려보낸 진기.
그 진기가 놈의 몸 속 곳곳에서 마기와 부딪히는 중이었다.
어마어마한 격이 보여주던 대로 아주 짙고, 아주 무거운 마기(魔氣)와.
이마에 땀이 솟았다.
울컥, 핏물이 솟구쳤다.
나는 핏덩어리를 꿀꺽 삼키며 진기의 유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스촤아앗.
허공을 조각내며 내 목줄기를 향해 놈의 대검이 쇄도하는, 바로 그 순간.
폭포처럼 흘러나간 진기가 소용돌이치며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진기와 진기가 충돌하고, 충돌로 잘게 쪼개진 진기가 다시 마기와 부딪혔다.
진기와 마기가 다시 충돌했다.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번의 충돌.
그리고.
대검의 검은 검날이 내 목에 닿기 직전.
혈왕놈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삼반공의 2절, 파(破).
세상의 어떤 단단함도 파괴할 수 있는 최강의 기공이 놈의 몸속에서 시전되었다.
콰직.
작은 폭발음과 함께,
일순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놈의 가슴팍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놈의 가죽과, 살점과, 뼛조각과, 붉은 피가 허공을 점점이 수놓았다.
형체가 사라진 가슴팍.
그 위에 달려 있던 모가지가 덜컹, 바닥으로 떨어졌다.
‘혹시 이번에도 되살아난다면…….’
온몸의 기혈이 들끓고 있다.
백호처럼 놈이 살아난다면, 목이 잘려나간 몸뚱아리에 기생충 놈이 또 현현한다면…….
‘약한 소리.’
다시 박살내면 된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세 번으로 안 되면…….
잘려나간 대가리는 고요했다.
어깨를 통해 찔러 넣은 가슴팍이 안에서부터 폭발해, 허리 아래만 남은 시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끝이구나. 정말로, 끝이야.’
달각.
작은 소리와 함께 월영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빙글, 세상이 돌았다.
좀 어지러운 것 같은 기분...
“혀어어어엉아아앙아아아아!!!!!!!”
“대애애애애표오오오오니이이이이임!!!!!!”
김강산이 날듯이 달려오고, 하하민이 김강산을 바싹 뒤따랐다.
최지수가 이마를 짚으며 몰래 눈물을 닦는 모습이 그 뒤로 보였다.
얼빵한 얼굴의 이바름과, 눈을 휘둥그레 뜬 조은조와, 흥분으로 뺨이 벌겋게 물든 박명칠과,
겨우 안심한 듯 거칠게 숨을 내쉬는 지남천.
피투성이로 웃고 있는 빙화신녀.
흔들리는 서은창의 목소리.
“…혈왕을, 죽인… 어, 지금 그 마력은 대체… 아니, 어떻게 혈왕을……?”
밤을 쨍하게 울리는 김강산의 목소리가 서은창의 그것을 뒤덮었다.
“형!!! 또 왜 그래!!! 제발… 제바알!!!!!”
천천히, 목소리들이 멀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잡았어. 내 힘으로, 진짜 내 힘으로……!’
딱 그만큼, 땅이 가까워졌다.
곤두박질치던 머리가 막 땅에 닿기 직전 김강산이 내 몸을 받쳐 안았다.
“형. 쉬어. 다 끝났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푹 자고 일어나.”
…근데.
왜 또 울고 지랄이야, 이 애새끼가.
***
계룡성 내외부를 샅샅이 수색했으나 남은 혈귀단은 없었다.
곧이어 대전성으로 피했던 일반인들이 귀성했다.
-저게, 그 악명 높은 혈왕이군. 과연 사악하게 생겼네.
-그 대한길드도 못한 일을 계룡문이 해내다니!
-내가 진작 말했잖아? 검룡님이라면 혈귀단을 끝장내실 거라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괜히 계룡으로 왔다고 오줌 질질 흘린 새끼가. 니 바지 아직도 축축하거든.
-내가? 내가 언제? 이거 땀이거든?
혈왕과 흑귀대주의 목이 계룡문 본부 앞에 내걸렸다.
광장에 몰려든 사람들의 감탄과 환호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그 소리들 속에는 흐느낌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평생 혈왕의 목이 매달린 광경을 보게 되다니!!! 흐윽!! 흑!!!
-아저씨, 괜찮아요? 숨 쉬세요. 그러다 숨넘어가셔요.
-흐윽!! 내가, 철원혈겁 때 가족을 모두 잃었… 흐윽… 철민아… 여보… 드디어… 검룡님… 흑… 감사…흐으윽…….
포위를 뚫고 도망친 혈귀단은 스무 명을 넘지 못했다.
남은 혈귀단 놈들은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모두 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딱 한 놈만 제외하고.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남은 한 놈, 녹귀대주의 아혈을 풀었다.
“켁! 쿠엑! 켁!”
격한 기침을 뱉어대던 놈이 가장 먼저 지껄인 말은 역시,
“살려주십시오!”
“내가? 너를? 왜 그래야 하는지 육하원칙으로 말해봐.”
“저는 억울합니다! 제 아버지께서 프롤 새… 아니, 일반인들에게 살해당… 악!”
“지겹다, 진짜. 너도 이십 년 전 원한 얘기냐. 미래를 보라고, 미래를. 차라리 늙으신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소리가 낫겠다.”
“늙으신 어머니가 있습… 악!”
“이 새끼가. 어디서 복붙이야. 그리고… 어머니한테 있습니다가 뭐냐?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아니고 계십니다, 이 띨빡아.”
놈의 대가리를 후려 패는 나를 향해 김강산이 물었다.
“뭘 힘 빼고 있어, 형? 어차피 죽일 건데.”
“죽여?”
되묻는 나를 바라보며 김강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새끼, 거악이잖아. 거악 오브 거악.”
한 걸음 뒤에 물러서 있던 서은창이 슬그머니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꼴깍.
침을 삼킨 서은창이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고 간절한 목소리였다.
“저기, 사형. 이놈, 목숨만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 내장산채에서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사형께서는 마단전만 파괴하실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이 도적놈의 새끼가. 형이 사제니 어쩌니 하니까 진짜 니가 뭐라도 된 거 같냐? 계룡문 규칙도 모르는 새끼가…악! 아, 림이 형! 왜 나한테만 그래! 이 새끼가… 악!”
김강산이 입술을 삐죽이며 대가리를 부여잡았다.
김강산은 처음 서은창을 봤을 때부터 대놓고 시비를 걸어 댔다. 물론 서은창도 설화누님을 겁박한 좌룡 어쩌고 하면서 김강산을 슬슬 긁어대기는 했지만.
‘그러니까 잘 해보라고.’
나는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내가 왜? 육하원칙으로 말해봐.”
서은창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녹귀대주를 향했다.
“철구 형.”
“…은창이? 네가… 살아, 있었구나.”
녹귀대주 주철구의 눈깔에 희번뜩 생기가 돌았다.
지옥문 앞에 솟아난 한 줄기 희망.
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서은창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계룡문 분들께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으나, 제가 어렸을 적 혈귀단에 있었습니다.”
둘러선 은영단 애들이 작게 헛숨을 삼켰다.
최지수만이 표정 변화가 없었다. 짐작했던 모양이지.
서은창이 어두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믿어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저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은인이십니다. 비록 잠시의 실수로 악에 손을 담갔으나, 그 밑바탕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철구 형을 살려주시면, 제가 목숨으로 은혜를 갚겠습니다.”
서은창의 곰곰한 시선이 둘러선 은영단을 한 바퀴 돌았다.
힘줄이 솟은 박명칠의 팔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그도 나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터.
-그 사람, 옛날에는 진짜 착한 사람이었다. 기석이 형이 먼저 각성하고 내가 각성 못했을 때도 얼마나 우리 집을 잘 챙겨줬는지 몰라. 우리 아버지 쓰러지셨을 때도 그 형이 의사를 불러줬다고. 림아, 내가 진짜 잘할게. 앞으로 작은, 그래, 소악도 저지르지 않게, 내가……!
박명칠 역시 가기석을 감쌌었지.
나는 그때 박명칠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서은창의 간절한 시선이 나에게 돌아왔다.
“검룡님, 아니… 사형. 하나뿐인 사제의 부탁입니다.”
내 검지가 녹귀대주의 등을 훑었다.
마혈이 풀린 놈이 꿈틀거리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잘못했습니다… 정말로 잘못했습니다…….”
시멘트 바닥으로 축축한 액체가 흘렀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알 바 아니다.
“너 말이야. 주철구라고 했냐.”
스파앗.
월영검의 검날이 놈의 왼쪽 어깨를 지났다. 다음으로, 오른쪽 어깨.
놈의 다문 입술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이거, 회복술 쓰지 마. 내가 확인하러 갈 테니까. 혹시 회복했다면, 다음번에 검이 지날 곳은 네 목이 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은혜에,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고통을 기억하라고. 죽을 때까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