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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68화 (68/122)

68화.  ■■■ ■■ ■ 자 (3)

차르륵.

가벼운 소리와 함께 월영검이 검집으로 되돌아갔다.

녹귀대주 놈의 흐느낌이 옅은 침묵을 간헐적으로 흔들었다.

‘이쯤이면… 그래. 네가 나서야지.’

“림아. 정말로 이놈을 이렇게 놓아 준다고?”

박명칠이다.

아까부터 얼굴을 구기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형, 오늘 너무 피곤해서 훼까닥 돌았나본데… 악!”

일단 김강산 너는 좀 비키고.

“뭐가 문제야? 내 계룡문이고, 내가 계룡검룡인데.”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상황을 관망하던 이바름과 조은조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대표님. 왜 그러셔요. 정말 저 굴러들어온 놈의 돼먹지 않은 소리를 들어주시게요?”

“…대표님 실망입니다.”

“대표님! 저는 실망 안 해요! 저는 무조건 대표님의 뜻을 따릅니다! 대표님 뜻! 내 뜻!”

…마지막은 물론 하하민이다.

이 눈치 없는 놈.

나는 녹귀대주 놈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은영단을 한 바퀴 휘돌아보았다.

많이 강해졌다.

하지만, 많이 부족하다.

“내 계룡문인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게 뭐가 문제지? 오늘 내가 없었다면 저기 광장에 매달린 목은 니들 목이 되었을 텐데.”

이바름과 조은조와 박명칠이 동시에 합죽이가 되었다.

…야. 벌써 그러면 안 되지.

다행히 나에게는 최지수가 있다.

내 말에 토를 달기를 주저하지 않는, 내 오른팔.

“림아. 말이 심하구나. 애들이 너 없는 동안 얼마나 잘 싸웠는지 모르지 않느냐. 아까 네가 돕지 않았더라도 녹귀대주는 우리 은영단이…….”

“내가 돕지 않았더라도, 우리 은영단이 박살낼 수 있었다?”

“…그런 말이 아니…….”

“그런 말이 아니면? 아! 내가 괜히 끼어들었구나? 은영단이 존나 잘 지킬 수 있었는데 말야. 그렇구나? 은영단 씨발, 이 새끼들 존나 컸네. 존나 컸어?”

“형! 왜 급발진… 악!”

“씨발, 내가 급발진 안 하게 생겼냐고! 오늘 하루 종일 좆뺑이 치면서 존나 빨빨거리면서 다녔는데, 내가, 하나뿐인 사제 부탁 좀 들어준다고 이 애새끼들이 얼굴 시뻘겋게 해대며 개기는데, 내가, 씨발! 집어치워! 야! 이 새끼, 당장 꺼져, 이 씹쌔야! 안 그러면……!”

녹귀대주가 허겁지겁 일어났다.

“사, 사형… 진정하십시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그래! 너 때문이다, 이 도적놈아! 니가 굴러 들어와서는……!”

김강산이 서은창의 멱살을 잡았다.

서은창이 그 주먹 위에 제 손을 겹쳐 잡고는 제 다리로 김강산의 무릎을 후렸다.

오호. 비연각(飛燕脚)을 제법 잘 쓰네.

김강산을 떼어낸 서은창이 손을 툭 툭 털고는 녹귀대주의 허리를 잡아 일으켰다.

“철구 형. 이리 따라오세요.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빠르게, 서은창과 녹귀대주가 사라졌다.

“…정말로, 이렇게 살려준다고? 림아. 이건 아니다. 이건 계룡문이 아니야.”

최지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칠게 고개를 휘저었다.

“계룡문? 그래, 니들 멋대로 잘 해봐, 이 새끼들아!”

콰앙!

대표실의 문이 거세게 들썩였다.

내가 문을 닫고 들어오고 나서도, 은영단 애들은 한참 동안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문으로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

‘잘했어. 잘한 거야.’

멀리, 계룡성벽이 내다보였다.

조금만 더 멀어지면 곧 숲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될 계룡성벽.

결국 나 때문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계룡성은 혈귀단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사혼삼살이 계룡성에 들어올 리 없었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보령성도 습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아마…….

‘기생충놈도 나타나지 않았겠지.’

일 년 사이 벌써 두 번째다.

지남천도, 빙화신녀도, 지금껏 그런 놈들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묘하게 호의적이게 느껴지는 태도도 그렇고.

아마 놈들은 나를 주시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분명 다시 나타날 터.

이 세상이 이 꼴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놈은 분명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으니까.

‘아주 위험한 기회지.’

이번 혈귀단의 습격으로 여섯 명의 계룡문도가 사망했다.

보령회의 희생자는 훨씬 많을 터.

내가 없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막을 수 없어.’

[신에게 통하는 문이 열리고 다섯 번째로 검은 하늘이 열리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리라.]

‘다섯 번째로 검은 하늘, 5차 블랙데이가 시작되면…….’

4차 블랙데이 후로 벌써 12년이 지났다.

그 전까지 6년 단위로 터지던 블랙데이와는 다른 양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막연한 희망은 조금씩 부피를 더했다.

블랙데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기대.

균열이 다시 열리지 않으리라는 바람.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 기생충들.

그 격(格)은 분명 인외의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장 역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봐야겠지.’

괭이도마뱀, 아니, 괭이도마뱀의 몸뚱아리를 타고 등장했던 격이 다른 존재와 맞닥뜨린 후 나는 그 희망을 접었다.

그리고 이번에 완전히 버렸다.

다섯 번째 블랙데이가 시작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면.

…저런 기생충들이 떼로 등장하는 건 아니겠…….

에이. 설마.

이거 무협이라고. 판타지 아니라고. 무슨, 그런 장르이탈이라고……!

아니겠지? 아닐 거다.

하하.

하하하.

그래, 기생충이든 신새끼든 나타나 봐라.

두 놈 죽였는데 더 못 죽이겠냐고.

그리고 그 뒤는…….

[비로소 죽음이 세상을 뒤덮고 죽음을 딛고 일어난 필멸자는 불멸의 영혼을 얻게 되리라.]

불멸자, 좋지. 좋다 이거야.

더 이상 이룰 거 없는 놈들이 마지막에 꽂히는 게 불멸 아니겠어. 그 진시황도 뒈지기 싫어서 생사초인가 뭐시기를 찾아 헤맸으니깐.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리는 없지.’

각성조차도 모두가 하지는 못했다.

소화는 일평생 내력을 쌓았으나 끝내 화경(和境)을 밟지 못했지.

하물며 신의 경지란…….

아마도,

자격.

어떤 자격을 가진 존재, 아주 극소수의 존재만이 죽음을 딛고 살아남을 터. 그리고 그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죽는다.

최지수도. 김강산도. 하하민도. 월매도. 서은창도. 지남천도. 이바름과 조은조와 박명칠도. 모든 계룡문도와 계룡성민도. 어쩌면 모든 지상의 사람들이…….

‘혈왕놈이 뒈지지 않고 그 모습을 봤으면 좋아가지고 지랄발광을 했겠어.’

그런 모습을 보려고 지금껏 애를 쓴 게 아니다.

그 자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룡문의 진정한 친우를 확인하는 것.

검룡이라는 존재가 없을 때에도 계룡문의 위기를 돕고, 계룡문이 등을 내줄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둘째는, 계룡문이 강해지는 것.

이번 전투에서 보여준 애들의 무위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동시에 나는 그들이 더욱 성장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걸 가로막는 것은…….

은영단만의 힘으로도 진작 끝장낼 수 있었던 녹귀대주와의 전투를 질질 끌었던 것도 내가 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다칠까봐.

아플까봐.

자칫 잘못해 죽을까봐.

내가 애들을 가로막았다.

애들을 믿지 못해서, 애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옆에 붙어 있으면 나는 또 견디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제 홀로 서야지. 그럴 때가 되었어.’

그리고 셋째는.

5차 블랙데이가 오기 전에, 이 거지 발싸개 같은 세상을 어떻게든 수습하는 것.

그 중 가장 먼저 할 일이 혈귀단의 찌끄레기를 털고 본진을 박살내는…….

“사형. 안 갑니까?”

“간다, 가. 이놈아.”

서은창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계룡성벽에서 시선을 떼어내 몸을 돌렸다.

“근데 사형. 추혼마인이 진짜 있을까요? 제가 있을 때는…….”

“그게 언제냐. 십오 년 전이라매. 블랙데이가 두 번 오고도 삼 년이나 남는 시간이라고.”

“사형은 꼭 비유를 해도 그런 걸 합니까.”

휘파람을 불자, 곧 월매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나는 철함에서 대환단 한 알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

“야. 이거 아니라고. 냄새만 맡아. 아, 주월매! 쪼지 말라고오!”

대환단을 쥔 주먹 위를 월매가 개처럼 킁킁거렸다.

“새가 냄새를 맡아요?”

“다른 건 못 맡는데, 영단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지.”

“대체 언제 그 새끼한테 영단을 먹이셨어요?”

“알아서 뭐 하게.”

“그거 좀 말해주면 닳나. 나는 사형이 시켜서,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새끼한테 은혜 입었다는 소리까지 지껄였는데. 진짜 입이 썩는 줄 알았다고요!”

“그런 거치고는 연기를 썩 잘하던데. 이거, 사제 믿었다가 뒤통수 씨게 맞겠어.”

“…사형한테 그런 말 들으니 진짜 억울하네요. 내 설화 누님. 진짜 사람이 인두겁을 쓰고… 아야. 알겠다고요.”

서은창이 입술을 실룩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월매야. 이거 먹은 새끼 찾아. 그게 네 거야. 죽이지는 말고, 찾으면 돌아와라.”

뀨우!

월매가 눈을 번쩍였다. 어째 날개 끝이 불끈 쥔 주먹처럼 보이기도 하고…….

순식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진 월매의 꽁무니를 바라보던 서은창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었어요? 그냥 혈귀단 본부 찾으러 가겠다, 찝찝한 부분이 있다, 이러시면 되었을 걸. 굳이 원망이나 듣고 말예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계룡을 떠나지 못했을 테니까.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 소중한 이들.

내 두 번째 월악이자, 내 첫 번째 계…….

응?

뭐냐. 이 기운은.

옅게 펼쳐놓은 기감의 그물에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마력이 느껴졌다. 뒤이어.

“혀어엉엉아아아아아아----!!!!!!!”

익숙한 목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김강산이다.

제 키만한 배낭을 짊어진… 음. 일호꼬치 냄새?

“같이 가!!!!! 나도 갈 거라고!!!!!”

***

딸랑. 딸랑.

허공에 뜬 방울이 명랑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노인이 호리병을 놓고 방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긴 호리병이 허공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주름진 손가락이 방울에 닿기 직전.

딸랑. 딸꾹. 딸랑. 딸꾹.

허공을 빙글 돈 방울이 다른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놈이?”

“진정하십시오, 만취한 주정뱅이.”

“귀찮게 왜 따라오고 지랄이야.”

주정뱅이가 다시 갈지자로 걷기 시작했다. 방울이 그 머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말을 붙였다.

“조사국에는 왜 오셨습니까.”

“넌 또 왜 알면서 물어.”

“초월자 규약 제3조 38항을 어기고 세계 HM#87602에 현신했던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주정뱅이는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걸었다.

‘듣보 그놈이 이들도 끌어들였나?’

주정뱅이는 조사국에 오기 직전에도 언제나처럼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호리병 속의 술을 호록호록 삼키며 거울 속에 비친 멸망하는 세계를 보고 있었다.

필멸자의 세계 HM#87602.

그곳의 지성체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으로는, 지구.

그곳에 더 이상 그의 볼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각 세계에서 가능한 열매의 계약은 단 한 번. 그리고 그 계약자인 백호는 이미 소멸했다.

계약에 소모한 격과 규칙 위반으로 회수된 격에 비하면 백호의 이름이 그곳의 지성체들에게 회자되어 얻은 격은 한참 부족했다.

손해가 막심한, 실패한 투자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

그럼에도 주정뱅이는 다른 멸망하는 세계를 관찰하고, 새로운 투자처를 고심하면서도 HM#87602를 관람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작 700년이라는 짧은 세월이었으나 이전 몇 만 년의 세월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을 함께한 그의 벗이, 그 세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관람하던 HM#87602에서 벌어진 일은…….

[신이라. 후. 후. 후. 아주 재미있어. 듣보 네가 이리 말하는 걸 듣다니. 역시 네 말대로 격을 포기해가며 이 덜떨어진 놈과 계약하기를 잘했어. 아주 잘했어. 후. 후. 후.]

[너는 오롯이 홀로 선 자. 고로 계약의 자격이 없다.]

[약속한 것보다 훨씬 많은 창을 냈군. 부디 잊지 말기를 라네, 아무여.]

[내가 계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패널티가 부과되거든. 사실 이미 많이 받았지만.]

‘열매의 계약’에 약속된 세 번의 현신.

그 첫 번째 현신으로 세계에 방문한 ‘사신의 낫’은 그놈이 이해하지도 못할 소리들을 굳이 지껄였다. 그리고 그 대단한 격의 100분의 1도 드러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소멸했다.

혈왕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열매, 진정한 문이 열릴 때까지 살아남을 리 없는 썩은 열매와 계약한 덜떨어진 초월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그게 사신의 낫이었다니.

일반적으로는 사신의 낫 정도 되는 초월자가 자신의 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런 썩은 열매와 계약할 리 없다.

‘이도 듣보 네놈의 안배였더냐. 하지만 이리 애를 썼어도 네가 원하는 결말이 가능할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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