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장벽 너머의 땅 (1)
주정뱅이는 만들어낸 눈으로 자신의 주위를 휘도는 방울을 좇았다.
잠시 후, 주정뱅이가 입을 열었다.
“계약자가 아닌 이에게 그리 많은 창을 내다니. 사신의 낫은 격이 남아도는 모양이더군.”
“역시 관람하고 있으셨군요. 여전히 그 세계에 흥미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 녀석은 왜 그랬대?”
방울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군.’
주정뱅이는 자신이 조금 전에 걸어 나온 조사국을 힐끔 넘겨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높은 원통형의 건물이 허공에서 뻗어 나온 수만 개의 나뭇가지에 안기듯 감싸여 있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끄트머리에서 연녹색의 새순이 봉긋 솟아올랐다. 작은 싹은 곧 샛노란 꽃으로 피어났다.
활짝 열린 꽃봉오리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가 이내 저물고, 꽃 아래 매달려 있던 이파리들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며 크기를 키웠다.
이파리 아래에 맺혔던 녹색의 둥근 열매가 붉게 익어 떨어지고, 바싹 마른 이파리들이 뒤이어 나뭇가지와 작별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잎이 떨어진 나뭇가지는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 다시 생기를 되찾은 나뭇가지의 끝에 새순이 맺히기 시작했다.
최초부터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세계수.
그 가지는 모든 세계에 닿고, 그 뿌리는 모든 존재에 뻗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그곳에서 탄생과 생장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초월자라면 누구나 세계수의 힘에 매료되고, 동시에 세계수의 힘에 거부감을 느꼈다.
아이가 부모의 애정을 갈망하며, 동시에 부모에게서의 독립을 희구하듯이.
무심한 시선으로 세계수를 응시하던 주정뱅이가 자신의 주위를 휘도는 방울을 향해 가볍게 팔을 뻗었다.
딸랑.
방울이 주정뱅이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며 목소리를 만들었다.
“좋은 날에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내쫓지 말아 주시길.”
“너 같은 놈들하고 상종하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작게, 방울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방울의 형체도 같이 사라졌다.
그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정뱅이의 손에 흰 호리병 하나가 들렸다.
꼴깍, 꼴깍, 꼴깍.
만들어낸 목젖이 크게 일렁였다.
***
“월매야. 여기가 맞냐? 진짜로?”
뀨우.
월매가 머리를 기울였다.
나와 서은창, 김강산은 돌아온 월매의 안내를 따라 북상을 거듭했다.
녹귀대주놈이 향한 곳, 혈귀단 놈들의 은신처를 찾아서.
계룡성에서 혈왕의 목도 잘랐으니 은신처에 남은 놈들은 많지 않을 터.
그놈들을 완전히 끝장내서 그런 쓰레기 조직이 또 생길 여지를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 보나마나 시체 덩어리 수준이겠지만, 추혼마인인가 하는 것들도 확실히 분리수거를 마쳐야 뒤가 깔끔하다.
그런 기대를 안고, 일주일 동안 200km를 주파했다.
오는 길에 고블린 소굴을 소탕하고 쫓아오는 와이번 가족을 사망 처리하고 유랑하는 오크 떼를 세 번 마주쳐 모두 박살내고 그 뒤를 따라오던 구울 무리를 불태우고 오우거를 다섯 마리… 일곱 마리? 하여튼 꽤나 잡았다.
내가 아니고, 김강산과 서은창이.
-형, 여기 있으라고. 여기 앉아서 운식체조? 그거 하면서 쉬어.
-좌룡.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지요. 운식체조가 뭡니까? 운기조식입니다, 운기조식!
-이 혈찌 새끼가 또 아는 척하네?
-…혈찌?
-혈.귀.단.찌.끄.레.기.
-지금 말 다했냐?
-아니? 다 안 했는데?
두 놈은 결국 머리에 하나씩 혹을 달고 우리를 포위한 오미호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욕을 지껄이며 검질과 도질을 하는 모양이 화풀이를 하는 듯 보이기는 한데.
아니. 그렇게 서은창이 꼴 보기 싫으면 계룡에 돌아가라니까.
김강산 이놈은 돌아가기는 또 죽여도 싫대지.
에휴. 이건 뭐.
무협, 판타지, 다음은 육아물이냐고.
나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운공에 집중했다.
애들 싸움질에 신경 쓸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일주일 동안 월매의 뒤를 따라 북상하는 동안, 나는 김강산과 서은창의 등에 번갈아 업혀 가며 내상의 치료에 집중했다.
혈왕놈과의 전투가 끝이었다면 멀쩡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이어 벌어진 기생충 놈과의 전투에서 입은 내상이 꽤나 깊었다. 그래서 서은창을 달고 나왔다. 김강산이 따라나올지 몰랐으니까.
기혈의 곳곳이 막히고 터지고 붓고, 서로 자기주장을 하느라 난리법석이었다.
폭풍이 할퀴고 간 듯 상처 입은 단전은 서비스.
‘그래도 선천진기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월매가 전진을 멈춘 곳은 깊은 산 속이었다.
전날 오후에 폐허가 된 양구성터를 지났으니 뉴휴전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근처에 성도 없고, 야인의 마을은 더욱 없고.
혈귀단놈들이 은신하기 딱 적절한 장소이기는 한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으나 걸리는 게 없다.
섬세하게 긁어 봐도 걸리는 게 없다.
“그냥 숲인데? 마력도 하나 안 느껴진다고. 혈귀단은커녕 녹귀대주 한 놈도 없다고. 너 제대로 찾은 거 맞냐? 나이 들어서 이제 후각 둔해진 거 아냐?”
뀨우우. 끼우욱. 끼끼루!
월매가 고개를 360도로 돌리고 날개를 퍼덕였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자란 전나무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 월매가 고개를 쳐들며 소리를 질렀다.
“잘 모르겠다는 것 같은데요, 사형.”
“쯧, 쯧. 혈찌가 월매에 대해 뭘 안다고. 형, 월매가 여기 맞대.”
“좌룡. 말 좀 가려서 하지?”
“내가 언제 틀린 말 했냐? 혈귀단 찌끄레기. 혈찌놈아.”
“이렇게 유치하게 구니 설화누님께서 좌룡을 믿지 못하셨겠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좌룡을 떨궈놓으시려고 그런 거짓까지 늘어놓으셨던 것이군… 어? 붙어 보자고?”
“그래. 이 혈찌놈… 악! 형! 왜 나한테만 그래! 이 새끼가 먼저 시비 걸었다고!”
이번에는 분명히 김강산 네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
그래도 고통은 나누어야 하는 법이니까.
“사형. 저는 억… 악!”
머리 복잡하니까 작작 좀 하라고. 새끼들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두 놈을 내려다보던 월매가 긴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다시 전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두꺼운 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여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야. 니네 닥치고 이리 와 봐.”
두 녀석의 시선이 내 검지가 가리키는 지점을 향했다.
흙 밖으로 드러난 굵은 나무뿌리 옆.
허리까지 자란 수풀 아래 고동색의 딱딱한 물질이 놓여 있었다.
또아리 튼 구렁이를 닮은…….
“똥이잖아.”
“똥이네요.”
“이걸 어떻게 해, 형?”
어쩌길 뭘 어째. 여기 건장한 사내놈이 둘이나 있는데.
“야. 김강산.”
“형! 왜 나야? 저 새끼한테 시키라고오! 저 혈찌놈의 새…….”
“서은창.”
“사형. 월악문도로서 저리 지저분한 물질에 손을 댈 수는…….”
이것들이.
퍼버버버벅. 퍼버벅.
잠시 후 두 놈은 혹이 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막대기로 똥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것을 발견했다.
내가 몰래 녹귀대주 놈의 입에 처넣은 그것. 소화를 막기 위해 얇은 오크 가죽으로 정성껏 포장한 대환단.
서은창이 조심스럽게 똥 묻은 오크 가죽을 벗겨내고 대환단을 물에 씻었다.
조금 쿠린내가 나기는 하지만…….
“월매야. 이거 네 거.”
끼욱! 뀨우우욱!
월매가 거칠게 도리질을 했다. 뾰족한 부리가 내 팔을 마구 쪼았다.
“주월매. 싫어? 싫으면 내가 먹는다? 나는 진짜 줬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내가 입을 벌려 대환단을 삼키는 시늉을 하자, 나를 힐끔힐끔 살피던 월매가 덥석 대환단을 물어 포르르 날아갔다.
“형 진짜…….”
“왜. 또. 뭐.”
나무 위에 올라 대환단의 맛을 음미하는 월매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빽빽한 나뭇가지와 뾰족한 침엽수의 이파리 사이로 희끗희끗한 장벽이 보였다.
3차 세계대전 이후 건설된 뉴휴전선.
전쟁이 터지고 치열하게 싸우던 남한과 북한은 2차 블랙데이가 시작되며 다급히 휴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괴물과 싸우는 와중에 지뢰를 긁어모아 휴전선 인근에 다시 지뢰 지대를 만들고 얼마 남지도 않은 군대를 동원해 장벽을 쌓아 올렸다.
균열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을 막기에도 다급한 블랙데이에 말이다.
그 잘못된 선택은 대한민국이 망한 수많은 원인 중 하나였다.
뭐. 다 과거의 일이고. 중요한 건 현재다.
대환단을 찾았다.
그 말은, 이제 녹귀대주놈이 어디로 튀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의미.
‘역시 내상 회복을 미뤄두고 일단 놈을 추적했어야…….’
…아니, 아니지.
최지수가 마력증폭제 부작용으로 의식을 차리지 못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지옥에 떨어진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런 기분을 다른 애들이 경험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아니고, 다급한 상황도 아니다.
그저 내 마음이 더 편하도록 완전히 끝을 보고 싶은 것일 뿐.
놈이 이곳을 지나간 것이 확실한 이상, 꼼꼼하게 뒤지면 무엇이라도 나올 터.
그러니까 지금부터…….
“야, 혈찌. 뭐 아는 거 없냐?”
“…….”
“씹냐? 지금 내 말 씹었지? 와. 이 새끼 봐라. 너 지금 혈귀단 숨겨주는 거? 림이 형 봐서 내가 진짜 참고 있는데, 이 새끼가, 어? 쳤어? 어?”
“어이쿠야. 어디서 오우거가 앵앵대나.”
“이 새끼가! 너 이리 안 오냐?!”
화르륵.
김강산의 대도에 청염이 휘감겼다.
“사형. 제가 시작한 거 아닙니다?”
서은창이 힐끔 내 눈치를 살피고는 검을 뽑았다.
아… 놔. 이 애새끼들이…….
중딩 서열 싸움 하는 것도 아니고.
철이 없어도 어지간히 없어야지. 내가 검황의 삶을 살 때 니들 나이일 적에는…….
하하.
나도 어지간히 철이 없었네.
스무 살 애송이들이 다 그렇지, 싶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야무지게 붙어 봐라.”
나는 월영검을 휘둘러 바위를 잘라냈다.
[이 비무의 결과에 승복하여, 패자는 승자를 형님으로 대접한다.]
“…형님으로 모시라고? 이 혈찌를?”
“좌룡은 자신 없나 보군요. 저는 좋습니다, 사형!”
“시발. 너는 이제 뒈졌다. 나도 콜이야, 형.”
나는 판판한 바위를 찾아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곧, 김강산의 손에서 떠난 금빛의 화염구가 수풀과 울창한 나무를 불태우며 서은창을 향해 날아갔다.
“헤헤! 이런 잡기술을!”
서은창이 검을 빠르게 휘둘러 화염구를 잘라냈다.
동시에, 두 놈이 서로를 향해 쇄도했다.
.
.
.
풀이 재가 되었다. 숯덩어리가 된 거목이 재가 된 풀 위를 덮었다.
삼십 분 가까운 비무… 아니,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멀쩡하던 숲이 황량한 벌판이 되어버렸으니까.
두 녀석은 주변을 다 박살내면서도 내가 누운 바위는 티끌 하나 건들지 않았다.
하여튼 귀여운 구석이 있다. 이 맛에 애 키우…….
이건 아니고.
그러고도 둘의 비무는 끝나지 않았다.
마력은 김강산의 근소 우위.
검술은 서은창의 근소 우위.
내 시선이 놈들을 빗겨 바닥에 파인 검은 구덩이로 향했다.
김강산과 서은창이 치고받으면서 숲이 사라졌다. 잡풀에 숨겨져 있던 너비 1미터 남짓의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땅굴.
뉴휴전선 인근에 있는 땅굴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혈귀단 놈들의 본거지를 그토록 오래 발견하지 못한 이유도.
‘…이제 이 녀석들을 돌려보내야겠군.’
김강산이 바닥을 걷어차며 서은창의 정수리를 향해 불길 휘감긴 대도를 휘둘렀다. 서은창이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도격을 회피하고 손목과 무릎을 향해 연속적인 검격을 내질렀다.
카앙!
김강산이 재빨리 도를 회수해 상단찌르기를 방어하고 동시에 전진해 하단찌르기를 회피했다.
검과 도가 거세게 맞붙었다가 튕겨나갔다.
“제법인데?”
“야, 너두!”
다행히 격렬한 전투를 통해 철없는 두 녀석은 서로를 인정한 눈치였다.
그 증거로, 녀석들의 검에 일렁이던 마력이 꽤나 약해져 있었다. 마력이 바닥난 게 아니라, 서로 큰 상처를 입힐까 염려해 절제하는 것.
‘이만 끝내도 되겠어.’
혈왕놈과의 전투로 인한 내상도 절반 이상 회복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두 녀석을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
이제 서로의 수준을 알았으니 들입다 치고받지는 않을 테고. 그렇게 계룡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곧 사이가 좋아지겠지.
“야. 거기까지. 이러다 밤새겠다.”
물론 두 녀석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탄지공(彈指攻)에 얻어맞은 서은창과 김강산이 똑 닮은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며 다가왔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갈 테니까, 너네는 계룡에 돌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강산이 펄쩍 뛰었다.
“싫은데? 절대 싫은데?”
예상대로였다.
나는 김강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계룡을 지켜야지. 계룡문에서 네가 가장 강하잖냐. 나도 없는데 누가 계룡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 청염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계룡좌룡인 김강산 네가 막아야지, 그걸 누가 막겠어.”
“꺄…륵”
적당히 우쭈쭈해주자 녀석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거의 다 왔네.
“용감하고, 멋지고, 유일하게 청염까지 생성할 수 있는 최고의 화염전사 김강산! 계룡좌룡 김강산, 계룡의 구원자, 계룡의 수호신, 계룡성의 여자애들이 입을 모아 외치겠지? 김강산이 최고…….”
“안사요, 형아.”
…응?
이걸 안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