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1화 (71/122)

71화. 장벽 너머의 땅 (3)

‘장벽 너머는 괴물의 땅이라더니. 과연 사실이네.’

땅을 새카맣게 뒤덮은 구울놈들이 아랫배의 주둥이에서 침을 뚝 뚝 흘리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열댓 마리의 오크놈들이 네 개 팔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스무 마리가 넘는 화염박쥐놈들이 우리를 향해 활강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미호 세 마리가 기다란 뒷발로 땅을 걷어차며 쇄도해 들어왔다.

일 년 전이었으면 나에게도 벅찼을 놈들.

하지만 지금은…….

“와우. 간만에 경험치 좀 쌓겠는데?”

김강산이 대도를 들어 올리며 신이 난 목소리로 지껄였다.

“니들. 우리가 혈귀단 뒤쫓고 있는 거 기억하지?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력 최대한 억제하고 검질로 처리해라, 응?”

“림이 형. 내가 애냐? 걱정하지…….”

김강산이 대도를 휘둘렀다.

불길 없는 대도에 구울 한 마리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마시라고요!”

그걸 신호로, 살육이 시작되었다.

팟. 스팟. 파앗. 푸슉. 키아악. 캬악. 팟. 스팟. 팟. 팟. 파바바바바바밧밧밧밧.

발을 구르며 나에게 달려들던 십여 마리의 구울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땅을 나뒹굴었다.

끈적이는 구울의 검은 피를 밟으며 내가 오미호를 향해 쇄도했다.

어깨를 비틀어 오미호놈의 날카로운 앞발을 회피하고,

길쭉한 주둥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염을 검막으로 방어하고,

벌어진 아가리에 검을 꽂아 넣었다.

놈의 배를 걷어차며 빠르게 검을 뽑아내는 순간,

오크놈이 등 뒤에서 달려들었다.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검을 수평으로 휘두르자,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을 따라오지 못한 오크놈의 왼쪽 무릎이 월영검의 검날에 잘려나갔다.

놈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고,

등줄기에서 가위팔이 솟아올랐다.

나는 오른발로 무게중심을 옮기며 상단으로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가위팔이 내가 조금 전 서 있던 지점의 흙을 내리치고,

월영검의 검끝이 비스듬히 기운 놈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파앗!

검이 빠져나온 구멍을 통해 진녹색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격렬한 전투는 길지 않았다.

서은창과 김강산도 숨만 조금 가쁠 뿐 멀쩡했다.

꾸웨에에엑!

공중을 향해 던진 월영검의 검날이 화염박쥐놈의 가슴팍에 명중했다.

가슴에 월영검을 매단 화염박쥐놈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놈을 향해 다가가 월영검을 뽑아내는 순간, 김강산의 대도가 마지막 오크놈의 등줄기를 둘로 갈랐다.

대도를 들어올리며 김강산이 발랄하게 소리쳤다.

“다 끝났어, 형!”

…맞는데. 맞는데 말이지.

그런 소리 함부로 지껄이는 거 아니라고.

부스럭.

가장 먼저 뒈졌던 구울, 절반으로 잘려나갔던 구울놈의 오른쪽 몸체가 불길하게 꿈틀거렸다. 뒤이어, 왼쪽 몸체에 달린 네 개 다리가 벌떡 일어나 땅을 디뎠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있는 놈들은 일어서고, 팔이 있는 놈들은 떨어뜨렸던 무기를 쥐었다. 다리도 팔도 없는 잘려나간 조각들은 자신들의 피로 얼룩진 땅에서 어쩌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사형, 이거……?”

서은창의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다.

“그래. 리치네.”

재수가 없으니 하필이면 상급 괴물이랑 마주쳐도 하필이면 리치냐.

리치는 시체를 일으킨다.

시체가 일어날 수 있을 때까지, 영원히, 뽀레버.

그 꼴을 보지 않으려면 시체를 완전히 조각내야 한다.

수십 번 칼질을 하거나, 화염으로 불태우거나, 얼려서 박살내거나, 바위로 으깨거나…….

‘녹귀대주놈을 찾기 전까지는 가급적 조용히 다니려 했더니.’

놈들도 당연히 탐색술을 쓸 수 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마력이 탐지되면, 그게 우리인 걸 알게 되면, 자라처럼 그 등딱지 속에 꼭 숨어서 눈알만 뒤룩뒤룩 굴릴 게 뻔하다.

그러면 일이 영 귀찮아지는데 말이지.

…그럼, 내 인생이 그렇고말고.

“형. 어떻게 해? 그냥 마력 써?”

검질로 이 많은 시체를 조각내려면 밤 새게 생겼다.

나는 내 팔자를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들 이제 다 뒈졌다!”

김강산의 마력이 거세게 일렁였다.

마력를 억제하며 싸우기가 꽤나 답답했던 모양.

화르륵!

김강산의 대도가 청염에 휩싸였다.

막 일어서려던 좀비 오크가 청염에 휘감겨 녹아내렸다.

“우와… 그거 좋네.”

서은창이 감탄을 내뱉자 김강산이 히히거리며 기세를 높였다.

“서은창 너는 이거 없지?”

“허, 난 그딴 거 필요 없거든.”

서은창이 대꾸하며 화간일광(花間一光)의 초식을 시전했다.

단번에 검에 모여든 마력이 검끝으로 발출되고, 앞에서 접근하던 오미호의 몸통에 직격했다. 거센 힘과 부딪친 오미호가 마치 적(積)에 얻어맞은 듯 폭발했다.

시시각각 시체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 박살내기는 어렵지 않겠고.

“여기는 니들이 맡아라. 나는 리치 잡을 테니까.”

“넵, 사형.”

“오오케이, 형.”

믿음직한데 묘하게 믿음직하지 않은 두 녀석을 뒤로 하고 내 발이 바닥을 걷어찼다.

멀지 않은 곳에 상급 괴물로 추측되는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젠장. 이 띨띨한 새끼가.’

스팟.

월영검이 좀비의 발목을 지났다.

한쪽 발목을 잃고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좀비의 몸통을 향해 연속적인 검격이 쏟아졌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밧.

손바닥만큼 작게 잘려나간 시체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내 발이 물컹한 살점을 밟아 으깨며 바닥을 걷어찼다.

“캬아아! 캬아아!”

좀비다운 소리를 내며 놈들이 달려들었다.

죽은 지 오래 지나지 않은 인간.

찢어졌으나 옷이 썩어 사라지지 않았고, 곳곳에 찔리고 베인 상처를 입었으나 뼈가 드러나도록 시체가 삭지 않았다.

익숙한 옷차림이다.

흑의인. 적의인. 그리고 잘려나간 두 팔의 단면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녹의인.

내가 뒤쫓던 놈들이다. 계룡에서 도망친, 혈귀단의 잔당들.

제 삶에 걸맞은 죽음이었다.

죽어서도 죽지 못하고 좀비가 되어…….

“야. 이렇게 허무하게 뒈지는 법이 어딨냐고. 니들 추혼마인 그거 못 찾으면 나 영 찝찝한데.”

리치는 두억시니처럼 상급 괴물이지만, 잡식성이 아니다.

괴물에게는 관심이 없고 인간만 먹는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해 성장한다.

나한테 죽기 직전까지 처맞고 다급히 퇴각하는 길에 리치를 마주쳤으니 도망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을 터.

“운이 나빴네.”

너 말고, 내가 말이야.

녹귀대주였던 좀비놈이 꾸웨엑거리며 나를 향해 쇄도했다.

살아생전의 녹귀대주보다 더 빠르고 더 단단해진 신체.

…이기는 한데.

월영검의 검끝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검에 꼬치처럼 꿰어진 채 놈이 쿠에엑거리며 입을 벌렸다.

따악. 딱.

내 목덜미를 노린 아가리는 허공을 깨물 뿐 결코 나에게 닿지 못했다.

허우적거릴 팔은 처음부터 없었다.

내가 잘라낸 그대로. 내 경고를 기억했던 모양이다.

‘목숨이 아깝기는 했나 보지, 네놈도.’

결국 이렇게 죽을 것을.

콰아아아!

월영검의 검날을 타고 오른 강기가 놈의 몸속에서 폭발했다. 놈의 단단한 가죽이 조각조각 찢겨 하늘하늘 공중을 날았다.

나는 몇 놈의 전(前) 혈귀단놈들을 편하게 뉘어 주며 기감의 그물을 펼쳤다.

투명화를 쓴 리치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으나, 조금 전부터 기감의 그물에 흐릿한 마력이 잡히고 있었다.

놈 역시 나를 노리는 게 분명했다.

아주 빠른 놈이다. 거의 순간이동이라 느껴질 정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청응의 불도저로 불릴 때 계룡 인근의 리치를 잡은 적이 있었다. 꽤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잡을 만했는데.

이놈은 그때 그놈과 차원이 다르다.

마력을 숨기는 것도 수준급이다.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그 순간,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뻗어 나왔다.

세 개의 뾰족한 갈고리가 달려 있는 리치의 왼손 갈퀴.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갈퀴를 회피하며 월영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스파앗.

흰 검기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20여 미터 넘게 멀어진 리치놈의 잔상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졌다. 그리고…….

기척도 없이 다시 나타났다.

카강!

내 어깨를 할퀴려는 놈의 왼손을 월영검이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검기에도 놈의 갈고리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손목을 비틀어 두 개의 갈고리 사이 끼인 월영검을 빼내 다시 휘두르려는 찰나.

재빠르게 접근한 놈의 촉수가 내 가슴팍에 닿았다.

콰아아!!!

응축한 호신강기를 단번에 폭발시키자, 불에 덴 듯 촉수가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물론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곧 다시 뻗어왔으나,

다시 놈의 촉수가 내 몸에 닿기 직전 취원보(醉猿步)를 운용해 아슬아슬하게 몸을 빼냈다.

나는 다섯 발 연달아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투명화를 완전히 풀고 숨겼던 마력을 끌어올리는 리치놈의 전체 모습이 그제야 제대로 보였다.

내 키의 두 배는 훌쩍 넘는 커다란 몸체.

왼쪽 팔의 끝에는 손가락이 아닌 세 개의 날카로운 갈고리로 이루어진 갈퀴가 번쩍이고, 오른쪽 팔의 끝에는 수십 가닥으로 갈라진 촉수가 오징어 다리처럼 흐물거리고 있다.

해골에 거의 가죽만 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그 가죽이 오크 가죽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검은 두개골에 뚫린 두 개의 구멍이 나를 응시했다.

재앙 백호에 필적할 만큼 엄청난 마력이 느껴졌다.

만만치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그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력을 흡수한 거냐.’

손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방금 전 촉수의 입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하마터면 진기를 빨릴 뻔했다.

내력이 아닌, 선천진기를.

예전에 박살냈던 리치와 달리 이놈의 마기는 호신강기로 막아지지 않았다.

끈적한 마기가 순식간에 기맥에 침투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단전에 스며들어 단전 깊은 곳의 문을 두들겼다.

삼매진화를 일으킬 새도 없는, 엄청난 속도.

가슴팍에 붙은 촉수의 입을 떼어내자 그때서야 비로소 마기의 전진이 멈추었다. 그리고 곧 삼매진화로 마기를 태워 없앴지만.

‘떼어내지 못했더라면, 끝장이었어.’

해파리처럼 하늘거리는 촉수의 길이는 대략 2미터.

그 수는… 어엄… 서른 개는 넘어 보이고.

이거 잘못하다가 북한 땅에서 뒈지게 생겼……!

파슈슈.

놈이 단번에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갈퀴가 아니라 촉수가 먼저 뻗어왔다.

재빨리 놈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촉수를 회피하자 기다렸다는 듯 왼팔의 갈퀴가 휘둘러졌다.

어깨를 할퀴려는 갈퀴를 호조수(虎爪手)로 잡아채고,

다시 손목을 향해 날아오는 갈퀴를 옥룡장(玉龍掌)으로 튕겨내고,

등줄기를 노리는 갈퀴를 비봉수(飛鳳手)로 방어했다.

종이 한 장 차이.

조금만 늦었어도 놈의 갈퀴가 내 몸에 꽂혔을 터.

그런데 말이지…….

“너, 나 죽일 생각이 없구나?”

놈의 공격은 정수리와 목줄기를 향하지 않았다.

한 번 공격으로도 단번에 죽일 수 있는 약점들을 회피해, 어깨와 팔과 등과 가슴팍만 노리고 있다.

그렇다면야.

갈퀴를 몸으로 때우면서 저 촉수를 하나씩 잘라내면 된다.

생명력을 흡수하는 ‘촉수의 입’ 촉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제비처럼 납작하게 눌린 부분만 피하면 장땡이라는 말씀.

“그렇지. 내가 한 방에 뒈지면 생명력 흡수고 뭐고 못하겠네. 아이고, 너도 참 인생… 아니, 괴생 살이 피곤하겠어. 그지?”

놈이 캬악캬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호신강기로 갈퀴의 공격을 버티며 어깨를 비틀어 촉수의 입을 회피했다.

뻗어 나온 촉수의 줄기들을 향해 거세게 월영검을 휘두르자, 세 가닥의 촉수가 단번에 잘……?

‘시발! 여기서 입이 생긴다고?’

검이 촉수에 닿는 순간, 촉수는 눌린 물풍선처럼 찌그러졌다. 그리고 그 접촉 지점에 ‘입’이 생성되었다.

입을 통해 흘러들어온 끈적한 마기가, 검자루를 쥔 손바닥을 타고 기맥을 파고들었다.

황급히 검을 회수하자, 마기가 전진을 멈추었다.

그것을 삼매진화로 태워 없애며 나는 재빨리 거리를 두었다.

하하하.

하하.

하…….

‘이걸 어떻게 잡냐.’

북한놈들, 국왕인지 폐하인지 그 지랄 맞은 새끼는 대체 어쩌자고 이놈을 이렇게 키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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