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1)
스촤아아아.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다시 촉수가 뻗어왔다.
이번에는 갈퀴도 함께였다.
기운을 끌어올리는 순간.
“림이 혀어어엉!!!!!”
김강산의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리치놈이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투명화한 채 이동하는 놈이 향할 곳은, 언덕 위에 나타난 김강산과 서은창의 앞.
“화염탄 준비해!!!!”
김강산의 손 위에 흐릿하게 일렁인 푸른빛의 마력이 단번에 주먹 크기의 화염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월영검의 검끝에서 강기의 구슬이 발출되었다.
적(積). 적(積). 적(積). 적(積). 적(積). 그리고 또 적(積).
나에게서 김강산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수십 가닥의 빛줄기가 뻗어 나갔다.
콰아! 콰아앙! 쿠아아!
강기에 격중당한 놈의 투명화가 풀리고,
“쏴!”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강산이 놈을 향해 화염탄을 날렸다.
굉음과 함께 나무 둥치가 조각나고, 바위가 박살나고, 흙이 튀어올랐다.
놈을 향해 적(積). 적(積). 적(積). 적(積). 적(積). 그리고 또 적(積)을 날리며 내가 외쳤다.
“튀어!!!!”
***
우리는 최대한의 속도로 10여 분을 내달린 끝에 멈춰 섰다.
이렇게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튀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아득…….
아. 일 년 전에 두억시니 잡을 때도 죽어라 튀었었지.
“형. 저거 리치야?”
“아니면 뭐겠냐.”
“헐. 마력이 백호급인데? 대체 얼마나 리치를 방치하면 저렇게까지 되냐?”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며 기감의 그물을 넓게 펼쳤다.
잡히는 건…
있었다.
리치는 아니고, 중급 수준 각성자가 대여섯 놈.
“…백호요? 서쪽의 지배자, 서해를 피로 물들이는 자, 그 백호, 재앙이요? 설마, 그 소문이 진짜라고요? 계룡검룡, 그러니까, 사형이 백호를 잡았다는… 그 완전 뜬금없었던, 그 소문? 설마? 진짜?”
서은창 이놈은 이제 와서 뭔 소리래.
궁금하면 정주행 하든지.
“서은창 너는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사제라고 지랄이냐. 내가, 응? 그 자리에 있었걸랑? 어얼마나 어엄청났는지…….”
김강산을 향한 서은창의 시선에 약간의 감탄이 묻어났다.
…걔 그때 거기서 백호한테 도 한 번 제대로 못 휘두르고 뒈질 뻔했는데.
특별히 비밀로 해 주마, 김강산놈아.
“야. 사람들 온다.”
내 말과 함께 김강산놈이 얼른 마력을 조절했다.
이제 꽤 능숙해졌다. 항상 마력 억제를 기본 장착하고 있는 서은창만큼은 아니지만.
‘상대가 어떤 놈인지 제대로 확인하려면 약해 보이는 편이 낫거든.’
우리를 향해 일단의 무리가 가까워졌다.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것이, 탐색술이 있는 모양이다.
곧 흑색의 가죽 갑옷을 입은 이들이 풀숲과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의 가슴팍에 박힌 태극 문양을 보니 신조선의 정규군인 듯했다.
어차피 이 장벽 너머의 땅에 조직이라 부를 만한 조직은 신조선국, 하나뿐이라고 했으니.
가장 앞에 선 놈이 검을 쳐들어 나를 향해 겨누자, 뒤따르던 놈들이 조용히 마력을 집중했다.
곧 그 입술에서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주께서 출입을 금한 구역에서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디?”
뭐 하고 있냐니.
감히 내 계룡성을 습격한 혈귀단놈들의 본진을 박살내려고 그 뒤를 추적해 왔더니 땅굴에서 나와 보니까 그 띨띨한 놈들이 이미 미친 리치한테 당해서 이미 뒈졌고 나는 갈 곳을 잃었는데 혹시 혈귀단의 본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냐고 물어보면…
안되겠지.
1차 블랙데이 직후 쿠데타를 일으킨 안종문은 총비서 김정명을 제거하고 신조선국을 세웠다.
그는 괴물과 괴물화된 인간으로 들끓는 북한의 서쪽 땅 대부분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함흥으로 천도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함흥성을 왕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왕성을 포함해 강계성, 혜산성, 청진성, 원산성 이렇게 5개의 성이 주성이지요. 주성들에는 각각 10여 개의 부성들이 소속되어 있고요. 각 주성의 군사력은 길드 이상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김영호는 자신 없는 말투였다.
-자세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파천궁에서는 신조선국에 대한 정보 수집을 중지했거든요.
-왜? 거기 궁주 장래희망이 세계 정복 아니었냐? 나한테는 그 지랄염병을 떨어 놓고 북한은 왜 버렸대?
-…정복이 아니라 구원입니다만.
-내 말이 그 말이야.
-궁에서는 신조선국은 파천궁의 위협 요인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요.
-현재에 만족한다?
-그렇지요. 더군다나 정보원을 보내도 득보다 실이 많아요. 침투한 이들 십에 팔구는 소식이 끊깁니다. 괴물도 많지만, 내부 단속이 철저하다더군요.
신조선의 4개 성 중 최남단은 원산성이다.
혈귀단의 활동 무대가 남한이었으니, 그놈들의 본거지는 뉴휴전선에서 멀지 않을 터. 즉, 원산성의 영토에 혈귀단의 본거지가 있을 가능성이 99.9퍼센트다.
혈귀단이 신조선인지 헌조선인지 하는 놈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신조선의 숨겨진 무력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협조적인 관계였다고 보는 편이 안전하다. 그러니까…….
‘아이 씨. 뭐라고 해야 되냐.’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한 놈이 다급하게 뛰어와 앞에 선 놈을 향해 경례를 올려붙였다.
“리 동무!”
리 동무는 나를 주시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졸개놈에게 물었다.
“현장 상황은 어떻디?”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습네다. 일으키는 자에 의해 일어선 죽은 몸들은 모두 불어터진 국시마냥 뚜욱 뚜욱 쪼개져서 절대로 다시 일어날 수는 없습네다.”
리 동무의 의문에 찬 눈동자가 나와 김강산, 서은총을 차례로 훑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인다.
그래, 네 생각 맞아. 우리가 그거 박살내긴 했는데 말이지.
‘그냥 마혈 짚고 튀는 편이 낫겠고만.’
폭발하듯 솟구친 마력이 느껴진 것은 내가 막 리 동무놈을 향해 팔을 뻗으려는 순간이었다.
김강산 녀석이 억제하고 있던 마력을 있는 대로 개방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놈이 또 무슨 사고를 치려… 응?
“내래 보위대 소속이오. 위대하시고 령도하시는 국왕폐하께서 직접 하달하신 기밀 업무를 수행 중인데.”
리 동무의 눈빛이 스리슬쩍 흔들렸다.
김강산의 붉은 눈동자가 리 동무를 서늘하게 응시했다. 김강산이 느릿느릿 마력을 거두며 말했다.
“원산성은 방어 상태가 엉망이군, 기래. 일으키는 자가 이리 활보하도록 손 놓고 있다니. 성벽 밖의 류민들도 모다 국왕폐하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갔디. 이 사실을 내 보고드리면 크게 실망하시갔어.”
“…기밀 업무라시면…….”
“동무! 보위대는 곧 폐하의 얼굴이다! 보위대를 이리 대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김강산이 왼발을 구르며 짐짓 소리를 높였다.
너 이게 무슨 급발진이냐.
그런 거지같은 연기가 통할 리가 없…
‘통하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 느껴지던 리 동무의 살기가 사라졌다. 세상에 얼빠진 놈이 많다더니 여기 하나 추가해야겠다.
리 동무가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원산성 방위단 대장 리태연입네다! 호, 국!”
“보. 은.”
김강산이 제대한 부사관처럼 설렁설렁 경례를 받으며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얼른 양손 검지로 네모를 그렸다.
‘일단 지도를 받아내라우, 김 동무.’
김강산이 알겠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대장 동무. 내래 기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 지시를 내리갔어.”
“무엇이든지 하달하시라우!”
“내 조금 전 일으키는 자와 주먹다짐을 수행하다 그저 땅그림을 잃어버렸디.”
“…그 일으키는 자에게서 살아남으셨다는 말씀이심매?”
“하하. 동무, 이태껏 보위대를 본 적 업디.”
“영광입네다. 영광입네다.”
놈들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지도를 내놓고 멀리 사라졌다.
그 마력이 기감의 그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나는 김강산을 올려다보았다.
김강산놈이 어설프게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에이. 림이 형. 왜 분위기를 잡고 그래.”
이렇게 보면 내 김강산이 맞는데 말이지.
영화에서나 듣던 그 유창한 북한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너 보육원에 오기 전에 뭐 했냐?”
“이건 그냥 책에서 읽…….”
“너 한글 못 읽는 걸 내가 모를까.”
“헤헤. 이게, 그러니까…….”
말을 돌리는 모양새가 어째 최지수 앞의 나 같다.
그동안 내가 무엇인가를 숨길 때마다 너희들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별로 좋지는 않네.’
머뭇거리던 김강산이 서은창을 힐끔거렸다.
서은창이 눈치를 살피고 얼른 뒤를 돌았다.
“됐어. 뭘 자리를 피하고 그러셔. 별로 숨길만한 얘기도 아냐.”
서은창이 슬금슬금 다시 뒤돌아 내 옆에 섰다.
“딱히 숨기려고 한 건 아냐, 형아. 그냥 딱히 지껄일 이유도 없어서…….”
김강산이 나를 내려다보며 눈꼬리를 접었다.
분명히 웃음이었는데, 어쩐지 울음 같았다.
울음처럼 웃으며 김강산이 입술을 뗐다.
***
-림이 형, 일단 원산성 장마당을 뒤져보자. 거기가 성 밖을 다니는 사냥꾼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드나들며 혈귀단을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야. 김강산 네가 북쪽에서 내려온 걸 알았으면 김영호한테 정보 뜯으러 갈 필요 없었네. 괜히 서울 왕복하느라 시간만 잡아 먹었고만.
-…내가 진작 말했으면 녹귀대주 새끼 뒤지기 전에 잡았을 텐데. 미안, 형아…….
김강산이 풀 죽은 강아지처럼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 손이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이해한다.
김강산의 과거는, 말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 좀비 새끼 상태 보니까 뒈진 지 한참 됐더라. 그렇게 따지면 내가 내상 회복하느라 천천히 와서 놓친 거네.
-그건 혈왕새끼 잡느라…….
-그러니까 닥치라고. 미안하단 소리 한 번 더 하면, 확!
김강산이 다급하게 손을 들어 올려 대가리를 막았다.
내 손바닥이 그 바로 위에서 멈췄다.
눈을 껌벅이던 김강산이 슬금슬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짝.
가벼운 하이파이브.
-됐고, 일단 원산성에 가보자고. 네 말대로 장마당이라도 뒤지면 뭐라도 나오겠지.
리 동무가 선물한 지도에 따라 원산성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높고 두터운 성벽 위에서 방위단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괴물만이 아니라 외부인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가 명백한 방어… 였지만.
그래봐야 나에게는 조밥이다.
정하영이 만들어준 마력발산구슬은 계룡에 두고 왔다.
즉, 나에게서는 마력을 1도 탐지할 수 없다는 소리.
마력을 억제한 김강산과 서은창이 내 뒤를 따라 조심스레 원산성의 성벽을 뛰어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말이지.
-사형. 저거 뭡니까? 산아. 저거 뭐냐고.
골목 어귀에서 경찰로 보이는 각성자가 행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주섬주섬 무엇인가를 내놓은 사람이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신분증? 신분증 검사하는 거 같은데.
-맞아, 형! 신분표 확인이 겁나 빡세댔어.
김강산이 뒤늦게 손뼉을 쳤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느긋하게, 하지만 빠르게 내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비슷한 장면을 맞닥뜨렸다. 서쪽에서도, 동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득보다 실이 많아 정보원 파견을 중단했다던 김영호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 철저한 순찰인지 감시인지를 피해 다니느라 혈귀단 추적은 시작도 못했다.
나는 고민 끝에 조금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서은창이 쓸 만한 괴물을 찾아 숲속을 돌아다니는 사이 나는 김강산이 지키는 동굴에 틀어박혀 운공에 열중했다.
일주일만에 서은창이 쓸 만한 오우거 두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원산성의 장마당을 향하고 있다.
어깨 위에 거대 오우거 가죽을 하나씩 짊어진 서은창과 김강산이 한 발 뒤에 따라왔다. 두 개의 오우거 심장이 내 양손에서 찰랑찰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특등품이고만. 혹 저 치들을 아시오?
-모른다우. 저런 얼굴은 한 번 보면 잊을 리 없는데.
-량강도에서 내려왔나? 그쪽 사냥꾼들이 그리 실력들이 좋다고 하더네만.
원산성 장마당에서 미호 만두를 씹던 사람들 둘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수근댔다.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을 중심으로 좁고 긴 단층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성에 들어온 후로 지금까지 마주친 모든 각성자들보다 많은 각성자들이 각 가게마다 바글거렸다.
김강산의 말대로라면, 키메라 힘줄부터 각성자용 수면제까지 없는 게 없는 곳이다.
힐끔거리는 시선을 뚫고 순찰대를 피해 도착한 부산물 상점의 주인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사냥꾼 증명표는 없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김강산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물었다.
주인놈이 의심스럽다는 듯한 시선이 김강산과 서은창과 나를 한 바퀴 훑어보고는 이내 내가 쥐고 있는 두 개의 심장에 고정되었다.
그래. 가죽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도 상태 좋은 신선한 심장을 쉽게 구하기는 어렵겠지. 이거 상처 안 내고 잡는다고 꽤나 고생했거든.
나는 아니고, 서은창 이놈이.
찰랑. 찰랑.
가볍게 심장을 흔들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주인놈이 꼴깍 군침을 삼켰다.
분명 아주 탐나 뒤지겠다는 표정인데. 고작 사냥꾼 증명표가 없다고 거래를 거부할 리가 없다.
‘트집을 잡아 가격을 후려치려고? 어디 해 봐라. 이놈아.’
꼴딱꼴딱 침을 삼키던 주인놈이 결정한 듯 입을 열었다.
“동무들, 탈주병이디? 내 특별히 성에 신고하지 않을 테니 가죽과 심장은 여 놓고 날래 꺼지라우. 오늘 운 좋은 줄 알라. 뜨내기들이 어디 겁도 없이 원산의 장마당에 들어와서. 쯧,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