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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3화 (73/122)

73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2)

‘꼭 손을 쓰게 만드네.’

역시 최악의 선택을 한다. 북쪽에서의 첫 거래라 좋게좋게 넘어가려 했더니만.

일반인을 겁박하는 건 취향이 아니지만, 겁박은 이놈이 먼저 시작했으니까.

김강산이 얼굴을 구기며 무엇인가 대꾸하려고 하다가 내가 오른손을 들자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서은창이 슬그머니 상점의 문을 닫고 그 앞에 섰다.

주인놈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각성자를 상대로 협박하는 간뎅이가 부은 놈이다. 아마 믿는 구석이 있겠지만.

글쎄.

그 믿는 구석을 부를 시간이 있을까.

무엇인가를 외치려는 듯, 놈이 크게 입을 벌렸다.

동시에 내 검지가 놈의 아혈을 짚었다. 이어지는 가벼운 분근착골. 순한맛 버전.

서은창이 슬쩍 고개를 돌려 꿈틀거리면서 바닥을 기고 있는 주인놈을 외면했다. 하여튼 최지수 이상으로 마음 약한 놈이다.

잠시 후 눈물과 콧물에 범벅이 된 주인놈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내 검지가 놈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래 협박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소리 지르면 더 혼난다우? 알았으면 눈 한 번 깜박.”

까아암바아악.

주인놈의 눈이 간절하게 깜박였다. 아혈을 풀어주자 놈이 쿨럭쿨럭 기침을 해대며 재빠르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무지렁이가 상급 능력자이신 줄을 몰랐습네다. …어데서 오신 분들이십네까?”

“그건 알 거 없고. 우리는 깡패 사파놈이 아니니까 시세대로만 받을꼬마. 이거 시세 얼마디?”

곧 놈이 빳빳한 지폐 오십 장을 내밀었다.

1000돈표짜리 50장. 오만 돈표.

아까 장마당에서 일미호 고기만두 한 팩이 2돈표였으니 남쪽보다 더 비싸게 팔…….

“장난질 허지 말라우, 동무.”

았다고 생각할 것 같았냐.

네놈 표정만 봐도 다 보인다. 이거 네놈한테 개이득인 거래라는 거.

내가 짐짓 얼굴을 구기며 월영검으로 놈의 목을 겨누자,

“사냥꾼 동무. 진정하시라우! 내래 지금 가진 돈표가 이것이 전부라… 내일 다시 오시면 오만 돈표를 더 준비해 두갔습네다!”

창백해진 주인놈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겁도 많은 새끼가, 그러게 왜 바가지를 씌우려고 그래.

-와, 진짜 많이 해 본 솜씨 아니냐. 나 활빈당 때도 저렇게 화끈하게는 못 했는데.

-림이 형이 못 하는 게 없지. 근데 너무 잘 어울린다. 계룡문 대표보다 이게 더 맞는 거 같은데?

-그러게. 아주 천생 도적… 헤헤. 아닙니다, 사형. 설마 이걸 또 들으셨어… 악!

-형, 미… 악!

나는 만족스러운 거래를 마치고 상점을 나섰다.

주인놈은 바가지를 씌우려던 자신을 반성했는지 목줄기에 닿은 월영검이 무서웠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에 이어진 내 질문에 순순히 답했다.

그에 따라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위조 신분표 발급소.

북쪽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일단 신분표가 필요할 듯싶었다.

-다른 성도 다 이러냐?

-뭐가, 형?

-존재하는 것도 허락받아야 되냐고.

-나도 잘 몰라. 나 훈련소에서만 살았다니깐.

김강산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잠시 걸었다. 부산물 상점 주인놈이 말한 문은 장마당에서도 꽤나 구석진 골목에 숨겨져 있었다.

又産所(우산소).

다시 태어나는 곳.

신분표 위조 가게치고는 꽤나 인상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을 적은 솜씨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잠시 철문 앞에 멈춰 서서 세로로 큼직하게 적힌 한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단정하면서도 강건한 필지였다.

획의 두께와 깊이가 일정하다. 여러 번 파낸 획이 아니라, 단 한 번에 빠르게 적어 내려간 흔적.

‘상당한 실력인데.’

상점 주인의 설명대로 철문을 여섯 번 두들기고 문을 밀었다.

긴 복도 끝에 작은 나무문이 보였다.

좁은 복도의 벽과 낮은 천장에 부딪힌 발자국 소리들이 그림자를 만들며 고요하게 울렸다.

나무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우.”

경첩이 마찰하는 소리가 귀를 긁었다.

문 안은 작은 방이었다. 내가 들어온 나무문의 반대쪽에 나무문이 또 하나 달려 있었다. 오른쪽 벽에 뚫린 길쭉한 창을 통과한 옅은 햇볕이 어슴푸레하게 방을 밝혔다.

백발의 여자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얼굴은 온통 흉터 투성이었다. 수십 개의 칼자국과 곰보 자국이 주름진 얼굴을 뒤덮었다.

“안녕하십네까, 어르신. 저희는…….”

“그만하라우.”

여자가 김강산의 말을 뚝 끊었다.

…쩝.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시나리오였는데.

여자의 시선이 김강산과 서은창을 한 바퀴 돌아 나에게 맺혔다.

“어차피 제 입에서 지껄이는 말이 제 편을 들갔지. 거게 사실인지 거짓인지 내래 구분이나 하것어?”

꼴깍.

김강산이 침을 삼켰다.

꼴깍.

서은창이 침을 삼켰다.

두 녀석은 꽤나 긴장한 상태였다.

-안 만들어 주면, 뭐. 어쩌라고. 림이 형이 분착골빡 그걸로, 악!

-분근착골이다. 이놈아. 그리고 어? 우리가 깡패냐? 깡패야? 이 새끼를, 확!

-아파, 형아, 아프다고! 아악!

그렇게 지껄이던 녀석이 바싹 쫄아서 꼴딱꼴딱 침이나 삼키고 있다.

‘…꽤 늘었네. 김강산 녀석.’

고수는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는 법.

오래 살아남으려면 덤빌 상대와 납작 엎드릴 상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못한 수많은 놈들이 나에게 대가리를 후드려 맞고 목을 따였었지.

하지만…….

눈꼬리를 접어 만들어낸 내 웃음이 여자를 향했다. 여자는 물론이고 어지간한 남자조차도 본능적으로 따라 웃을 수밖에 없는 얼굴… 이라던데.

여자는 미소 한 조각 없는 표정으로 여전히 서늘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은거기인을 만나게 되는군.’

여자를 탐색하기 위해 펼쳐낸 기감의 그물.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을 가느다란 기(氣)의 줄기들.

그것은 여자에게 닿지 않았다. 여자를 둘러싼 투명한 마력의 벽이 기감의 그물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로막고, 내 기운을 가볍게 튕겨내고 있다.

훌륭한 기술이다.

가벼운 탐색술로는 아마 여자를 그저 마력 없는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판단하게 될 터.

여전히 나를 응시하며 여자가 느릿느릿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내,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앞장선 것도 김강산, 말을 꺼낸 것도 김강산이었다. 나에게서는 마력 한 조각 느껴지지 않을 텐데…….

‘확실히 만만치 않은 자야. 이런 고수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지.’

여자의 엄지와 검지가 천천히 맞닿았다.

두 손가락이 익숙한 동그라미를 그렸다.

“자네들이 어디서 왔는디 어디로 가려 하는디는 관심 없소. 거, 돈은 준비되어 있소?”

***

한 시간 후.

세 장의 신분표를 손에 넣고 다시 철문을 나왔을 때, 일단의 무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적북적한 골목의 한중간으로 휘앵앵 바람이 불었다.

각자의 병장기를 손에 쥔 20여 명의 각성자들.

근육 불끈불끈한 어깨들 뒤로 부산물 상점 주인의 넙데데한 얼굴이 보였다. 히죽거리며 시시덕대는 꼴이 참…….

가장 앞에 선 대머리놈이 전투도끼를 어깨에 걸쳐놓고 주절거렸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간나새끼들이 겁도 없이 원산의 장마당에 기어들어와서 행패를 부렸다고? 각오는 했겄디?”

이야. 이런 대사 오랜만이네.

요즘 검룡 대접 받으며 살다 보니 저 전형적인 양아치의 멘트가 참신하게 들린다.

“낯짝이 에미나이 못잖게 맨들맨들하고만, 기래. 내 안까이 삼아 주래?”

뒤에 섰던 놈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무슨 개소리……?

-형. 저 새끼가 ‘얼굴이 여자 못지 않게 예쁘구만. 내가 아내 삼아 줄까?’라고 했어.

김강산이 재빠르게 내 귀에 속삭였다.

어차피 후드려 맞을 예정이었는데 너는 예정보다 다섯 대 더 맞아야겠다.

“간나새끼들. 쫄아붙어서 속닥이는 꼬라지 보라우. 그러게 생각을 하고 일을 벌여야디.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잘못했다 빌면…….”

“무지개 반사.”

“뭐… 아악!”

내 주먹이 대머리놈의 턱을 올려쳤다.

하늘로 높이 솟은 대머리놈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무릎으로 놈의 복부를 올려쳤다.

다시 놈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뺨을 열일곱 번 후려갈기고,

가볍게 엉덩이를 걷어차 공중으로 띄운 뒤 떨어지는 놈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지나치게 실력이 벌어지면 그 차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법.

조금 귀찮아도 천천히 밟아줘야 다시 덤빌 생각을 하지 않…….

“사형. 뭐하십니까?”

서은창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대머리를 제외한 모든 놈들은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형. 리치랑 싸우다가 또 내상 입었어?”

“…됐다.”

곧 스무 명의 원산성 자유사냥꾼 협회 회원들은 장마당 뒤편으로 옮겨가 무릎을 꿇고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린 상태가 되었다. 도망치려다 서은창에게 뒷덜미를 잡힌 부산물 상점 주인도 가장 구석에서 같은 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찾아가려 했었는데 손 안 대고 코 풀었… 아, 손은 댔네.

“상급 능력자셨군요.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어디서 오셨는지… 아니, 처음부터 상급이라고 말씀을 하셨으면 저희도 이렇게 개념 없이 굴지는… 악! 으아! 아으악! 아악! …용… 용서해… 주십시오……!”

대머리놈은 머리카락과 달리 혓바닥이 길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안다.

몇 번 두들겨 주자 녀석의 태도는 아주 사근사근하게 바뀌었다.

대가리가 후려 맞는 모습을 목격한 나머지 녀석들도 모두 바싹 얼어붙었다.

나는 허리를 펴고 녀석들을 한 바퀴 휘둘러보고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계룡에 있을 때는 이런 식의 행동은 내 선택지에 없었다. 뒤끝 쩌는 놈들이 보복할까 염려해서였다.

내가 가만히 있었는데도 여러 번 난리가 터졌다. 곡사파는 미호 떼를 유인해 보육원을 공격했고, 혈귀단은 두 번이나 계룡을 습격했다.

만약 내가 가벼이 행동했다면 계룡은 이미 폐허가 되었을 터.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지.’

서은창과 김강산이 어디에서 뒤치기를 당할 수준은 아니다. 기생충놈만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몸을 빼낼 수 있는 멤버다.

뒷일 걱정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게 이리 좋을 줄이야.

아주 옛날, 월악문을 세우기 전 소화와 설표와 처음 강호행을 나섰던 때 같은 기분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돌며 비무를 요청하고, 그 말코도사 놈들과 대머리 중들은 얼굴 벌게져서 달려들다가 개구락지처럼 나자빠졌지.

그때는 나도 참 철이 없었다. 쉰 살도 안 먹었을 때니까.

…그리고 지금은 스물둘이거든. 하하.

“내가 너희들한테 물어볼 게 있거든? 어둠속… 아니, 암흑능력자들 본 적 있는 놈. 선착순으로 세 명 보내준다. 손.”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 온 뒤 죽순처럼 쑥 쑥 팔이 올라왔다.

어쭈. 한두 명이 아니다.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너.”

“여기에서, 이곳 장마당에서 봤습네다! 자주, 한 달에 한두 번씩 와서 먹을 것을 대량 구입했습네다. 찾고 있는 새끼가 있으시면 대면시켜주시면 제가 얼굴을 확인…….”

“다음, 너.”

“한 달 전에 창도호 인근에서 엄청난 규모의 암흑능력자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목격…….”

“다음, 너.”

“…흐윽! 내 거주하던 동리가 불바다가 되었슴매… 예에? 이십 년 전… 전쟁 중임매. 예? 저 함경도 출신임매.

음. 이건 아니고.

“다음, 너.”

.

.

.

스무 명 모두 어둠속성을 본 적이 있었다.

김강산의 말대로라면 북쪽에서도 어둠속성은 꺼리는 존재라고 했는데, 이들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어쨌든, 근처에 혈귀단의 본거지가 있음은 확실했다.

문제는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놈이 없다는 것.

-그놈들이 어디로 가더냐?

-동쪽으로 가던데 더 이상은 모르디요. 그짝은 일으키는 자의 영토라서... 아. 원산이 처음이시라 하셨제. 창도호 근방에 일으키는 자가 있는데, 그거이 30년 묵은 대괴수라. 얼매나 빠르고 은밀한지 그 괴수한테 당한 사냥꾼 동무가 수백이여라. 그짝으로 사냥하러 내려가시면 큰일납네다.

알어. 안다고. 이미 뒈질 뻔했거든.

결국 직접 그 근방을 뒤져야 할 듯하다.

어쩌겠어. 손발이 고생 좀 해야지.

놈들과의 진중한 대화를 마치고 막 돌아서려는데, 바닥을 박차는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입네다, 대장 동무. 저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어…….”

다급하게 안내하는 한 놈의 뒤로 가죽 갑옷을 입은 덩치 큰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나와 내 뒤에 선 김강산을 발견한 놈의 표정이 파드득 굳었다.

“호, 국!”

김강산이 당황을 추스르며 얼른 그 인사를 받았다.

“…어, 그래, 보은.”

일주일 전에 마주쳤던 대장 동무였다. 지도를 선물한 리태연 대장.

리태연은 꿇어앉은 녀석들을 가만히 둘러보더니 이내 김강산을 향해 말했다.

“혹시 임무가 장마당 단속이셨습네까?”

“…기밀이라우.”

리태연이 관자놀이를 벅벅 긁었다.

그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다음 말을 꺼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잘되었습네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습네다. 성주님께서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니 잠깐 성으로 동행하시디요.”

빙긋 웃는 놈에게서 뾰족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나를 돌아보는 김강산을 향해 내가 눈을 끔벅였다.

어떤 수작인지는 알아야지.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거든.

알겠다는 듯 오른쪽 눈을 찡긋거린 김강산이 리 동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볼일 있으면 그쪽이 오라우. 제깟 놈이 어디서 오라가라… 악……!”

…그거 아니라고.

이제 눈치 생겼다더니. 다 개소리였네.

탄지공(彈指攻)으로 날려보낸 돌조각에 옆구리를 후려맞은 김강산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래, 가겠네, 가겠다우. 당장 앞장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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