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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환생 검황-74화 (74/122)

74화.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 (3)

어둠속성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숫자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이렇게 철저한 신분 검사가 이루어지는 성 내에서 주기적으로 목격되었을 정도이니, 원산성과 혈귀단은 관련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안 불러도 찾아가야 될 판에 불러주시니 베리 땡큐지.

아까는 홀딱 넘어갔던 녀석이 왜 다시 살기를 질질 흘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니, 사실,

나는 줄곧 놈들을 두들길 핑계를 찾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살기라니. 소원대로 해드려야지.

김강산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계속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단 내상의 회복에 몰두했다. 얼마나 일이 커질지 나도 가늠하기 어려웠으므로.

이놈이 그놈이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화가 난다. 아주 많이, 화가 난다.

‘오늘 밤 당장 훈련소부터 찾아야겠어.’

내가 딴생각에 잠긴 사이 리태연이 방위단 본부에 도착했다.

2층짜리 건물, 그 건물을 둘러싼 담 안쪽에서 새파란 살기가 느껴졌다.

명백하게 우리를 향하는 살기.

숫자는 대략… 30여 명쯤 될까.

김강산과 서은창에게 눈짓을 하자 두 녀석이 알겠다는 듯 눈을 찡긋거렸다.

정말로 알아들은 게 맞는지는 잠시 후에 확인하면 되는 문제고.

나는 세 발짝 앞서 걷고 있는 리태연을 불렀다.

“리 동무. 어째서 그 일으키는 자를 지금껏 방치한 것임매? 성 밖 류민들의 생활이 그토록 피폐해디는 꼴을 국왕 폐하께서 아신다면…….”

“들어가서 이야기하시라우.”

잔뜩 찡그린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내 뒤를 따라오던 김강산과 서은총도 따라서 멈춰 섰다.

리태연이 구겨진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매복을 하려면 살기를 지우든지. 이렇게 살기가 시퍼런데 속아 넘어가 주고 싶어도 못 해주겠다.

“안 들어가시우?”

내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팔짱을 꼈다.

얼굴을 굳힌 리태연이 왼손을 들어올렸다.

다섯 손가락이 꽉 모여들었다가 검지가 펼쳐지고, 하늘을 가리켰던 검지가 빙글 돌아 땅을 가리켰다.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화염탄이 날아들었다. 뒤이어 얼음창이 뒤따르고, 날카롭게 벼려진 철검 수십 자루가 허공을 반으로 가르며 쇄도했다.

타닷.

거세게 바닥을 걷어차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어깨를 비틀어 화염탄을 회피하며 그대로 월영검을 수평으로 내질렀다.

희게 솟아오른 검기가 얼음창의 뾰족한 끄트머리를 꿰뚫고, 파스슥, 작은 소리와 함께 단단한 얼음이 조각조각 부서져 기화했다.

뿌연 수증기 속에서 검을 둥글게 휘둘렀다.

검막에 가로막힌 철검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갔다.

콰가가가!!!!

등 뒤에서 굉음과 함께 열기가 올랐다.

김강산이 만들어낸 화염벽 앞에서 화염탄이 허무하게 폭발하는 소리였다.

눈 깜짝할 만큼의 짧은 순간에, 놈들이 공들여 준비했을 기습은 무위로 돌아갔다.

“쳐라!!! 보위대를 사칭한 역적들이다!!!”

리태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유는 그거군. 아쉽게 됐네. 혈귀단이랑 한 패였으면 시원하게 목 따버렸을 텐데.

‘…보위대를 사칭하기는 했지. 그렇다고 역적까지야.’

담벼락 아래 숨어 있던 놈들이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썩 흉흉했다. 하지만.

“림이 형. 어떻게 해?”

“사형. 어쩔까요?”

두 녀석은 여유로운 얼굴로 검과 도를 꺼내 들고 있었다.

“살살 해, 살살.”

가볍게 대답하며 내가 검을 들어올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방위단장 리태연이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카캉!

내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녀석의 도끼를 월영검이 가로막았다. 순간적으로 손이 저릿할 정도로 힘이 상당했다. 도끼날 너머에서 놈이 으르렁거렸다.

“감히, 보위대를 사칭하다니. 내 국왕폐하를 대신해 네놈에게…….”

“야. 네가 뭔데 국왕폐하를 대신해? 너 그것도 역적질인 거 알어?”

“…네놈들이! 보위대를……!”

“그래, 사칭 좀 했다. 아니, 그걸 그렇게 믿을 줄은 몰랐지. 너 뇌 용량 구울이냐? 평소에 대가리 폼이라는 말 많이 듣지?”

리태연이 어금니를 으득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강산의 허접한 연기에 속아 넘어간 것도 그렇고, 꽤나 순진한 놈이다.

그래도, 오래 놀아줄 만큼은 즐거운 기분은 아니라서.

순간적으로 손목에 힘을 빼자, 팽팽하던 균형이 단번에 깨졌다. 잠시 멈췄던 도끼가 다시 정수리를 향해 거세게 내리꽂혔다.

하지만.

한 번 멈췄던 공격이 제 속도를 되찾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

취원보(取猿步)로 단숨에 놈의 뒤로 돌아들었다. 훤히 드러난 등줄기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파앗!

놈의 도끼가 허공을 수평으로 갈랐다. 내 허리를 노린 공격.

‘반응이 빠르네.’

곽선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하하민 수준은 되는 듯하다.

그래봐야 딱 거기까지지만.

당랑각(螳螂脚)으로 도끼날의 끄트머리를 걷어차고 다시 왼손을 뻗었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진 놈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니들 대가리 잡혔어!”

월영검으로 목줄기를 슬며시 훑으며 외치자 애새끼들이 한 번에 동작을 멈추었다.

“다들 무기 내려놓으라우.”

김강산이 옆에서 거들고,

“셋 셀 때까지 무릎 꿇어. 셋, 둘…….”

서은창이 그 옆에서 손가락을 접었다.

잠시 후 방위단 본부의 안뜰은 매우 평화로워졌다. 부상자도 거의 없었다.

나는 대장놈의 체면을 위해 녀석을 들춰 메고 방위단 본부의 방에 던져 넣었다.

녀석은 입을 앙다물고는 조용했다. 아혈은 안 눌렀는데 말이지.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리태연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래. 나 보위대 아냐.”

리태연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실력의 차이는 체감했을 텐데 기세는 여전했다. 의지인지 충심인지 단지 대가리가 비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원산성과 혈귀단이 완전히 한 몸일 가능성은 높지 않겠군.’

방위단에는 어둠속성이 한 명도 없었다.

일반적인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불, 물, 대지속성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양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나 남은 꼬치구이도 양보하고 싶어진다는 그 얼굴이다. 기왕 가진 거 적극적으로 활용해야지.

활짝 웃으며, 내가 말했다.

“물론 역적 따위도 아냐.”

“혹시… 동무들, 남쪽에서 왔수까?”

그렇다우. 리 동무.

내가 대꾸하지 않자 리 동무가 얼굴을 구기며 다시 물었다.

“암흑능력자들을 찾고 있음매?”

이번에는 대꾸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놈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지?”

“내는 모르오.”

“그러면?”

“성주님이라면 아실 수도 있겠소만.”

성주라.

장벽을 넘어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뿐이지만 이 북쪽 최남단의 성주놈이 좋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인하고도 남았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리치.

성 밖에 들끓는 괴물들.

성 안 사람들의 낡은 옷차림. 말라 비틀어져 장마당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그런 성주놈이라면…….’

한패는 아니더라도 혈귀단이 북쪽에 자리하는 과정에서 성주놈이 협조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장마당의 사냥꾼들은 어둠속성을 성 내에서 꽤나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게 가능하려면, 성 방어가 개판이든지, 혹은 성주가 용인했든지 둘 중 하나.

전자는 아니었다.

성문의 검문소는 삼엄했고, 장마당에서도 수시로 신분표를 검사했다. 우리가 오늘 하루 동안 그들을 피해 기운을 숨기고 담을 넘은 게 열 번도 넘었으니 혈귀단 놈들이 활보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지.’

.

.

.

“이리들 앉으라우. 내래 직접 가보려 했는데 성주라는 거이 하는 일 읍씨 무자게 바빠서.”

원산성의 성주 한수길은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대리석 탁자가 넓은 접견실의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나는 낫과 망치, 도리깨 따위가 석조 의자의 등받이 뒤에 화려하게 양각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실례가 많았네. 거저, 리 대장이 충심이 깊어 손님들께 예의를 차리디 못했군.”

한수길은 보위대를 사칭했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남쪽에서 왔느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넓대대한 얼굴이 사람 좋은 척 웃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암흑능력자들의 은거지를 찾고 있다 들었디. 내래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하여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네.”

속이 시커먼 놈이 개소리를 지껄였다.

보위대를 사칭하는 자들을 당장 잡아오라 지시한 게 자신이면서, 마치 리태연의 단독 행동이었던 듯 흘리고 있다.

방위단 본부에서 확인한 내 무위 때문이겠지.

그게 필요하겠지.

무엇을 위해 내 무력이 필요한지는 지금부터 확인하면 될 터.

“무슨 도움일까요. 영 궁금하네요.”

“자네들이 일으키는 자와 마주했던 현장을 확인했디. 방금 전 방위단에서의 이야기도 들었네. 대단하더군.”

“잘 모르시겠지만, 항상 듣는 얘기라 별로 놀랍지는 않네요.”

한수길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암흑능력자… 그자들이 원산성 인근에 자리한 지 오래되었네. 내 그자들이 껄끄러웠으나 두고 볼 수밖에 없었디.”

“왜죠?”

나는 놈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질문을 던져주었다.

“원산성의 병력으로는 버거운 자들이었네. 하디만 그것만이 아니야. 그자들의 본거지가 그 일으키는 자의 영토 너머에 있거든. 자네들도 상대해 봤으니 그 괴수가 얼매나 위험헌디 알갔디. 내 병사들을 그리 큰 위험 속에 내모는 것은 성주로서 할 일이 아닐세.”

“뭐, 그렇지요.”

“허디만 이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게 되었네. 자네들이 리 대장에게 했다는 이야기대로, 성 바깥 류민들도 모다 폐하의 신민이네. 일으키는 자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해디고 있어. 이대로 계속되면 류민들은 모두 그 괴수에게 생명력을 빼앗기게 되겠디.”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걸 아는 놈이 리치를 지금까지 방치했다고?

그리고 이제 와서 그걸 잡으려고 한다고?

여러모로 수상쩍은 놈이 수상쩍은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

어떤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내래 오래 준비한 작전이 있네. 자네들이 힘을 보태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아까는 도움을 주신다더니, 되려 도움을 구하시네요?”

“자네들도 암흑능력자들의 본거지를 찾고 있다고 들었네만. 내래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겄어. 단, 그곳으로 가려면 일으키는 자의 영토를 통과할 수밖에 없네. 목적이 같으니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허디 않겄나.”

진지한 얼굴로 한참을 지껄이던 놈이 드디어 말을 마무리했다.

“어떤가. 우리 작전에 합류하는 것이.”

“싫은데요?”

“아니, 어찌하여……?”

나는 비스듬히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일으키는 자? 영토? 그거 그냥 통과하면 되는데 뭐 하러 그쪽이랑 협조를 해요? 내가 얻을 게 뭐 있다고.”

“…그냥 통과라니.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

“네. 그쪽한테는 아니겠죠. 나는 그쪽이랑 달라서. 아무튼 대략이지만, 위치 알려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작전 성공하셔서 류민들 평안 되찾기를 진심으로 기원할게요.”

내가 까닥, 목례를 하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냈다.

막 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그래, 얼마를 원하는가? 내 의뢰비를 두둑이 지급하것네.”

진작 그렇게 나오셔야지. 이 새끼가 나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고 말이야.

다급한 건 저쪽이다. 여러모로 수상쩍은 부분이 있으나 그건 차근히 알아보면 될 일이고.

일단은.

나는 일어선 채 놈을 내려다보며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돈표는 필요 없어요.”

“…무엇을 원하시나?”

엄청난 마력의 리치였다.

그 마력으로는 백호 그 이상.

그렇다면, 놈을 잡으면…….

“그 일으키는 자. 그놈에게서 나오는 마핵. 그거 내가 가질게요.”

이 정도는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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